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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 어김이 없거늘 : 거짓자기(False Self) 이순태 20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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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15:25-32절 개역개정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나온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은전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 이 비유들은 하나의 목표점을 향하여 나선형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띠고 있다. 첫 번째 비유에 나오는 숫자는 100이다. 일백 마리의 양들 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고, 그것을 찾아 집으로 데리고 와 친구와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하였다. 두 번째 비유에 나오는 숫자는 10이다. 열 개의 은전 중 한 개를 잃어버렸다. 그러자 여주인은 구석구석 그 은전을 찾다가 마침내 그것을 찾고서는 친구와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하였다. 세 번째 비유에 나오는 숫자는 2이다. 두 아들 중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런데 마침내 그 아들이 돌아오고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 축하 잔치를 열었다. 이 세 비유는 비슷한 구조와 결말을 가지고 있다. “무엇을 잃고 - 찾아다니고 - 찾았고 - 이어서 축하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들을 말씀하시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누가복음 15:2절은 이렇게 배경을 설명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렸다. 여기서 수군거려라는 단어는 ‘diegoggyzon’인데, 이 단어가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을 보면 출애굽기 16:2절에 나오는데, 거기서는 원망하여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동사의 본래적인 의미는 투덜대다, 불평하다이다. 도대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무슨 불만이 있길래 이렇게 투덜댄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세리와 죄인들, 평판이 나쁜 사람들, 같이 있기도 불쾌한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식사도 같이 하고, 그들을 오랜 친구처럼 대하느냐?” 라는 것이다.

당신은 이런 경험 한 적이 있는가? 지갑이나 열쇠꾸러미들을 어디에다 두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애를 태우다가, 전혀 엉뚱한 곳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되면 헛웃음과 함께 즐거워한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가 찾은 경험을 가진 자들은 기꺼이 성공적으로 되찾은 것에 대해 기뻐할 수 있다. 예수님의 행동방식에 대해 투덜대던 바리새인들 역시 잃어버린 양과 은전, 아들을 되찾은 이야기에 기꺼이 동의하고 박수를 보낸다.

바로 그때 방어막이 잠시 늦춰진 틈을 타서 예수님은 세 번째 비유에 또 하나의 이야기를 추가하신다. 그것은 잃어버린 다른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맏아들이 밭에서 일을 한 후,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자기 집에서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나와는 아무런 의논도 없이 무슨 잔치야? 그는 집 근처에서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러자 그 종은 아주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의 동생이 건강하게 돌아왔는데, 당시 아버지가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다.” 순간 맏아들은 화가 치밀었다.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고,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15:29-30).

맏아들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이라고 말한다. 이 주장을 구태여 과장이라고 볼 이유는 없다. 아마 실제로 맏아들은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참 효자야! 인정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맡은 일을 빈틈 없이 해내는 사람이었다. 책임감도 있고 도덕적이고, 그야말로 집 나간 동생과는 전혀 다른 모범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맏아들은 기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살고 있어! 자신이 처한 여건에 대한 감사보다는, 자신의 희생에 대한 억울함과 섭섭함이 그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맏아들은 열심히 일을 하였지만, 행복함을 누리지는 못했다. 아버지와 오래 함께 하였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이런 괴리가 있는 것일까?

 

2. 한 청년에게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현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슬퍼서 울고 있을 때도 정말 내가 슬픈 것인지, 아니면 그런 상황에서는 마땅히 슬픔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슬퍼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감정과 행동의 동기에 대해 부자연스러움과 이질감을 겪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방탄소년단은 “FAKE LOVE”라는 곡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널 위해서라면 난 슬퍼도 기쁜 척 할 수가 있었어/ 널 위해서라면 난 아파도 강한 척 할 수가 있었어/ 사랑이 사랑만으로 완벽하길 내 모든 약점들은 다 숨겨지길/ 이뤄지지 않는 꿈속에서 피울 수 없는 꽃을 키웠어.방탄소년단은 노래한다. “~하며 살아왔다고.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기쁜 척, 강한 척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면서 사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영국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도널드 위니캇’(Donald Winnicott)참자’(True Self)거짓자기’(False Self)에 대한 흥미로운 이론을 발전시켰다. 위니캇은 겉으로 드러난 정신병리를 넘어, 주관적인 삶의 질 - 내적 현실감각, 의미 있는 삶, 창조적인 자기 경험 등 에 관심을 가졌다. 그에게 있어서 치료하기 가장 어려운 환자는 그럴 듯하게 말하고 행동하지만 스스로를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지 않는 사람인데, 위니캇은 이런 병리를 거짓자기 장애’(false self disorder)라고 불렀다.

위니캇에게 있어서 참자기는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성격의 잠재력으로서, 생의 최초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유아의 자발적인 몸짓과 욕구, 그리고 이미지이다. 참자기는 처음에는 잠재적으로 존재하다가 점차 실제적인 요소로 발달된다. 그런데 참자기가 심리적 실체로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적절한 환경과 충분히 좋은 모성 돌봄이 필요하다. 엄마의 충분히 좋은 돌봄을 통해서 유아의 주관적 전능감이 충족될 때, 유아의 약한 자아에게 힘과 생명력이 부여된다. 그러면서 참자기가 발현된다. 이때 유아는 자신에 대해 가치를 느낀다.

