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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이순태 2022-10-02 추천 0 댓글 0 조회 375

말씀 / 예레미야 1:1-10

제목 / 예레미야

(2012425)

 

I. 예레미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자기 백성의 멸망을 예언해야 했던 눈물의 예언자, 그리고 내부의 적대자들에 의해 애굽으로 끌려가 비운의 예언자, 예언자들 중 유일하게 개인 일기가 남아 있는 자, 역사의 수난을 누구보다 진하게 몸을 겪었기에 유대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예언자 등의 수식어를 예레미야에게 붙일 수 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그 어떤 예언자보다 용광로와 같은 역사와 관련하여 설명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서라는 책 자체도 예레미야만큼 수난을 당한 책일 뿐 아니라, 칼이 휘둘러지고, 성전이 불에 타는 고통 속에서 선포된 예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우리를 냉혹한 현실, 피비린내 나는 현장으로 이끈다.

예레미야가 예언자로서 활동할 당시, 국내외적인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북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남쪽으로는 애굽,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두 세력의 흥왕에 크게 좌우되었다. 예레미야 당시 북쪽 세력은 한때 앗수르가 기세를 떨치더니, 주전 612년 바벨론이 앗수르를 누르고 중동의 최강자가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예레미야가 큰 기대를 걸었던 개혁적인 왕인 요시야가 주전 609년에 죽었다. 주전 605년 바벨론왕으로 등극한 느부갓네살은 주전 597년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여호야긴 왕과 함께 포로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1차 바벨론 포로). 그후 시드기야왕의 어리석은 정책으로 주전 587년 유다는 멸망. 그러나 바벨론에게 저항하던 세력들은 바벨론이 세운 총독 그다랴를 죽이고, 애굽으로 도망을 쳤다. 바로 이런 혼돈의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면 예레미야의 이력은 어떤가? 1:1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5km 떨어진 아나돗을 고향으로 하고,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십대 후반이 되어 그 역시 제사장으로 살아갈 즈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예언자로 부르셨다. 1:2-3,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3]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 요시야 왕 13, 즉 주전 627년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아, 유다가 멸망의 길로 치닫을 때까지 그의 예언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주전 587년 바벨론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저항 세력들이 바벨론을 피해 애굽으로 갈 때 예레미야를 붙잡아 가면서 그의 예언활동은 마감된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약 40년간을 예언자로 활동을 한 셈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시지 않앗다면, 그냥 제사장으로서 살았을 것이다. 제사장의 직무는 상당히 일상적이고, 예언자의 임무보다 좀 쉬웠을 것이다. 제사장의 직무는 모세의 율법책을 근거로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라면, 예언자는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현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두 사명 모두 중요하지만, 제사장들은 당시의 정치에 관여하거나 연설할 것을 요구받지 않는다. 백성들은 제사장들을 존경했다. 반면 예언자는 당시 정치·사회적으로 예민한 부분들을 다루기에 때로는 백성들에게 거부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제사장이 아니라 예언자가 된다는 것, 특히 시대가 어려울 때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그토록 예언자 사명을 거부했던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1:10절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신 목적들이 언급되어 잇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먼저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린다.’ 이것은 심판이다. 다음 목적은 건설하고 심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이다. 그런데 구원이 있기 전에, 먼저 현재의 체제가 철저히 붕괴되어야 함을 그는 예언해야 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그토록 힘들어 했던 원인이었다.

 

II. 우리는 이제 예레미야 예언자가 선포한 그 내용을 간략이 살펴 보고자 한다. 예레미야 전체는 정죄와 심판이 대부분을 이룬다.

1) 먼저 예레미야는 정죄의 선포를 하였다.

하나님께서 유다국을 정죄하는 근본 이유는 그들이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 즉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파트너인 여호와를 버린 것이 그 첫째 악이요, 둘째 악은 그들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곧 우상을 숭배한 것이다. 우상, 곧 이방신을 섬기는 것을 구약성경에서는 곧잘 행음이라고 말한다(3:1, 6).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정절을 버리고 다른 신을 찾은 것 그 자체가 행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부수적으로 다양한 죄들이 확산되어 간다. 17:27절에서는 백성들이 안식일을 거룩되게 아니하엿음을 지적한다. 22:17절에는 탐욕으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림을 지적한다. 5:28절에는 고아의 송사,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않았다고 질책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런 일들을 행하면서도 조금도 가책이 없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 일을 감독해야 할 지도자들이 무감각하게 되었다.

