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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조롱하나이다 : 인정 욕구 이순태 20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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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예레미야20:1-11절 개역개정

1.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5.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6.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1. 사람을 다른 말로 인간이라고 한다. 그냥 사람 ’()자를 써서 하면 될 터인데, 구태여 인간’(人間)이라고 했을까? ‘인간이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의미한다. 즉 인간이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양육되며 살다가 사람 사이에서 죽는다. 즉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타인과의 관계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은 큰 차이가 난다. 때로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어울려야 하고, 싫어하는 상사의 기분을 살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다보면 멀리 벗어나 혼자 살고 싶지만, 어떤 형태로든 인간은 관계라는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인간관계가 삶에서 필수적이라면, 어떻게 서로에게 얽매이거나 종속됨이 없이 우리는 자유함을 누리면서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인간관계와 관련하여 인정 욕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 인간은 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상대방이 적이 아닌 바에야 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아들러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을 적절치 않다고 부정한다. 즉 인간관계에서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없고 더욱이 인정받기를 바라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타인에게 일부러 미움을 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타인에게 미움 받지 않고, 더 나아가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그런데 그런 본능적인 충동에 따라 이끌려 살면 과연 자유할까? 오히려 욕망과 충동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참으로 자연스러운 욕구이고, 타인에게 인정을 받으면 확실히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인정받는 일이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그러면 대체 왜 인정받고 칭찬 받고 싶은 걸까?

자기심리학자인 하이즈 코헛은 유아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부모의 기능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유아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과대적·과시적 욕구를 양육자가 충족시켜 주어야 하는데, 양육자인 부모는 찬사와 인정을 받으려는 아이의 욕구를 반영(mirroring)해줌으로써 아이의 자기감을 받쳐 준다. 그런데 그런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못하거나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할 부모 양육 과정에 문제가 생길 때, 아이는 성인이 되어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즉 타인의 인정과 찬사에 갈급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런데 타인의 인정 욕구를 당연하고 해서, 그것에만 신경을 기울이면 결국은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된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 역시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삶을 택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결단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미움을 받으며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누구에게나 미움을 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제나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모든 사람에게 충성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누구의 미움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관심과 기대감에 부응하다 보면, 인기에 연연하는 정치가처럼 하지도 못할 일을 할 수 있다고 약속하거나 책임지지 못할 일까지 떠맡게 될 소지가 있다. 우리는 예레미야 20장에서 그러한 인물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여호야김 왕 초기에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공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전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설교자는 예루살렘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바스훌이었다. 바스훌은 성전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명망이 높았다. 그가 팔을 뻗어 축복하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에게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 복을 받고자 하였다. 그는 매사에 긍정적이며 자신만만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좋아했다. 살다 보면 힘든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그런데 바스훌은 이런 암울한 이야기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만사가 잘 될 것이라는 말을 거듭 선포했다. 그러니 모든 성도들이 그를 좋아하였다. 특히 왕과 신하들은 이런 바스훌을 귀히 여겼다. 이런 인물이 있어야 나라가 침체 되지 않고 승승장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예언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상황을 바로 보고 바로 살게 하는 자이다. 그런데 거짓 예언자들은 현실을 왜곡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반대로 전하였다. 왜 그럴까? 하나님보다 백성들의 인정과 찬사를 더 갈급했기 때문이다. 거짓 예언자들은 청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였다. 그들은 평화~ 평화~’를 외쳤다. 지금 나라와 사회 곳곳이 썩어가고 있는데, 고름이 가득 차 있는데, 진통제만 놓으면서 괜찮아! 다 잘되거야!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아~” 이러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보니 상처는 더욱 심해지고 나중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다. 그러나 그것은 죄나 잘못을 대충 덮어놓고 만민과 원만하게 지내는 그런 평화가 아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고통스러운 주제 이야기하기를 거부하거나, 쓰라린 부위를 소독하기를 거절하는 그런 평화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인권이 침해되고, 사회 주변부에 있는 자들이 무시당하는 현실에 눈감고 평화!를 외치는 설교는 어쩌면 잔혹극에 불과할 수 있다.