이와는 달리 충분히 좋지 않은 엄마는 유아의 전능성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유아의 몸짓에 적절히 부응해주지 못한다. 이때 유아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엄마의 욕구에 순응하게 된다. 이런 순응은 거짓자기의 초기 단계인데, 이런 아이는 성장하면서 상황을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맞추어간다. 즉 거짓자기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순응하고 적응하고 동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눈치는 발달하지만, 자기 요구, 자기 표현은 없다. 이런 거짓자기의 삶을 살게 되면, 자신에 대해 지루하고, 낯선 느낌을 갖는다.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된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거짓자기는 있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기에, 타인에게 어느 정도 적응하며 타협하는 거짓자기가 필요하다. 참자기와 거짓자기는 이분법적이지 않고 스펙트럼적이다. 그래서 건강한 거짓자기는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지 않고 공손하고 예의바른 사회적 태도로 나타나며, 사회적 적응을 돕는다. 문제는 참자기가 핵심에 자리 잡지 못하고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거짓자기가 핵심과 껍데기 모두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방탄소년단이 반복해서 외치는 ‘fake love, fake love’는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척하는 의미의 가짜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내 감정은 묵살하고, 오직 상대의 감정, 느낌만을 중시하는 사랑을 뜻한다. “널 위해 예쁜 거짓을 빚어내/ ···/ 날 지워 너의 인형이 되려 해.그런데 그 사랑의 결과는 어떤가? “내가 왔던 route 잊어버렸어/ 나도 내가 누구였는지도 잘 모르게 됐어/ 거울에다 지껄여봐, 너는 대체 누구니?거짓자기가 강화될수록 참자기의 느낌과 감정은 사라지게 된다. 나도 나를 모른다. 내 느낌과 감정이 낯설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그렇게 연인을 위해 공을 들였지만, 연인은 그런 나를 낯설어한다. “낯설다 하네 네가 좋아하던 나로 변한 내가/ 아니라 하네 예전에 네가 잘 알고 있던 내가.왜 연인은 최선을 다한 나의 모습을 싫다고 할까? 그것은 진정 나의 감정과 상대의 감정이 만난 사랑이 아니라, 어릴 적에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포장해온 모습으로 상대를 대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공허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노래 속의 화자는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먼저 나 자신을 점검해보아야 한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지금 나의 모습이 어릴 때에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던 모습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오랫동안의 타성을 벗고 나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전문 상담가와의 진솔한 나눔의 시간이 도움이 된다. 또한 내 신체의 감각에 집중하는 명상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거짓자기의 특성 중 하나가 자신의 신체적 감각을 무시하고 지적인 부분에만 집착하는 것이기에, 자신의 신체적 감각을 수시로 느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밖에 혼자 여행을 하거나 취미 생활을 통해서 오롯이 나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 그런데 나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참자기를 깨닫고 새로운 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특히 우리의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그 이상의 지혜가 필요하다.

3. 누가복음 15:29절에서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이 없습니다라면서, 아버지께 섭섭함과 분노를 표출하는 맏아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분명 맏아들에게 겉으로 보이는 결점은 없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요, 칭찬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 맏아들이 아버지가 베푸는 그 잔치에 함께 하지 않는 안타까운 경우를 보게 된다. 정말 그가 효자라면 아버지의 기쁨이 그의 기쁨이 되고, 그래서 아버지가 베푸는 잔치에 자신도 기쁜 마음으로 동참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다. 바로 이것, 아버지의 마음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교회는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고, 구원이 선포되고.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죄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이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교회 안에 슬며시 꽈리를 트는 죄가 있다. 바로 자기 의라는 죄다. 이 죄는 맏아들처럼,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에 빠져 결국 아버지를 탓하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죄이다. 자기 의라는 죄는 교묘해서 거울에 잘 비춰지지가 않는다. 도둑질이나 거짓말은 그 모습이 드러난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고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유진 피터슨이라는 학자는 이 죄에 경건병이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죄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집으로 들어오지 않으려는 맏아들을 찾아나섰다. 그래서 결과는? 맏아들이 축하 잔치에 참여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이제 그 결말은 우리에게 넘겨졌다. “제가 그 맏아들입니다. 저는 저 잘난 맛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나보다 못한 자들을 보면서 은근히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이처럼 자기 의에 빠진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조금도 나무랄데 없어 보이는 맏아들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잃어버린 아들일 뿐이다.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이다. 은혜와 사랑으로 녹아질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삶을 주님의 제단 위에 올려 놓아야 한다. 한마디의 변명도 없이, 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안아주심(Holding), 주님의 은혜 안에서 참된 쉼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죄가 사라지고 참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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