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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이순태 202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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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47:7-10절 개역개정

7.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나그네 길에 비유하곤 한다. 가수 최희준이 하숙생이라는 곡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이 노래에서 나그네란 단어는 회한과 슬픔, 허망함 같은 정서를 담고 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것 같은 불안함과 막막함이 새겨져 있다.

단편소설 작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모파상은 큰 돈을 벌었디. 지중해에 요트가 있었고, 노르망디에 저택이 있었고 파리에도 호화로운 집이 있었다. 은행에는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했고, 후에 그는 정신병자가 되어 고통스럽게 살다가 43세로 생을 마쳤다. 그의 묘비에는 평소에 그가 했던 말이 적혀 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 인생의 굴곡을 엄청나게 겪은 후에서야 다듬어진 자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야곱을 들 수 있다. 그는 흠이 많고, 집착도 강한 사람이었다. 노년이 되어 야곱은 이미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요셉을 만나러 애굽으로 향하였고, 바로 앞에 서게 된다. 그때 나이가 얼마가 되느냐는 바로의 질문에 야곱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소회를 밝힌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짧막한 이 말에는 노인이 된 야곱의 믿음과 인생에 대한 통찰이 엿보인다. 야곱은 자기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고 표현한다.

성경을 보면 곳곳에 인생을 나그네에 비유하고 있다. 창세기 23:4절에서 아브라함은 스스로를 나그네라고 밝히고 있다. 이삭 역시 네게브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살던 나그네였다. 출애굽기 22:21절에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나그네로 표현한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다윗 왕은 역대상 29:15절에서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1절에서 편지를 받는 교인들을 나그네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에베소 교회,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고린도 교회 등을 두루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유랑하는 설교자로 살았다. 히브리서 11:13절은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은 자들을 나그네라고 말씀한다. 마귀는 늘 우리가 이 땅의 주인, 에덴동산의 주인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가 이 땅의 나그네임을 강조하신다.

 

그러면 여러분, 나그네가 무엇인가? 한 곳에 오래 정착할 수 없는 존재들, 언젠가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야 하고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정착하고 싶어도 정착할 수 없고, 아무리 큰 집을 짓고 살아도 다 놓고 떠나야 하는 존재들을 성경은 나그네라고 부른다. 그런데 세상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나그네와 성경에서 언급하는 나그네와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걸어가는 방향, 목표가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에서 나타난다.

히브리서 11:16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믿음의 사람들은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나그네들이다. 방향 없이 이러저리 그때그때의 쾌락이나 즐거움만을 찾아다니다가 쓰러지는 불나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본향을 향해 날마다 걸어가는 나그네이다.

 

2. 그러면 우리가 본향인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나그네라고 할 때, 그곳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첫째, 나그네는 짐을 가볍게 해야 한다/

짐이 무거우면 여행이 힘들다. 자신이 하늘을 향하는 신령한 나그네임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 세상 것에 집착하면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은 더욱 힘들어진다. 우리는 입술로는 나그네라고 하지만, 실상은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물론 세상살이를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성실하게 일해서 재물도 얻고, 가족과 행복을 누리는 것은 중요하다. 문제는 지나치게 세상적인 소유나 쾌락에 집착하는 것이다. 세상에 집착하다 보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게 된다. 만족함이 없게 된다.

세상에 집착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는 야곱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가로챈 결과로 집을 떠나 타향살이를 해야 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하란으로 보낸면서 얼마 후 다시 만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것이 야곱과 마지막이 되었다. 야곱은 하란에서 나그네로 20년을 보내면서 4명의 아내와 12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아내들의 시기로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딸 디나는 강간을 당하고, 두 아들은 이에 분노하여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과 동침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이제 살만하다 싶었는데, 야곱이 특히 사랑하는 요셉을 다른 아들들이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 버렸다. 그 사실도 모르고 있다가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서야 야곱은 요셉과 재회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야곱의 인생은 그가 바로에게 한 말처럼 험악한 세월이었다.

