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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엘리야
이순태 목사 2012-11-13 추천 0 댓글 0 조회 1742


엘 리 야

 

말씀 / 왕상 17-19, 왕하 1-2:11

   

 

I. 산에 오르기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후,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일에 대해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엿새 후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한 산으로 올라가셨다. 세 명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예수님은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그 얼굴이 온통 해와 같이 빛났고, 옷은 빛으로 번쩍거렸다. 그런데 예수님 옆에 다른 두 명이 더 있었는데, 곧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빛으로 가득한 구름이 내려오면서 하나님 음성이 들려 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우리는 이 장면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특별히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에게 하나님과의 언약과 말씀의 기본적인 틀을 제시한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그 하나님 신앙이 희미해지고, 말씀이 왜곡되었을 때, 그것을 바로 잡고 회복시킨 사람이었다. 모세가 전한 말은 성경의 첫 다섯 권에 걸쳐서 엄청난 분량으로 기록되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엘리야에 관한 기록에 대해서는 불과 아홉 개의 에피소드가 여섯 개의 장에서만 다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언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엘리야가 미치는 영향은 그에 관해 기록된 분량을 훨씬 넘어선다. 물론 구약시대에는 다른 예언자들도 많았다. 어떤 예언자들은 이름이 알려져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또 어떤 예언자들은 자신의 설교 내용을 글로 남기기도 하였지만, 글을 남기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모든 예언자들 중에서 엘리야가 단연 돋보인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엘리야가 예언자로 활동하던 시대는 북이스라엘 아합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아합의 아버지는 오므리인데, 수십 년 간의 정치적 불안정을 바로 잡은 인물이다. 또 그는 사마리아를 신설해서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다. 오므리가 통치하면서 모든 것이 좋아졌다. 그러나 단 한 가지는 예외였다. 정치, 경제가 나아질수록 영적으로는 더욱 타락한 것이다. 그 핵심에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있었다. 이세벨은 바알숭배의 중심지인 시돈의 공주였는데, 아합에게 시집오면서 바알종교를 북이스라엘에 널리 퍼뜨린 사람이었다. 그는 450명의 바알선지자와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들을 모아 자신을 섬기도록 하였다. 아합왕은 농사의 필수적인 비를 관장한다는 바알을 위해 신전을 지었고, 풍요와 다산의 여신인 아세라상을 곳곳에 설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까지 하나님을 믿어온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을지, 아니면 바알을 섬길지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엘리야가 등장한 것이다. 우리는 엘리야가 걸어간 길을 따라가면서, 그의 길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붙잡고자 한다. 다양한 문화, 상대적인 가치관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엘리야가 걸어간 그 길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는 것일까?

 

 

 

II. 갈멜산에 오르라

 

첫째로, 엘리야의 길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담대히 선포하는 길이다.

먼저 엘리야는 아합을 찾아가 한 선포를 한다. “수 년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않을 것이오이것은 단순한 일기예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에 수년 동안 가뭄을 들게 하신다는 말씀은 당시 비의 신으로 알려진 바알이 무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물질과 풍요를 준다는 바알과 아세라가 거짓이며,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뭄이 지속 된지 3년이 되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 아합에게 나타난다. 아합왕이 엘리야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며 시비를 걸었다. 너 때문에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괴로움을 당한다는 것. 이에 엘리야는 내가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당신들이 하나님 말씀 버리고, 바알을 섬긴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서 엘리야는 공식적인 제안을 한다. 대결을 하자는 것.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분명히 하자는 것. 그래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오도록 해서, 엘리야와 진검승부를 하자는 것!

아합왕이 이 제의를 받아들여, 드디어 갈멜산에서 대결이 시작되었다. 먼저 바알 제단과 여호와 제단이 준비되었고, 각 제단에는 희생제물로 송아지가 놓여졌다. 여기서의 약속은 불로 제물에 응답하는 자가 진짜 하나님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제 두 종류의 예식이 거행되는데, 우리는 그 예식을 통해서 참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된다.

