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

  • 홈 >
  • 목회와 신학 >
  • 나이 듦
나이 듦
죽음 준비 이순태 2023-09-08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09

http://singwang.onmam.com/bbs/bbsView/117/6292756

[성경본문] 신명기34:5-8절 개역개정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이자 사상가로서 ‘C.S. 루이스가 있다. 루이스는 영국인으로서 아주 늦게 결혼을 하였는데, 58세에 미국인 조이 그레샴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다. 그런데 당시 그 여자는 골수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것을 알고도 루이스는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해서 결혼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기 3년 전에 아내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아내가 죽은 후, 루이스는 헤아려 본 슬픔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자신의 아름답고 눈물겨운 사랑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후에 이 책은 섀도우랜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하였는데, 루이스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라는 이별은 참으로 어려운 고통이지만, 그 고통은 우리가 누려왔던 행복의 일부분이다.” 루이스는 죽음에 대해 매우 놀라운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누구나 죽는다. 그렇다면 인생의 핵심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 라는 문제일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에 관한 기록을 보면, 모세는 마지막에 죽음에 대한 조급함이나 몸부림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신명기 34: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이 구절을 읽다 보면 좀 아쉬움이 있다. 모세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니, 좀 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더욱이 모세가 그렇게 간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마치 잘 자란 식물이 이제 조금만 있으면 꽃이 활짝 필 터인데 어쩌다가 그만 시들어버린 것 같은 안타까움이 든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므리바 물가에서 모세가 자신의 혈기를 드러낸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질책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거부되었다(20:12). 물론 모세가 그 즉시 가나안 땅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 간청하였다.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3:25). 그러나 하나님의 태도는 단호하였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3:26).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40년 동안 광야의 어려움을 견뎌냈다. 그런데 그의 사명은 거기까지였다. 가나안 땅으로 백성을 인도하는 것은 그의 후임인 여호수아의 사명이 되었다. 이제 모세는 느보 산 정상인 비스가 봉우리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모세는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러면서 모세는 자신의 마지막 준비를 하였다.

 

2. 먼저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교훈하는 설교를 하였다. 이 마지막 설교를 모아놓은 것이 신명기이다. 즉 신명기는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하는 고별 설교인데, 유언(testament)이라고 할 수 있다. 유언은 떠나는 자가 남아 있는 자에게 주는 말씀으로서, 남은 자들이 지켜야 할 삶의 교훈이 들어 있다. 40년 동안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모세의 진심 어린 충고와 애정이 신명기에 담겨져 있다.

 

또한 모세는 자신이 40년 동안 섬긴 이스라엘 백성이 지도자 없이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웠다. 물론 그 과정 역시 모세의 독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를 따른 것이다. 모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을 차분하게 준비하였다. 아직 기력이 남아 있을 때, 아직 분별력이 흐려지지 않을 때, 죽음을 준비한 것이다. 그렇다. 죽음은 아직 내가 건강할 때 준비하는 것이다. 모세는 자신이 가야 할 때를 알았고, 그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였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의 죽음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준비하였다. 에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미리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간에 성전을 정화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유월절 식사를 하셨다.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맞는 최후의 기도를 드리셨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매우 세밀하게 준비하셨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떠날 때가 되었음을 감지하고, 디모데에게 유언과 같은 편지를 남긴다

딤후 4:6-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선한 싸움을 싸웠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완수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이제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자가 진정 복 있는 자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과 관련하여 빌립보서 1:21-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은 죽음에 대해 큰 두려움이 없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사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죽을 준비가 된 사람이다. 부르심에 충실하면서 살면 언제 죽어도 괜찮다. 물론 어느 누구도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완전히 걸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 하루를 예수님의 제자로 신실하게 산다면 그의 생명은 하루하루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사명을 이루려고 주신 기회이다. 그래서 어느 때이든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에게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다. 믿는 사람은 죽음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 주님을 뵙게 될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이후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면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기 위해 준비한다.

 

3.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이 제네바에서 임종하자 제네바 온 시민들은 칼빈의 죽음에 애도를 보냈다. 그런데 그의 장례식만은 아주 조촐하게 치러졌다. 그의 유언 대문이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다. “내 장례를 검소하게 하고,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라.”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칼빈의 무덤이 방치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그의 제자 중 하나가 무덤 앞에 작은 돌을 세우고 그 돌에다 존 칼빈의 첫 자, J.C.를 새겨 놓았다. 우리는 종교개혁자 칼빈 무덤 앞에서 설 때, 그 어떤 화려한 무덤보다도 그를 쓰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된다.

 

칼빈의 일생의 좌우명이 무엇인가? Coram Deo(하나님 앞에서)! 칼빈은 일생 동안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에도 겸손한 죽음으로 주인되신 하나님을 높이고자 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부활을 믿는다면, 죽음은 우리 삶의 또 다른 단면일 뿐이다. 지나가는 터널일 뿐이다. 우리는 세례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 고백처럼 우리는 날마다 죽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날마다 죽으면 정작 육신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담담해질 수 있다. 내가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서 가볍게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 여러분의 남은 삶에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평소에 죽음을 준비하는 믿음 가지시길^^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낮은 마음 이순태 2023.09.08 0 110
다음글 기다림 이순태 2023.09.08 0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