시편 39:6절은 이렇게 노래한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어수선하고 생활이 야단스러운 사람들은 결코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없다. 이 땅의 삶이 즐거운 여행길이 되지 못하고 힘들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적인 욕심을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여기서 말씀하는 육체의 정욕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악한 욕구들을 뜻한다. 베드로전서 4:3절은 그에 대해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라고 설명하고 있다. 육체의 정욕은 영적인 삶을 부패하게 만든다. 시기하고 교만하며 분열을 조장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이런 육체의 정욕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날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둘째로, 나그네는 세월을 아껴야 한다/

나그네로서 이 땅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나그네로서의 삶이 얼마나 유한하며 빠르게 지나가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야고보서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참으로 이 세상의 삶은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며, 안개 같고 그림자 같이 빨리 지나간다. 그러므로 자신이 나그네임을 깊이 인식한 사람들은 세월을 아끼며 매사에 충성하는 삶을 산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결코 헛되이 소비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세월을 아끼는 것일까? 베드로전서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우리의 나그네 길은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다 된 것은 아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재산을 빼앗겼다. 욕을 당했다. 억울한 비방을 당했다.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은 그렇게 물리적인 핍박은 많지 않다. 그러나 다른 유형의 핍박과 조롱은 여전하다. 기독교와 관련된 비리 사건이 터지면, 엄청난 비난 댓글들이 따라 붙게 된다. 그러면서 기독교, 더 나아가 하나님까지 싸잡아 부정한다.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폄하하면서 신앙이 없어야 더 행복하다는 식의 논리를 펼쳐 간다. 공공장소에서도 종교차별이라는 이유로 예배나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한다. 어느 순간 인권이라는 논리를 펴면서 잘못된 세상의 흐름을 지적하는 것에 제동을 건다. 이러다가는 전도조차도 제동이 걸릴 때가 올지 모른다. 이런 거대한 구조적 악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에서 나그네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엇보다도 선한 행실을 해야 한다.

벧전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마태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은 육체의 정욕으로 살아가는데, 바로 그런 사회 속에서 선한 행실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진리를 찾지 못하도록 상황을 왜곡하는 자들의 시도를 막을 수 있다. 또한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3. 사르트르라는 실존주의 철학자가 있는데, 그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지성인이다. 그는 1980년 봄 프랑스의 부르셰 병원에 폐수종으로 입원했는데, 병원에 한 달 가까이 있는 동안 발악을 하고 미치광이처럼 고함을 쳐 댔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그는 죽음이 두려워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아내에게도 묻지를 못했다. 한 세계를 풍미한 사르트르는 그리고 소리를 지르다가 얼마후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고 난 뒤, 프랑스 언론이 떠들어댔다. “자유를 그렇게 외치던 그의 마지막이 그토록 비참한 이유가 무엇인가?” 한 독자가 이런 기사를 썼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독일 신학자 본 훼퍼가 있다. 그는 1945년 나치에 항거하다가 죽었다. 어느 날 간수가 감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직감적으로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알았다. 그는 함께 있던 감방 동료들에게 미소를 띄우면서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에게 죽음이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기옥하십시오. 이 일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집으로 갑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그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본 훼퍼를 뒤덮고 있는 기쁨과 평안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르트르와 본 훼퍼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과 돌아갈 고향을 준비한 사람의 차이다. 여러분! 돌아갈 고향이 있는가?

 

야곱은 애굽의 바로에게 자신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술회하였다. 환난과 슬픔을 참 많이 당했다. 그러나 그 고난이 모든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고난이 있었기에 야곱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만큼 겸허해지고 하나님의 손길에 의지하며 살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은 나그네 길임을 잊지 말라. 야곱처럼 인생의 거친 들에서 환난의 비바람에 시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의 괴로움으로 인해 더욱 본향을 사모하시길 축원한다.

세상 사는 동안에 천국 소망 가지고, 이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시간을 아름답게 채워가시길 축원한다.

우리의 나그네 여정이 끝날 때 주님의 은혜로 천국에 당도하게 될 때, 주님이 주시는 영광의 면류관 받아쓰게 되는 복된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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