 

먼저 바알제단에 이세벨이 고용한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바알 제단 앞에서 이상한 춤을 추었다. 그들은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댔다. 점차 감정이 격해지자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들 몸을 상하게 하여 피를 흘리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들은 그야말로 감정의 무아지경에 들어갔다.

바알신앙의 특징은 감각적이라는 것이다. 더 대담하고, 더 화려하고, 더 감각적일수록 좋은 것으로 간주된다. 춤과 고함, 음악 그 속에서 개인의 특성은 없어지고, 집단적인 반응만이 남게 된다. 특히 바알종교에서는 예식 중 성행위를 자주 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식력이 증가되고, 성적 친밀감을 통해서 신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알신전에는 이른바 성전 창녀(커데샤)들이 상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행태를 보면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우상숭배를 행음하는 것이라고 비판을 한다. 예언자들이 말한 행음은 일차적으로는 종교적인 매춘행위를 뜻하지만, 그 속에 담긴 흐름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적용이 된다. 즉 바알종교가 보여주는 예배는 인간의 감각, 감정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이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예배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예배자의 욕구와 감정을 예배의 기준으로 삼는 예배이다. 이속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그래서 바알식의 예배에서 중시되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짜릿함을 주느냐, 나에게 감동을 주는냐이다. 그래서 바알식 예배는 내가 예배를 판단하는 주체가 되어 버린다.

바알 선지자들이 바알 제단에서 보인 퍼포먼스는 충분히 짜릿했다. 대단한 쇼를 450명이 보여 주었다.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행된 제단에서의 외침과 춤은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다. 여호와의 제단 앞으로 엘리야가 나아가 제단을 준비하고, 간결하게 기도를 드렸다. 진정한 예배란 인생 전체를 관통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앞에서 인간의 모든 영역, 정신과 육체, 사고와 감정, 내 일상의 삶 모두가 놓여진다. 물론 올바른 예배에서 감각적인 개입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격 전체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하기에, 감각이 제외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중에 서거나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는 몸동작을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거룩한 춤을 추기도 하고, 찬양으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기도 한다. 적절한 예복과 예식은 예배에 활력을 북돋아 준다. 이처럼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즉 말씀은 뒷전으로 하고, 감각만을 자극하거나 감정 조작에 초점을 두는 것은 바로 바알종교의 예식을 따르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예배는,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행위이다.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예배 체험은 예배 후에 보너스로 주어지는 것이지, 그 체험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 한 체험을 하게 된다. 천국 보좌의 환상이 보였는데, 하나님이 앉으신 보좌 주변에 스랍 천사들이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하며 찬양을 하는 것이었다. 이사야는 예배를 드리다가 그런 환상을 보게 된 것이지, 그 환상을 보려고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다.

엘리야는 여호와 제단 앞에서 짤막하게 기도했다. 그러자 불이 떨어져서 제물로 드린 송아지를 태우고, 주변에 잇는 돌과 흙 모두를 태웠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어떻게? 왕상 18: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 야훼 후 하엘로힘! 야훼 후 하엘로힘! 그리고 3년 반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내렸다.

 

 

 

III. 호렙산에 오르라

 

