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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다윗
이순태 목사 2012-10-09 추천 0 댓글 0 조회 1585


다윗

말씀/ 삼상 16- 왕상 2:12

 

I. 다윗, 멀리서 보기

 

신명기 11:11절에 의하면 팔레스틴은 산과 골짜기의 땅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지역을 탐방해보면, 김제에서 볼 수 있는 널따란 평야지대가 거의 보이질 않는다. 곳곳에 산과 골짜기가 가득하다. 예루살렘만 보더라도 그 성읍이 해발 780m 정도이고, 동쪽으로 키드론 골짜기, 남쪽으로는 힌놈 골짜기로 둘러 쌓여 있다. 아마 좀 높은 상공에서 팔레스틴 사진을 찍으면 땅에 주름이 많이 잡혀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데 성지 순례를 하다 보면 이스라엘 국기에도 그려진 다윗의 별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산과 골짜기가 많아 주름이 많은 팔레스틴 지형과, 빛과 그림자가 빈번히 교차된 다윗의 일생이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러분, 다윗! 하면 떠오르는 것은? 거인 골리앗을 이긴 사람, 밧세바와 간음한 사람,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왕, 노래와 악기를 잘 다루는 자 등. 그러면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보셨을까? 13:22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삼상 13;14)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개역한글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윗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평가된 것일까?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그것에 맞게 살았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삼상 16장부터 사무엘하까지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를 읽어본다면, 그런 평가에 꺄우뚱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다윗의 삶을 살펴보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허물들이 너무나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길에는 눈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빛과 그림자가 교차되어 나타난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그리는 이미지가 있다. 경건하고, 말씀에 절대 순종하고, 죄 안짓고, 어디다 내놓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우리의 본이 되는 사람... 등등을 우리는 기대한다. 그러나 정작 다윗이 걸어간 길이 우리의 행태와 너무나 닮았다는 점에서 우리의 기대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면 먼저 우리는 다윗이 걸어간 길에 나타난 빛과 그림자를 살펴 보고, 그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발견하고자 한다.

 

 

II. 빛과 그림자

 

1. 빛의 에피소드들

먼저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의 길을 환히 비추는 사건들, 그의 고결함이 돋보이는 에피소드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요나단과 나누었던 친밀한 우정(삼상 18-20),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왕을 살려준 사건, 브솔시내에서 전쟁에 참가하지 못했던 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푼 사건(삼상 30),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애도, 언약궤 앞에서 춤과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는 모습, 예언자 나단 앞에서 회개한 사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 대한 다윗의 배려(삼하 9), 자기를 저주한 시므이 앞에서의 겸손(삼하 16), 자신이 어려울 때 환대한 노인 바르실래에게 베푼 친절(삼하 19), 다윗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적진을 뚫고 물을 길어온 용사들에 대한 다윗의 감사(삼하 23) 등의 사건들은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 준다.

 

1) 다윗의 자아상

 

사무엘 선지자의 마음은 마치 흐린 하늘에 겨울비가 내리는 12월의 날씨와 같이 어둡고 스산했다. ? 사울 왕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사울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제 이스라엘 왕국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이제 그 백성이 크게 힘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사무엘 선지자를 더욱 슬프게 하였다. 이런 사무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나무라시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신다.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가지고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집으로 가라.”

 

사무엘은 예배를 인도하고 하나님 앞에서 흥겨운 축제를 벌이기 위해 베들레헴에 왔다고 밝히면서,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 지금 사울 왕을 대신하여 왕이 될 사람이 그들 중에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무엘이 아는 바는 거기까지, 그 역시 이 특종 소식의 전모를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삼상 16:3절에서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라고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제사를 드리려 온 이새의 아들들을 예의 주시하였다. 먼저 그의 눈에 띈 자가 장남인 엘리압이었다. 엘리압은 사람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우람한 체격하며, 늘씬한 키, 그리고 장남으로서 자기 형제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었다. 엘리압을 본 순간, 사무엘의 손이 기름을 담아온 뿔을 향하였다. 그러자 즉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7절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못생기고 혐오스러운 외모야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데 필요 조건인양 이해해서는 안된다. 12절을 보면, 다윗 역시 건강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자였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어떻든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은 아니라는 것, 중요한 것은 그 중심이라는 것이다!

