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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이순태 2022-10-02 추천 0 댓글 0 조회 348

말씀 / 요나 1:1-10

제목 / 요나

(201252)

 

I. 요나의 저항과 퇴행

요나서는 예언서 가운데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예언이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서들을 보면 흔히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즉 예언서의 핵심은 예언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요나서는 예언의 말씀을 모아 둔 것이 아니라, 한 예언자의 삶 가운데 들어 있는 주목할 만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초점은 요나라는 예언자의 기이한 행적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 있다.

이 책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요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악이 가득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데, 주전 8세기말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크게 위협한 나라이다. 그래서 앗수르에 대한 감정이 영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니느웨 사람들을 악한 길에서 돌이키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원수같은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싫은 놈들인데, 그래서 비참하게 망하는 꼴을 보아야 속이 시원한데,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라?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1:3절을 보니 요나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을 쳤다. 다시스는 페니키아인들이 스페인 남서부에 개척했던 항구도시로서 당시에 세상의 끝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는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그런데 3절 중반부를 보니 마침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아마 요나는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면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왕이었다. 자기 생각이 진리였다. 그래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다시스로 항해하는 중, 요나가 탄 배는 큰 폭풍을 만나게 된다. 3절을 보면 그 바람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 그래서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다. 선원들이 두려워 무거운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고, 자기들의 신을 불러 구원을 요청하였다. 요나에게도 네 하나님께 구하라독촉. 그러면서 당시에 흔히 하던 방식으로 제비를 뽑았다. 도대체 누가 큰 죄를 지었길래 이런 재앙이 닥쳐오는가? 그랬더니 누가 뽑혀? 요나! 그러자 사람들이 요나 주위에 몰려들면서, 자초지종을 말할 것을 요구한다.

요나는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바로 자신 때문임을 밝힌다. 요나! ‘비둘기라는 뜻. 그러나 그는 평화의 전령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중 창세기 12:2절을 보면, ‘내가 ··· 네게 복을 주어 ··· 너는 복이 될지라는 말씀이 있다.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 주어야 하는데, 요나는 정반대로 재앙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는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지만, 하나님을 떠난 자, 하나님의 방향과 반대로 향하는 자는 타인에게 재앙이 된다.

폭풍이 더 거세지고 바다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러자 요나는 선원들에게 나를 바다에 던지라말한다. 요나는 하나님을 향한 저항과 절망을 안고 바다 속으로 던져졌다. 요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요나를 삼킬 큰 물고기를 보내어 바다에 떨어진 요나를 삼키게 함으로써 그를 구하셨다. 이제 요나는 검은 바다 속으로, 그리고 그속에 사는 큰 물고기 뱃속에 홀로 남게 되었다.

* 퇴행

정신분석학에서 퇴행(regression)이라는 표현이 있다. 보다 미성숙한 정신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인간 정신발달 과정을 보면, 이전에 해결되지 않은 정신적인 갈등과 불안은 정신 안에 약한 부분으로 남게 된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어떤 심리적인 상처를 경험할 경우, 혹은 안심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때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어린 동생과 경쟁하는 아동이 다시 손가락을 빤다든가, 옷에 오줌을 싸는 경우가 한 예이다. 상담이나 심리치료에서 퇴행은 필수적이다. 내담자는 자신의 미해결된 갈등을 재작업하기 위해 이전의 미성숙한 단계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 상담가는 부모처럼 그를 안아주어야 한다.

그런데 해리 건트립이라는 정신분석가는 퇴행의 가장 밑바닥에는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고,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는 태아의 존재로 머물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사랑의 상처를 받은 경우, 사람은 사랑에 두려움을 갖게 된다. 사랑하는 것이 두렵고 사랑받는 것이 두렵다. 다른 사람과 친밀감을 갖지 못하고 피하게 된다. 이것이 심해지면, 모든 관계가 단절된, 대상 없는 상태를 상징하는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환상을 가진다고 한다. 이 퇴행까지 내려가면서, 내담자들은 다시금 자신의 본 모습을 깨닫게 되고, 그러면서 발달이 멈추었던 마음이 다시 발달하게 된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용서를 구했다.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요나는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께 서원하며 구원을 간구.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고자 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려 했다. 그러다가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재발견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물고기로 하여금 육지에 요나를 토하게 하셨다. 이제 그는 어둠의 구덩이에서 다시 살아났다.

