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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 이순태 20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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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12:1-3절 개역개정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떠남에 대하여(창세기 12:1-3)

 

1.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나사렛 사람 예수는 불과 12명의 젊은이들을 모아 놓고, 그들의 가슴에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심었다. 그분의 첫 설교는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이었는데, 이 선언은 그 분이 이 땅에 오심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 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예수님은 누가복음 19: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그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바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형태로 표현된다. 즉 나사렛 예수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였고, 그의 사명은 인류의 구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예수님에게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고, 이미 오래 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때부터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2: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의 약속을 하신다.

  첫째 약속은, 자손에 대한 약속이다/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둘째 약속은, 땅에 대한 약속이다/ 창세기 12: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셋째 약속은 복에 대한 약속이다/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복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 이스라엘과 맺게 되는 특별한 관계, 즉 언약 관계로 표현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의 모든 족속에게 약속된 복이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처음부터 모든 이방 민족을 포괄하는 것이지, 이방 민족이 나중에 추가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생각할 것이 있다. 바로 에 관한 것이다. 흔히 복! 하면 먼저 돈이 많아지는 것을 떠올린다. 그밖에 지위, 명예, 미모, 학력 같은 것들을 떠올린다. 그런데 소유는 그 자체로는 복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유산으로 인하여 형제간에 불화가 생기는 것을 안타깝게 종종 보게 된다. 명예와 지위가 높아지면 내 주변에 얼씬거리는 사람들 중 순수한 마음이 별로 없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나 중심으로 긁어모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나로 인해 행복해지는 것이 진정 복이다. 그래서 우리 이웃들이 당신 때문에 우리가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인생을 위해서 주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는가?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여기에는 두 개의 명령이 들어 있다. 하나는 떠나라!’ 다른 하나는 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먼저 요구하신 것은, 그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 -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 - 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고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본래 ’(에레츠)이다. 땅은 인간 삶의 기본적인 거점이다. 또한 아브라함 당시 사회는 부족사회이었기에, 부족의 연대감은 생존의 필수조건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땅(고향), 친척(인맥), 아버지의 집(유산)을 떠나라는 명령은 삶의 기본 요소(지연, 혈연)를 버리라는 요청이다. 즉 자연인 아브라함이 아니라, 인간적인 보호 영역을 감히 박차고 나온 신앙인 아브라함으로서 살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방패막이로 여겨온 것들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라는 것이다.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른다. 다만 하나님께서 앞으로 보여줄 땅을 향하여 가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 가지고서!

 

  믿음은 언제나 모험이지만, 특히 인생 전반전에 정말 노력해서 모아놓은 것들을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큰 모험이라 할 수 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의 관심은 영생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생 얻는 방법을 예수님께 물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9:21).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말씀에 그 부자 청년은 근심하면 집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재물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수십년을 걸쳐 먹고 싶은 것 먹지 않고, 쓰고 싶은 것 쓰지 않고 모아놓은 재물, 밤을 지새우며 놀지 않고 쌓은 지식, 온갖 억울함과 모욕을 견디면서 오른 지위를 떠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내가 어떻게 이룬 업적인데... 내 공적과 노력을 생각하면 그것을 떠나기가 정말 어렵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75세된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요구하셨다. 기존에 의지하던 것들, 익숙하던 것들로부터 떠나는 믿음의 모험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렵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을 향하기 보다는, 이미 익숙한 것들, 이미 모아놓은 것들에 머물려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가장 크게 떠오는 것은 안전감이다. 그러나 새로움을 향한 떠남이 없이는 인생의 후반전에 새로움은 없을 것이다. 새로운 시도 없이 새로운 결과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남은 부푼 가슴을 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출발하는 것이다. 몸 전체로 퍼지는 새벽 공기 마시면서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분명 두려움이 수반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큰 자유와 맑은 눈을 가질 수 있다. 일흔 중반을 넘어선 몸을 이끌고 아브라함은 길을 떠났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정든 고향, 친척, 그의 삶의 기반이 되었던 아버지의 집은 서서히 뒤로 밀려나게 된다. 대신 전혀 알 수 없는, 한번도 보지 않던 낯선 땅들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다. 인간적인 내비게이션도 없다. 그 목적지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다.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긴다. 그런데 도대체 아브라함은 편안하고 익숙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왜 고생 뻔한 나그네길을 나선 것일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 , 복의 약속을 묶어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여정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이제 나이도 지긋하니 남은 삶 편하게 살다가 죽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익숙함 속에 안주하게 되면, 새로운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믿음에는 은퇴가 없다. 주님께서 우리 영혼 부르시는 그날까지 믿는 자의 삶은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신앙인의 정체성이다. 바로 떠남의 영성, 나그네의 영성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하였다. 아브라함이 마침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7). 그런데 그가 떠나야 할 것은 하란 만이 아니었다.