 

엘리압에 대해 하나님께서 사인을 주시지 않자, 다음으로 아비나답을 보았는데, 그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사인을 주시지 않으셨다. 그 다음 삼마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이새의 일곱 아들들이 다 지나갔는데도 여전히 하나님은 사인을 주시지 않으셨다. 사무엘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혹시 하나님의 메시지 중 아주 중요한 부분을 놓쳐 버린 것은 아닐까? 이제 예언자로서 영력이 다한 것은 아닐까? 혹시 내가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까? ‘당신 분명 이새 맞소?’ ! 그렇다면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뿐이다.

 

당신 아들들이 다 여기 있소?”

 

그러자 이새는 고백했다.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킵니다.”

 

그의 이름은 다윗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의 이름을 밝히기 보다는 그저 말째라고 불렀다. 여기서 말째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카톤의 번역이다. ‘카톤작은 자라는 뜻인데, 하찮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깔린 말이다. 즉 중요한 자리에서는 나서지 말고 빠져야 할 인물이다. 선지자 사무엘이 아들들을 보자고 했을때도 이새는 구태여 다윗까지 불러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막내는 양과 함께 있으면 되는 아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막내를 선택하셨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큰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후에 다윗-골리앗의 대결은 큰 자아상이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골리앗에게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여행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목적이 있을 때에만 가능. 설정한 목표가 올바른 방향에 있다면 가는 길도 올바르다. 누구나 그 마음에 나침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위를 향한 나침반이 있는가 하면, ‘밑을 향한 나침반도 있다. 위를 향한 나침반별로 하는 일이 없어 보이는데도 하는 일이 잘 돼; 밑을 향한 나침반아무리 열심을 기울여도 하는 일마다 어긋난다.

 

e.g.> 나는 비행기 조종사는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잔뜩 긴장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천을 출발해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이륙후 기계를 고정시켜 놓는다. 그러면 그곳을 향해 간다. 그런데 누가 이 나침반을 휙 돌려 놓으면 모스크바로 가게 된다. 어떤 나침반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인생을 결정한다. 어떤 나침반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자아상이 어떤 것이냐 라는 것과 같다.

 

여러분 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간장종지 만한 자아상: 아무리 많은 물을 준비해도 간장종지는 그만큼만의 물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조그만 자아상을 가진 자의 심리적 특징이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할 지 몰라! 다른 사람이 나를 미워할지도 몰라! 다른 사람이 나를 헐뜯을지도 몰라!’ 이렇게 타인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래서 타인 앞에 서면 얼굴이 굳어져. 그러다보니 차갑다, 교만하다, 건방지다는 등의 오해를 사게 된다. 내 속마음 안 그런데··· 자꾸 눈치가 보이고 자신이 없다. 이런 자아상은 또한 매우 독선적으로 흐르게 된다. 이런 자아상이 예수님을 만나면 다른 모습으로 달라진다. 확신이 생긴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 때문에 타인에 대해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안될 일도 되어진다.

 

사례> 미국에서 한 재미교포가 큰 호랑이를 잡은 사실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니 실제 공헌자는 사냥개였다. 교포가 사냥을 즐겨 겨울에 사냥을 갔는데 개 두 마리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런데 어디서 주인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눈자동차를 타고 쫓아가보니 사냥개 두 마리가 나무 위를 보고 짖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 밑으로 가보니 바로 위에 사람 키보다 더 큰 호랑이가 밑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찌나 놀랬는지 재빨리 총을 꺼내 쏘았는데 그게 떨어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사냥개가 호랑이를 쫓아갔느냐는 것이야. 동물심리학에 의하면 사자 외에 어떤 동물도 호랑이를 보면 으르렁거리다 얼른 도망을 간다. 그런데 이 사냥개에게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 학자들이 조사해 보았다. 이 사냥개는 5년 동안 주인과 같이 지내었다. 주인 앞에서는 어떤 짐승도 넘어진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집더미만한 곰도 자기 주인만 있으면 그냥 쓰러진다. 이것을 본 사냥개는 믿는 것이 있다.

