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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마음 이순태 202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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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열왕기하5:1-14절 개역개정

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 오늘 본문을 보니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이다. 당시 아람과 이스라엘 간에는 적대 관계였다. 주전 9세기 후반 이스라엘은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인접국인 아람은 그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다. 아람은 공공연하게 이스라엘을 습격하여 사람들을 잡아가곤 하였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이에 대해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나아만은 바로 그 적국의 군대 장관이었다. 게다가 1절을 보면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으며, ‘큰 용사였다. 나아만은 왕과 자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 부귀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나병환자였다. 큰 용사로 이름을 떨치던 그에게 심상찮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몸 여기저기서 반점이 생기고 곪고 썩어 들어갔다. 이것은 그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 있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명성, 부귀영화를 다 내려놓고 숨어 살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곳곳에 나아만과 같은 그러나가 숨어 있다. 지혜롭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다. 화려함을 드러내고 부러움을 받으며 산다. 그러나~ 드러낼 수 없는 아픔과 상처가 그 안에 웅크리고 있다. 온전하고 멋진 인생을 사는 것 같다.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를 운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그 웃음이 억지요 거짓일 수 있다. 내 인생은 내 것! 큰 소리치지만, 정작 내 힘과 결단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인생길에서 무력감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이런 인생에서 어떻게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운명처럼 다가오는 무력감을 이기고 정말 남은 생을 보람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바로 낮은 마음이다.

 

나이 들다 보면, 인생 경험이 좀 쌓였다 싶으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바로 꼰대가 되는 것이다. 꼰대는 본래 아버지나 교사와 같이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비록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꼰대가 되어버릴 수 있다. 그러다보면 다음 세대와의 소통이 막히게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낮은 마음이다.

 

2. 오늘 우리는 본문을 따라가면서 나아만이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 어떻게 새로운 삶이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 보도록 하자.

 

첫째, 나아만은 낮은 마음으로 계집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아만은 화려한 훈장과 의복 안에 썩어져 가는 몸뚱아리를 숨기면서 힘들어하던 차에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집에 포로로 잡혀 와 집안 일을 돕고 있는 이스라엘 여종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를 만나면 그 병을 나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나아만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짓밟은 나라에서 잡아 온 소녀를 통해 구원의 길이 열렸다.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낮고 천한 사람들을 통해 자주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신다. 사도 바울은 말이 시원치 않다고 조롱받는 설교자였다. 모세 역시 혀가 둔한 자였다. 신약성경의 언어는 헬라어로 되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코이네 헬라어이다. 코이네 헬라어는 철학자들, 문인들이 쓰는 고상한 언어가 아니라, 세상에서 일반 민중들이 쓰는 그런 언어였다. 그래서 주후 5세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하기 전 성경을 읽다가 성경책을 집어던졌다. 너무나 성경 문체가 조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구원은 거칠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통해서 증거된다. 구원은 우리가 무시한 사람들,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때 오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실까? 우리를 겸손케 하시려고!

나이가 들면, 지위가 높아지면 고집을 부리기가 쉽다. 자신이 경험한 것 꽉 붙들다 보면 다른 것은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생명의 길은 손아랫사람에게 귀를 기울일 때 찾아온다. 나아만은 비천한 여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낮은 마음이다.

 

둘째, 나아만은 높은 마음으로 엘리사를 찾았다/

나아만은 여종의 말을 듣고 곧장 엘리사를 찾을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력에 걸맞게 많은 재물을 준비하였다. 은 십 달란트, 금 육천 개, 의복 열 벌을 준비했는데, 어느 학자는 이것을 오늘날 화폐로 계산하니 약 10억원 이상이 된다고 한다. 나아만은 자신의 이력과 명성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병을 고치러 오는 사람에게 이런 거창한 껍질이 필요할까? 우리의 멋진 이력서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내가 이만큼 오래 믿었는데... 내게 이런 직분이 있는데... 내게 이만한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이 있는데... 내가 이만큼 배웠는데...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데 도움이 될까? 아니다. 오히려 더욱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그런 이력에 연연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 만나지 못한다.

 