  가나안 땅에 극심한 기근이 들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그에게 두려움이 있었다. 애굽 사람이 자기 아내 사라를 취하기 위해 자기를 죽이지는 않을까? 이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거짓말을 하였다. 사라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말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세상적인 방식을 사용하였다. 그 방식에서 아브라함은 떠나야 했다.

  또한 아브라함은 자녀에 대한 기대로 여러 번 믿음에서 추락하였다. 자식이 없자 아브라함은 자식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당시의 풍습을 따라 자기 집의 종을 상속자로 삼으려 하였다. 후에는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얻은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손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인간적인 계산과 방식을 더 의지하려는 것에서 떠나야 했다.

  후에 아브라함은 아내인 사라를 통해서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게 된다. 100세에 얻은 아들, 그것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약속을 파기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받들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정말 보물같은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떠났던 것이다.

 

3.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믿음이 성숙되는 과정에서 매번 요구되는 것은 떠남이라는 것이다. ‘떠남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고 현실이 된다. 우리를 안전의식에 머물게 하는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 즉 삶의 배경과 터전을 떠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면서 애굽으로 내려가 두려워하고 거짓말을 하였던 방식에서 떠나야 한다. 심지어 약속의 아들 이삭까지 바침으로써 정형화된 믿음의 틀에서조차 떠날 때 주님의 약속은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는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있다. 일흔 다섯된 노인에게 많은 사람의 복이 될 것이라는 약속은 믿기 어렵다.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 가족이나 친족에게 폐를 안 끼치면 그것으로 족하다~ 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런데 나의 존재가 남에게 복이 된다? 정말 좋은 말이지만,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자식을 위해 한평생 수고했는데, 막상 나이가 들고 힘이 없어지니 자식들이 나를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아 괴롭다. 때로는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괜히 분위기를 깨는 것 같아 슬며시 자리를 피하기도 한다. 그래도 직장이 있고 돈을 벌 때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는데, 은퇴하고 나니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는 것 같아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너는 온 세상의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지금 자리에서 떠나라 하신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 친척을 떠났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아마 노년이 된 아브라함이 자기 인생을 되돌아볼 때 자신이 누구에게도 복이 되지 못했음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그렇게 내 인생 마감되는가 싶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고, 그에게 떠남을 명령하셨고, 아브라함은 기꺼이 떠남의 삶을 살게 되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떠남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나이 듦은 먼저 나를 떠남이다. 나의 과거, 나의 고정관념, 나의 자아를 떠나는 것이다. 그럴 때 내 이웃, 내 가족이 제대로 보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복의 통로가 되어간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약속이 믿는 우리의 삶에서 성취되어 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가수 노사연이 부른 만남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에 이런 가사가 들어 있다.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떠나가다가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기억하자. 욕심내지 말자. 가지고 가지도 못하면서 잔뜩 움켜쥐지 말자. 잘난 체하려고 목소리 높이지 말자. 사랑으로 양보하고 손해 보자!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도 그럴 것이다. 옥상에 있는 자들은 보물 꺼내려 집안으로 들어가지 말자. 들에 있는 자도 뒤를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나를 부르신 주님의 음성을 향하여 걸어가자. 주님의 오심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코자 함이었으니, 우리 역시 그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남은 삶을 복되게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주님께서 왜 당신에게 맑은 정신과 움직일 수 있는 몸을 주셨는가? 주님께서 왜 아직까지 내 생명을 보존하셨는가?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님의 부르심에 아멘~ 하며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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