 

자기 주인!”

 

그 같은 신념이 호랑이를 추적하게 한 것이다. 주인을 믿고 살았기에 그 사냥개는 호랑이를 쫓아갈 수 있엇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자신만 바라보면, 부족한 것도 많다. 우리 집을 생각하니, 다른 친구들은 집안도 좋은데 왜 우리 집은 이럴까, 한숨이 나온다. 누구는 공부도 잘하는데, 왜 나는 열심히 해도 안될까? 앞길이 캄캄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자신감이 없어진다. 나 같은 것이 뭘 할 수 있겠어? 바로 그럴 때 여러분이 예수 만나면,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삼고 의지하면 여러분은 달라진다. 자신감이 생기고 새 사람이 된다. 큰 자아상으로 바뀌어진다.

 

2) 엔게디 동굴 사건

 

그중 다윗을 돋보이게 하는 사건 하나를 들라면, 엔게디 동굴에서의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엔게디는 사해 곁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이다. 소금물로 된 거대한 호수인 사해 서쪽으로 300m 정도 가면, 가파른 절벽이 600m 높이로 솟아 있고, 그 위에 고원이 있다. 그 고원과 절벽이 침식 작용으로 패여 협곡과 동굴을 만들어 냈는데, 그곳이 바로 거대하게 펼쳐진 불모지, 엔게디 광야이다.

사울왕으로부터 도망다니던 다윗과 몇몇 사람들은 그곳 한 동굴에 숨어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동굴 입구에 드리워졌다. 사울왕이었다. 사울왕은 사막에 내리쬐는 햇빛에서 방금 들어온터라 아직 어두움에 적응하지 못하여 동굴 안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사울은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기 다윗 일행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순간 다윗의 부하들이 사울을 덮치려 하는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말라고 신호를 보낸다. 대신 다윗은 동굴벽을 따라서 왕의 옷이 던져진 곳으로 가서 사울의 겉옷을 조금 잘라 가지고 왔다. 얼마후 사울이 동굴을 나갔고 제법 거리가 떨어졌다 싶을 때, 다윗은 입구로 나가 사울왕을 불렀다.

 

내 주 왕이여”(삼상 24:8)

 

사울이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다윗은 왕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땅에 엎드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제가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왜 들으십니까? 지금 제 손에 들린 이것이 보이십니까? 왕의 옷자락입니다.

조금 전에 저는 당신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저는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황량한 광야 저쪽에 서 있는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다윗은 그의 동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 그것은 비록 사울이 흠이 많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라는 것이었다.

 

다윗은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죽임으로써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인물이다. 그 이후로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 다윗의 주요 일거리였다. 한번은 사울왕의 딸 미갈을 아내로 맞기 위해 블레셋 사람 2백명을 죽여 사울에게 바친 적도 있었다(삼상 18:27). 다윗은 블레셋족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민족들을 무찔러 그의 명성은 사울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처럼 사람 죽이는 일에 전문가인 다윗이 죽이지 않은 사람이 있다. 바로 사울왕이다. 물론 다윗에게는 사울왕을 죽일만한 이유와 명분이 충분히 있었다.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광적인 질투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괴로워하는 왕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있던 다윗을 두 번이나 창을 던져 죽이려 했다. 또 불과 1천명의 군사를 주면서 블레셋과 싸우라고 명령을 하였다. 다윗이 전사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보란 듯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삼상 18:12-16). 그러자 사울왕은 그 아들 요나단과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번은 사울왕이 다윗의 집으로 암살자를 보내어 다윗이 위기에 처하자, 다윗의 아내인 미갈이 창문으로 그를 피신시킨 일도 있었다(삼상 19:11-17). 또 사울의 아들이자 다윗의 친구인 요나단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적도 있었다(삼상 20).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마다 하지 않았다. 블레셋으로부터 자신의 왕국을 구해내고, 자신의 사위가 된 젊은이를 죽이기 위해 안달이 났다. 사울왕은 광야의 오아시스, 협곡을 뒤지면서 다윗의 생명을 빼앗고자 했다. 그런 사울왕이지만,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엔게디 동굴에서 사건은 다윗의 고결한 인품을 잘 보여 준다.


