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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
이순태 2022-10-02 추천 0 댓글 0 조회 271

말씀 / 요한복음 3:22-30

제목 / 세례 요한

(2012516)

 

I. 수많은 사람들이 흥분한 상태로 요단강가에 몰려 들었다. 느닷없이 광야에 나타난 특이한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 사람은 기적을 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늘이 400년동안 침묵해 오다가, 이제 유대의 선지자 가운데 마지막 선지자로 세례 요한을 내보내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면서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그의 사역은 막 1: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되었다.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율법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은 산헤드린 공의회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 요한에게 파송했다.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인지 아니면 백성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인지 알아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물었다. “네가 누구냐?”(1:19). 그러자 세례 요한은 당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의혹을 미리 알고 답변을 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너는 네 자신을 무엇이라 하느냐?” ‘나는 그리스도의 길을 그 앞에서 준비하라고 보냄을 받은 자이다’(11:10). 세례 요한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역의 목표, 사명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II. 세례 요한의 사명

요한 3:28절에서도 세례 요한은 분명히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이 짧게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이지, 자신을 따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35절 이하를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른다.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은 안드레, 다른 사람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교회 전통에 의하면 요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사례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중 적지 않은 자들이 후에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의 제자는 점점 많아지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점점 줄어 들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에 대해 세례 요한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 자신의 사역 목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세례 요한이 감당해야 할 사역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첫째로, 목소리였다/ 예수님은 말씀이셨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셨다. 사람의 말이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신다. 그래서 요 14:9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을 드러내신 분이다.

이와는 달리 세례요한은 목소리였다. 1:23,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이것이 세례 요한의 자의식이었다. 성령이 내려 꽂히면, 그곳에서 목소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고,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임을 세례 요한은 알고 있었다.

둘째로 세례요한은 들러리였다/ 예수님은 신랑이시고, 세례 요한은 신랑 들러리였다.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 유대인의 풍습에 의하면, 신랑의 친구들이 결혼식의 세부적인 일들을 다 맡아 했다. 신랑은 신부의 집으로 가서 그들이 살 새 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가야 한다. 그래서 신랑이 신부의 집을 향하면, 신랑의 들러리들은 미리 가서 기다렸다가 신랑의 음성을 듣고 결혼식이 열리게 될 것을 기뻐했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신랑에게로 향한다. 신랑의 들러리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은 결혼식을 위해 손님들을 모았고, 이제 신랑 예수가 오셨으니, 자신의 제자들조차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기를 바랐다. 세례 요한은 신랑을 높이는 들러리였다.

셋째로 세례요한은 등불이었다/ 요한 1:9절에서는 예수님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기록한다. 이에 반해 세례 요한은 요 1:8절에 의하면,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였다. 예수님께서도 요 5:35절에서 세례 요한을 가리켜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 등불은 스스로 빛을 낼 수가 없다. 외부로부터 기름을 받아서 그것이 있을 동안만 빛을 낸다. 세례 요한은 그러한 등불이었다. 또한 그는 요단 계곡이라는 제한된 지역만을 비추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8: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향해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5;14)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떻든 세례 요한을 향한 세 가지 이미지, 목소리, 신랑 들러리, 등불은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세례 요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높이 올리는 것, 이것이 세례 요한이 맡은 사명이었다.

 

III. 사역을 감당하는 태도

이 사역을 세례 요한은 어떤 자세로 임했는가?