 

II. 새로운 임무, 그리고 그 후

하나님께서는 물고기를 통해서 요나의 생명을 살리시고, 다시금 그에게 사명을 주셨다. 요나 3: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신 후,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다. ‘내 양을 먹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다는 것, 그것은 기회를 주시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임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서 섬김의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기회를 저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요나는 두 번째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니느웨로 들어간다. 그가 전한 선포는 무엇? 요나 3:4절 하반부를 보면,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 참 인정미 없이 짧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죄를 지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러한 지적을 받고 백성들이 회개하며 주님께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요나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마 회개를 기대하지도, 더 나아가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짧은 경고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와 믿음을 받아들이셨다. 그리곤 내리려고 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바로 요나의 반응이다. 민족의식이 강한 요나는 이스라엘의 적국이 멸망하고 이스라엘이 복받는 것을 보고 싶어했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가 40일 있으면 니느웨 무너진다!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자 도성 전체가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다.

이에 대해 요나는 어떤 반응? 요나 4: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 요나는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나는 것에 화가 났다. 그놈들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들! 하나님 백성을 힘들게 하는 것들! 다 망해버려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조차 은혜로 받으셔서 구원의 반열에 이르게 하신 것! 요나는 이것이 싫은 것! 요나는 자신이 좋아 하는 것, 하나님도 좋아하시고, 요나가 싫어하는 것, 하나님도 싫어하시길 바랐다. 즉 자신이 기준이 되길 바란 것이다. 그런데 그 뜻대로 되지 않자, 하나님께 어떤 기도?

요나 4:2-3,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 요나는 자기 뜻대 되지 않자, 죽여주쇼!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발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이방인 선교에 망설였던 한 제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베드로. 주님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베드로의 첫 반응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였다. 그렇지만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명령따라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러자 고넬료 온 가족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다. 이런 사실을 접하면서 베드로는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깨닫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이방인 그 모습 그대로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베드로는 새로운 진리를 배우고 영적인 키가 자랐다.

요나도 그럴 수 있었다. !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지! 그러면서 새 신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르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내고 불평을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니느웨 성읍 동쪽에 앉아 니느웨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관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한심한 요나를 하나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가리울 그늘을 주시기 위해 밤새도록 박넝쿨을 자라게 하셨다. 요나가 그 박넝쿨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벌레로 하여금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여 시들게 하셨다. 그러자 뜨거운 태양이 그대로 쪼이고, 게다가 뜨거운 동풍까지 불어오자, 요나는 다시 불평을 하였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낫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요나 4:9,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그러자 요나는 대답한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 요나 자신은 아무 공도 들이지 않았던 박넝쿨이 시들었다고 해서 죽고 싶어하고, 또 그것 때문에 죽기까지 성낼 만하다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고집을 피운다. 이런 요나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요나 4:10-11,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III. 열린 마무리

출판사에 요나서와 같은 원고를 넘긴다면 그들은 결말이 없네요라는 메모와 함께 원고를 다시 돌려 보낼 것이다. 요나서는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이 난다. 이 질문을 받고 요나가 어떻게 대답을 하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요나가 자신의 분노와 편협함을 인정하고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르쳤는지, 아니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요나가 악한 니느웨 성에 보내어진 것처럼, 예수님은 죄 가득한 이땅에 오셨다. 그리고 잃은 자들을 찾아다니셨다.

예수님께서 요나와 관련하여 마태 12:4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 예수님은 분명 요나보다 큰 분이셨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려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시려고 세상으로 오셨다. 요나는 한 성을 향해서만 메시지를 선포했지만, 예수님은 온 세상을 향하여 구원을 선포하셨다. 요나는 자신의 죄 때문에 기꺼이 배에서 뛰어내려 죽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죄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 요나는 죽었지만 예수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셨다. 요나의 죽음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믿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셨다. 요나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셨다.

요나서는 요나의 기이한 행적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요나서가 지향하고 잇는 것은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느냐 라는 것이다. 사실 요나는 하나님에 대해 신앙고백을 정확히 하는 사람이었다. 요나 1:9절에서 선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 정확하다! 그러나 요나는 고백과는 달리,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려고 했다. 또 요나 4:2절에서도 하나님을 정확히 묘사한다.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빙고! 그러나 요나는 그 하나님 은혜의 크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앗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어찌되든 무관심했다. 아마도 그는 그들에 의해 오염되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민족보다 넘치게 받는 것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런 시각을 가지고는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도울 수가 없다. 흔히들 사람들은 한 사람의 성공이 다른 사람의 실패을 전제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한, 타인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은 윈윈 게임이라 할 수 있다. 나도 승리, 너도 승리! 하나님은 니느웨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처럼, 끝까지 요나를 포기하지 않고 안아 주셨다.

 

벧후 3:9,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러분이 싫어하고 거리끼는 사람 있는가? 그곳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니느웨이다.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갈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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