 

2. 그림자의 에피소드들

 

1) 가정의 파도

 

밧세바와의 간음·살인 / 그러나 개인적인 덕이나 가족관계에서 다윗은 그리 존경스러운 인물은 아니었다. 우선 밧세바와 저지른 악명 높은 불륜 사건, 그리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인 일이 가장 눈에 띈다. 자신의 죄를 위해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켰다.

 

왕세자 암논의 강간 / 그에게는 8명의 아내, 21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그중 두 아들 암논과 압살롬은 어떤가? 맏아들 암논은 이복누이인 다말을 강간하였고, 이 소식을 들었으면서도 다윗은 암논에 대해 이렇다할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다윗이 행한 성에 대한 왜곡이 그대로 아들에게서 나타났고, 이에 대해 다윗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에 대해 불만을 품던 다말의 오라버니 압살롬은 후에 암논을 죽인다

다윗이나 암논이 가진 성에 대한 왜곡은 무엇인가? 성은 두 유형으로 나타난다. 인격관계를 토대로 한 성이 있는가 하면, 양자의 관계는 제쳐 놓고 오직 욕망이 목적이 되는 성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성을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으로서, 극히 병리적인 현상이다.

 

압살롬의 반란(아버지와의 대결) / 후에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한때 다윗은 예루살렘성을 뒤로 하고 도망을 친 적이 있다(참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런 이야기들은 다윗이 자식에게 철저하게 무관심했고, 아버지로서 크게 실패한 사람이었다는 인상을 준다. 후에 다윗은 자신에게 반역을 했던 압살롬이 살해되자, 압살롬! 압살롬! 하면 가슴을 쥐어 짜는 듯한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이런 슬픔에 필적할 만한 사건이 또한번 등장하는데, 삼하 3:12절 이하에서 발디엘이 자기 아내를 빼앗기고 슬픔에 잠긴 장면이다.

 

 

2) 발디엘 사건

 

사울왕이 죽은 후, 사울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이 다윗의 편으로 넘어 오겠다고 제안을 한다. 그때 다윗은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것은 다윗의 전 아내, 즉 사울의 딸이었던 미갈이 자기에게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미갈은 이미 다윗의 아내가 아니었다. 다윗이 사울왕이 보낸 암살자들을 피해 도망간 후, 사울은 미갈을 발디엘이라는 사람과 재혼을 시킨다. 그런데 이제 다윗은 그 미갈을 되찾고자 한다.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은 미갈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정치적인 동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미갈의 뜻이나 발디엘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다윗이 사울의 딸이었던 자신의 전 아내를 되찾으려 한 이유는 사울의 합법적인 계승자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갈은 강제로 자기 남편과 생이별을 하고 다윗에게로 가야 했다. 그러자 남편인 발디엘은 미갈의 뒤를 울면서 예루살렘 바로 직전에 있는 바후림까지 따라왔다. 아브넬 장군이 억지로 가라 명령하자 그제서야 돌려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야 했다. 발디엘과 미갈은 오직 다윗의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헤어져야 했다. 이 사건에 대해 다윗이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안중에는 미갈도, 발디엘도 없었다. 오직 정치적인 목적만이 보였다. 그의 정치적인 욕심이 그의 영혼을 장악해버린 것이다.