둘째로 엘리야의 길은 하나님과 고요히 만나는 길이다.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지고, 가뭄을 끝내는 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아합왕은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에 있는 왕궁으로 향했다. 그때 엘리야는 마치 승리의 사신처럼 비를 맞으며 아합의 전차보다 앞서 달렸다. 그런데 그가 왕궁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환호의 색종이 가루가 아니었다. 왕비 이세벨은 독기 어린 경고를 그에게 던졌다. 내일 이맘때에는 엘리야를 죽일 것이다! 이것은 결코 엘리야가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갈멜산에서의 승리감을 계속 연장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였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말에 두려움을 느끼고 국경을 넘어 남유다 남쪽 지역에 위치한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친다. 이에 대해 야고보서 5:17절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는 브엘세바에서 조금 떨어진, 텅빈 사막으로 홀로 걸어갔다. 그곳에 있는 하얀꽃의 향기를 지닌 로뎀나무 아래에 앉으니 절망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불안이 그를 힘들게 했다.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지만, 죽음의 위협에 도망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느 누구보다 특별히 나은 것도 없다는 자괴감도 들었다. 몸은 극도로 피곤하였고, 하나님만 믿고 사는 사람이 자기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외로움이 그를 엄습했다(왕상 19:14). 사람들은 일에 지나치게 매인 나머지, 방향감을 잃기도 하고 수행 능력을 잃기도 한다. 이런 일은 숭고한 목적을 추구하는 유능한 사람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는데,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일 다 이루었지 않느냐?는 생각! 이젠 되었어! 그는 로뎀나무 밑에 앉아 모든 것 내려놓고 조용히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이 죽을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이제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거두지 않으셨다. 대신 천사를 보내어 잠든 엘리야를 깨워 떡과 물을 먹이고는, 영적 회복을 위해 순례 여행을 하게 하셨다. 그것은 약 400km 떨어진 호렙산까지 가는 것이었다. 엘리야는 400년전 모세가 걸었던 그 길을 따라 느릿느릿 광야를 가로질러 갔다. 그렇게 40일 걸려서 엘리야는 모세가 하나님과 만났던 호렙산에 도달하였다. 그가 그 산 한 동굴에 머물렀는데, 강하고 거센 바람이 지나갔다. 혹시나 하나님이? 했는데,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있었지만 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갔지만 그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얼마후 하나님께서는 아주 세미한 음성, 들릴락 말락하는 숨결 같은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다가오셨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렙산에서 우레와 번개, 나팔소리를 만나게 되는데, 이를 두려워하자, 모세가 홀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에 대해 출 20:21절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모세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홀로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400년후 영적으로 피폐해진 엘리야 역시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홀로 만나고 있었다.

얼마전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여호와! 그분은 하나님이시다!’를 외치며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호렙산에서 엘리야는 고요하게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고 있다. 이처럼 엘리야의 길은 갈멜산과 호렙산을 함께 껴안는 길이다. 그는 갈멜산에서 공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호렙산에서 엘리야는 홀로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바로 이 두 모습이 우리 믿는 자들이 걸어야 할 길이다. 주님도 3년간의 공생애 동안 쉴 틈도 없이 바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조용히 하나님과 홀로 하는 시간을 결코 미루지 않으셨다.

 

* 홀로 있기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비참함의 원인을 홀로 방안에서 견디어내지 못하는데 있다고 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이상 혼자임을 견디어내지 목하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뛰어다닌다. 그러나 홀로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는 한, 더 이상 성숙할 수도 없고, 더 이상 성장할 수도 없다. 성숙을 위해서는 자기와의 만남, 즉 참된 하나님과의 만남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의 만남 앞에 두려움을 지닌다. 그래서 그럴 듯한 지식이나 사상, 주장 속으로 도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삶이 아름다우려면 홀로 머물 수 있어야 한다.

 

 

 

IV. 두 산을 함께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편의에 맞도록 하나님을 변경하거나 수정하려 한다. 하나님을 내 취향에 맞도록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우리의 감정을 넘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하나님은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우리 입장에 하나님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맞추도록 촉구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그대로 그분을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갈멜산에서 있었던 위대한 순간에 엘리야는 백성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이제 마음을 정해라! 정말 하나님이 참신이라 생각되면 그분께 삶을 던지고, 바알이 신이라 생각되면 그에게 가라는 것! 많은 사람들은 둘 사이에서 주저하거나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 하나님을 믿으면서, 또한 풍요와 재물을 준다는 바알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를 다 잡아 안전을 확보하려고 한다. 그러나 엘리야가 걸어간 길은 세상적인 방법에 역행하는 길이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가는 자들이 적은 좁은 길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일까? 엘리야에게서 나타난 두 산의 길 곧 갈멜산의 길과 호렙산의 길을 걸어야 한다. 사람들 앞에 담대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동시에, 고요히 주님과 홀로 만나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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