정말 내가 주님 만나고 내 인생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시쳇말로 계급장 다 떼어야 한다. 목사로 주님 만나는 것 아니다. 장로로 주님 만나는 것 아니다. 계급장 떼고, 거창한 옷 벗어 던질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신다. 성경은 우리더러 비워야 한다고 말씀한다.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그렇다. 우리가 주님 만나 새 삶을 살고자 한다면 먼저 껍질을 벗어야 한다. 다른 어떤 것 의지하지 말고,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그런 과정이 나아만에게는 낯설었다. 그는 낮은 마음으로 여종의 말을 들었지만, 거창한 행렬과 함께 엘리사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다. 대신 종을 보내 나아만더러 요단 강에 내려가 몸을 일곱 번 잠그라! 명할 뿐이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일국의 군대 장관을 예언자라는 작자가 이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 적어도 나아만이 기대한 것은 이런 것은 아니었다나아만은 11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나아만은 하나님의 예언자인 엘리사를 찾으면서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었다. 나아만 장군이 도착하면 큰 환영식이 있은 후에, 촛불을 켜고 성수를 떠 놓은 제단 앞에서 거룩한 옷을 입은 선지자가 예식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곤 나아만의 몸에 손을 얹고 축복을 하며, 아람 군대 장관의 체통에 걸맞는 예식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아만의 이런 기대는 와그르 무너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터무니없는 이유로 인해 신앙을 떠나는지 모른다. 그들은 교회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움직이기를 기대한다. 자기들 나름대로 교회의 그림, 목사의 그림을 그려놓고, 그에 걸맞아야 제대로 된 교회, 제대로 된 목사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처럼 자신의 생각틀을 고수하는 한, 그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놀라운 구원, 감격은 인간적인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요단 강! 별볼일 없는 강이다. 아람에는 요단 강보다 훨씬 큰 강이 있다. 나아만은 12절에서 거세게 엘리사의 말에 항의하였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당시 다메섹의 아바나 강은 황금의 강으로 불렸다. 레바논 산에서 흘러내리는 최고의 수질을 자랑했다. 나아만은 몸을 씻으려면 그런 좋은 강이 있는데, 왜 하필 보잘 것 없는 요단 강이어야 하는가? 이런 자그만 강에 몸을 담그라! 그러면 낫는다고? 웃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이런 뜻하지 않은 것들을 통해 일어난다. 우연히 방문한 어느 교회에서 들은 말씀을 통해 머리를 둔기로 맞은 듯 충격을 받는다. 마음이 답답한데 라디오에서 들은 누군가의 간증을 통해 무릎을 꿇게 된다. 우연치 않게 듣던 찬송을 들으며 눈물이 나고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능력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런 일상적인 것, 보잘 것 없는 것들을 통해 나타난다.

 

셋째, 나아만은 낮은 마음으로 부하의 조언을 들었다/

중년 이후에 빠지기 쉬운 연약함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자존심과 체면을 지켜려다가 쉽게 분노한다는 것이다.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과 관계가 나빠지기도 하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끌어안고 끙끙대기도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분노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는 나아만에게 그의 부하들이 말했다. “아니 장군님, 더 큰 일을 하라 하면 하지 않으셨겠어요? 병만 낫는다면 뭘 못하겠어요? 그런데 요단강에서 몸 씻는 것이 뭐 그렇게 어렵습니까?” 가만히 생각하니 그 말이 일리가 있다. 그래서 나아만은 부하들의 말을 들었다. 낮은 마음이 된 것이다. 분노로 판단이 흐려질 때, 이처럼 적절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이제 나아만 장군은 요단 강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얼굴을 만져보는데, 일그러진 모습 그대로였다. 두 번째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손등을 닦아 보는데 여전히 진물이 흐른다. 세 번째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강가에 있는 부하들에게 물었다. “내 얼굴이 어떠냐?” “황송하게도 아직 그대로입니다.” 네 번, 다섯 번··· 점점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여섯 번째 풍덩 물 속에 들어갔다. 병이 나을 것 같으면 지금쯤 어느 정도 회복의 기색이 보여야 하지 않나? 그런데 이게 뭐야? 점차 의심이 몰아쳐온다. 내가 괜한 일 했구나! 실망감과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도 연기를 피운다.

그러나 나아만에게 주어진 수는 일곱이었다. 일곱 번 잠그라! 일곱은 완전 숫자다. 완전한 순종이어야 한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요단 강에 뛰어들어간 후 얼굴에 묻은 물방울을 훔치며 엉금엉금 강둑을 기어올랐다. 바로 그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4절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일그러지고 문드러진 나아만의 피부가 어린 아이의 피부처럼 깨끗하게 되었다. 그런데 피부의 껍질만 벗겨진 것이 아니다. 그의 불신앙의 껍질도 벗겨졌다. 나아만은 열왕기하 5:15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그런가하면 5:17절에서는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스스로를 이라고 불렀다.

 

3. 그러자 이번에는 엘리사가 집에서 나와 나아만을 대면하였다. 과거의 경험과 지위 때문에 우리 마음이 높아져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낮은 마음이 될 때 은혜받기에 합당한 겸손한 마음이 되면, 비로소 주님이 보인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보인다.

 

오늘 본문을 보니 나아만의 치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종과 부하들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큰 구원을 베푸셨다. 그렇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우리 자신에게 방점이 찍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겸손한 주님의 종들은 자신이 한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이 스포트라이트 받는 것을 사양한다. 오직 주인이신 예수님만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창한 신분이나 능력자가 아니라, 육신의 힘도 약하고 경제력이나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세상의 낮고 연약한 사람들, 조연과 엑스트라를 통해 일하기를 기뻐하신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누군가를 구원하고 새 삶을 살게 하는데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를 사용하신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낮은 마음! 낮은 마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아름다운 도구들이 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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