 

엔게디 동굴에서 다윗은 자신의 최고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발디엘의 사건에서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권력 앞에서 자신의 인간성을 희생한 사람이었다.


 

3. 완벽주의에 대한 소고

 

다윗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다윗의 존경스러운 부분과 더불어 혐오스러운 부분이 나란히 나열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어떤 면에서 다윗은 우리가 모방해야 할 모본도, 무비판적으로 흠모할 만한 대상도 아니다. 그런데 다윗의 길을 따라가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보인다. 죄와 나약함으로 얼룩진 우리들의 모습이 다윗을 통해 보여진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결코 완벽한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었다. 성경에서 다윗을 기록한 내용을 보면, 다윗, 개인을 위하여 도덕적으로나 영적인 의미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채색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다윗이 흠 많고 믿음에 자주 실패한 사람일 망정, 그는 우리의 전형이 된다는 가정이 다윗 이야기의 저변에 깔려 있다. 우리는 다윗에게서 어떤 모습을 배워야 할까?

 

종종 기독교 공동체에서 오해를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좋은 신앙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인은 신앙에 있어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을 완벽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완벽주의는 예수님의 길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것이며, 기독교 공동체에서 자주 나타나는 정신장애이다. ? 완벽주의 이면에는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이 완벽하고 탁월한 존재가 되어야 하나님과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하면 무시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살다 보면, 무엇을 해도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다. ? 완벽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다보면 나중에는 실패가 두려워 어떤 일도 선뜻 하지 못한다. 완벽주의자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완벽한 사람으로 보일 수 없을 것 같으면 피해 버린다. 그래서 완벽주의자들의 주변에는 친구가 거의 없다. 자신도 친구가 그립고 친하게 지내고 싶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일정 거리 이상으로 접근하면 자신의 불완전함이 들어날까봐 거리를 둔다. 또한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자들 앞에서 보통 사람들은 부담을 느낀다. 영 불편하다. 그러다보니 천국으로 향하는 순례의 길을 같이 가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게 된다. 완벽주의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개입조차 막아버린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다 불완전하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생각지 못한 실패도 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이웃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고, 이웃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웃이 고맙고 세상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우리의 부족함을 받아주시는 하나님이 고마운 것이다.

 

 

III.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은 시 143:2절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이 세상에는 잘못된 것이 참으로 많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잘못된 것이 참으로 많다. 이 세상의 죄의 목록은 그 부피가 엄청나고 매 시간마다 추가된다. 도서관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는 자료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가볍게 여기고, 적당히 회칠하려는 것도 문제이지만, 죄에 대해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것도 문제가 있다. 세상의 잘못, 죄악, 증오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문화의 퇴폐성에 분노하고, 자기 영혼에 무슨 흠이라도 있나 끝도 없이 검토한다. 그러다보니 그 영혼에 결코 평안함이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기에 샬롬이 그 속에 없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다윗이 걸어간 길은 결코 완전한 길이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죄 속에 묻혀 탄식하고, 절망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겼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내 죄를 나열하는 보고서가 아니다. 대신에 시 143:6절의 말씀처럼, ‘주을 향하여 손을 펴는 것이다. 그분의 은혜 속에 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왜 그런가? 죄를 결정적으로 해결하실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다룰 때는 혼자 해서는 안된다. 그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을 대면해야 한다. 죄의 복잡성과 미묘함, 그 광범위함을 다루려면, 먼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인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완벽하거나 그에 근접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에 매달렸다. 바로 그 모습을 주님은 높이 평가하신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하였다.

 

성도는 선한 사람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는 사람이다.”

 

4:15의 말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고 동정하신다. 또 히 5:2의 말씀,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예수님은 똑똑하고 완벽한 자만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하신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신다. 자신의 죄속에 머물러 절망하지 말아라! 자신의 의로움에 빠지지도 말라! 오직 주님의 은혜의 강물 속에 여러분의 삶을 던지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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