첫 번째 겸손함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그의 스승에게 가서 요 3:26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이에 대해 세례 요한은 어떻게 말했는가?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그는 자기가 감당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겸손과 정직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부추겨도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영적 지도자들을 하나님처럼 대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사도행전 10:24절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나자 그에게 땅에 엎드려 큰 절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나도 사람이다라며 적극 만류한 내용이 나온다. 그와 비슷한 일이 바울과 바나바에게도 있었다. 사도행전 14:8절 이하를 보면,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일으켜 세운 사건이 있었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향하여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왔다며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은 어쨌든 자신들의 능력을 뛰어 넘는 탁월한 존재가 자기들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그러다가 자칫 사람을 우상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일어난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두 번째 세례 요한은 담대함으로 사역에 임했다/ 세례 요한은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외모부터가 접근하기가 용이한 것은 아니었다. 3:4절을 보면, 낙타털 옷, 허리에 가죽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 그가 사는 곳은 유대 광야. 그의 말 역시 거칠다. 4:7절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오자, 댑따 그들에게 던지는 말, “독사의 자식들아!” 엄청난 욕이다. 또 마태 3:10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 세례 요한은 나무를 뿌리채 찍어내기 위해 도끼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쓸모 없는 쭉정이를 태우는 불 심판을 선포하였다.

이런 행태는 항시 적을 만들기 마련이다.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멸망 예언을 함으로써 욕을 당하고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세례 요한도 그랬다. 헤롯 안티파스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다들 침묵하는데 세례 요한은 그것은 안된다고 말했다. 그로 인해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래도 세례 요한은 그의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세 번째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에 충성하였다/ 세례 요한은 기적을 행하는 자는 아니었다. 10:41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았다. 참 이상하다. 세례 요한은 노년의 부모에게서 기적적으로 태어났다. 또한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게다가 눅 1:17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자이다. 엘리야 선지자는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더욱이 세례 요한이 사역의 대상으로 삼고 잇는 자들은 유대인이고, 그들은 표적을 즐겨 구하는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대인들을 이끌려면, 표적을 몇 가지만 보여줘도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기적을 행하는 일꾼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했는가? 10:41-42,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세례 요한 기적을 베풀지 않앗지만, 그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 것으로 인해 죄인들을 구원하는 통로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어떻게 평가? 마태 11:9절에서는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말씀하셨고, 마태 11:11절에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세례 요한에게 구원자를 소개하는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IV. 사역의 보상

그러면 세례 요한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써 어떤 보상이 그에게 주어졌을까?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 기쁨! 세례 요한은 자신이 신랑의 들러리가 된 것만으로도 기쁨으로 충만하였다고 말한다. 사실 세례 요한은 쉬운 삶을 살지 않았다. 그가 십대였을 때, 그의 부모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후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예언자가 되었다. 그런 어려운 삶에도 그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가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기쁨을 잃엇던 때가 한번 있었다. 헤롯의 감옥에 갇혀 잇는 동안 그는 예수님이 정말 그 메시야가 맞는지 의아심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한 것 때문에 그곳에 갇혀 있었다. 그는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낫지만, 예레미야처럼 훨씬 힘들고 위험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심판과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고, 불의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을 가했다. 그런데 감옥에서 제자들을 통해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을 말씀하시고 그렇게 행동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태 11:3절을 보면, 제자들을 시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질문을 한다. 사실 세례 요한은 강력한 심판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상한 목자로서 활동하신 것이다. 그 때문에 세례 요한은 의아심과 더불어 실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암울하고 낙심되던 때는 하나님이 택하신 종들조차 기쁨을 잃고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세, 다윗, 엘리야, 에레미야도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다. 잠시 밑으로 가라앉을 때가 있다. 그러나 곧 주님께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주님을 신뢰하시길!

유대 지도자들은 헤롯에게서 세례 요한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헤롯 안티파스의 어리석은 맹세로 인하여 경건한 선지자는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사악한 왕은 살아남았다.

V.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거짓이 폐위되고, 진리가 영원히 다스릴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예수님의 재림이 우리의 소망이 된다. 그분이 세상의 헤롯을 물리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처음 이땅에 오실 때, 세례 요한은 그분의 길을 준비하였다. 이제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길을 누가 준비해야? 바로 저와 여러분! 어떻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종의 임무는 자신은 드러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목숨을 바쳐 붙잡아야 할 가치이다. 이 놀라운 사명에 충성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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