예언자로 부름받은 예레미야의 임무는 거짓에 도전하고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백성이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자기 입맛대로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정말 경배하기를 원했다. 예레미야는 종교 지도자들의 왜곡된 행태를 비난했다. 정작 하나님의 뜻은 제쳐놓으면서, 무엇을 하든 형통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종교에 대해 예레미야는 아니오!를 외쳤다. 대중적인 인기나 다수의 호응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레미야의 선포는 순식간에 퍼졌고, 그로 인해 예루살렘은 시끄러운 상태가 되었다. 물론 성전 총감독인 바스훌의 귀에도 그 소식이 들어갔다. 바스훌이 성공적인 사역을 하고, 대중의 인기몰이를 하는데 있어서 예레미야와 같은 인물은 도무지 도움이 되질 않았다. 바스훌은 즉각 예레미야를 체포하여 때리고, 성전 북쪽 방에 가두었다.

다음날 예레미야는 바스훌을 향하여 당신의 이름은 마골밋사빕이 될 것이오! 말했다. “사방에서 엄습하는 두려움이라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구체적으로 바벨론이 이 땅을 침략하여 모든 것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당신의 설교는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린 거짓 설교임이 탄로날 것이오! 성공을 위한 종교적 숭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오!”

그런데 이런 예레미야의 언행에 대해 백성들은 거리를 두었다. 친한 벗들도 다들 예레미야를 멀리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유혹의 덫에 걸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 그 잘난 체하는 예레미야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외로웠다. 사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향해 이런 경고성 예언을 선포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인정받고 찬사를 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항변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20:7). 예레미야는 다짐도 해보았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20:9). 하지만 그런 다짐도 부질없었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뜨거움 때문에 그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타락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새로운 길을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그는 차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예레미야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지도자들의 마음을 사는 것, 백성들의 호감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지도자들과 백성의 미움 받을 것을 각오하였다.

 

3.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고 싶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부자유스럽고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다. 참 자유를 누리려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걸으려면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이 나에게 어떤 평가를 내리든 괘념하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는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미움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을 기시미 이치로라는 심리학자는 미움 받을 용기라고 표현한다.

진리를 위해 기꺼이 미움 받을 용기! 그것은 인정과 찬사를 원하는 충동에 따라 살지 않고 오히려 눈앞의 언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인간관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이다. 주님께서 주신 삶을 올바로 살 수 있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을 기시미 이치로는 과제 분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디까지가 내 과제이고, 어디서부터가 타인의 과제인가 냉정하게 선을 긋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경우 타인의 과제까지 내 과제로 생각하고 간섭하고 지시한다. 또는 반대로 내 과제 속으로 타인이 들어오는데도 그것을 당연히 여기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특히 사랑이라는 이유로 서로의 과제에 끼어든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독립성, 존재감을 갉아먹는 결과로 이어진다.

내가 누구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 그런데 그런 관계에서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다가서면 타인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나와 관계를 회복할 의사가 없어도 상관없다. 문제는 내가 결심하느냐 마느냐 라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가 쥐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자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결단하신 것이다. 그 기도를 들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올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예수님의 기도와는 별개의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조롱한 당사자의 과제일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든 상관하지 않고 당신의 과제를 수행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곧잘 인간관계의 카드를 타인이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러나 이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타인이 바라는 것을 충족시키려는 삶은 결코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과제를 주셨다. 나의 과제, 타인의 과제. 나의 과제를 포기하지도 말고, 경계선을 넘어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도 말라! 삶의 모든 카드는 바로 나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 타인의 인정과 찬사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이 주신 사명, 주님이 주신 좁은 길을 묵묵히 걷는 것! 삶의 자유로움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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