5:30-31,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지도자들, 백성들이 한 통속이 되어 타락하였다.

이들의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는 데까지 도달한다.

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 그들의 잘못된 행태를 지적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도자와 백성들은 기분 나쁘게 듣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기록하여 만든 두루마리를 불에 태우기까지 하였다. 36:23,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2) 이처럼 죄에 죄를 더한 유다 백성에 대해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두 번째로 심판을 선포하게 하셨다

6:2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 여기서 북방에서 오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분명치 않지만, 후에 바벨론임이 드러난다.

9:11, “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8:3, “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하나님의 심판에서 겨우 살아남은 자들도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을 원할 정도로 고통이 극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유다 민족주의자들은 애굽과 화친하여 바벨론에 저항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엇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정반대로 바벨론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다, 그러니 일단 바벨론에게 복종하고 포로로 잡혀간 사람은 70년만 기다리면 해방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예레미야의 예언은 민족주의자들에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하나님 말씀보다 민족이라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더 중시하다 보니, 예레미야는 민족반역자로 간주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 했다.

20: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38:4, “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38:6, “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 후에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던 자들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멸망한 후에도, 철저히 예언을 거부할 뿐 아니라, 예레미야를 애굽으로 끌고 가는 불순종을 저질렀다.

 

3) 예레미야가 선포한 세 번째 예언은 구원의 소망이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구원 언약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조건적인 언약으로서,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새로운 구원이 임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조건적인 언약으로서,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하나님이 구원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구원 메시지는 두 번째에 해당된다.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기서 70년은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뜻하느냐에 대해 설명이 여러 가지다.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1차 포로가 된 주전 597년부터 바벨론이 멸망한 주전 538년까지는 대략 60, 예루살렘 멸망의 해인 주전 587년부터 주전 538년까지는 50. 그래서 어느 학자들은 70이라는 숫자를 어림수로 보기도 한다. 또한 어떤 학자는 성전의 파괴된 587년부터, 재건된 주전 515년까지의 기간으로 보기도 하는가 하면, 바벨론이 애굽을 이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부터 바벨론 멸망(주전 539)까지의 기간으로 보기도 한다). 어떻든 70년이 되면 해방된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이다.

예레미야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 언약은 무조건적이다. 물론 현 세대는 철저히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남은 자들 속에서 하나님은 새 일을 하실 것이다. 이에 대해 강력하게 언급된 부분이 렘 30-33장까지이다. 52장까지 되는 예레미야서 전체에 비하면 짧은 범위이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구약의 경륜 자체를 초월할 새로운 세계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31:31-34,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새 언약’(신약). 그 특성은 하나님과의 언약이 새겨질 장소가 이제는 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지도자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법이 만연한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III. 예레미야는 예언자들 중 가장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기 민족에게 재앙을 예언해야 하는 것에 가슴이 아픈 것이다.

4:19-22, “[19]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20]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21]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8:18-9:1, “[18]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19]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20]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21]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22]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9: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이스라엘을 치고 말살해야 하는 하나님의 슬픔은 예레미야의 슬픔이 되고, 하나님의 눈물은 예레미야의 눈물이 되었다.

물론 예레미야가 예언자 직임을 감당하면서 실망이라는 골짜기로 곤두박질 친 적이 있었다.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을 언급하며,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12:1)라고 질문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여호와를 노래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20:13). 그리곤 곧 이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20:14). 그는 또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면서, 하나님을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15:18)라고 불렀다.

예레미야는 예언자 직무를 감당하면서, 많은 수치를 당하고 상처를 받았다. 그때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지도자와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침묵하지 않았다. 40년동안 영적으로 눈 멀고, 귀 먹은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햇는데 오히려 더 어려워질 때,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마태 16: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라는 질문에 대해 제자들의 대답이 나온다. 세례요한,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태를 보면서 예레미야를 떠올린 것일까?

예레미야 당시 거짓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과 그 백성을 구하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상처가 곪아 터지는데도 샬롬! 샬롬!’ 외쳤다(6:14; 8:11). 그러나 예레미야는 병든 나라를 위해 울고 백성들에게 참된 치료법을 알려준 정직한 의사였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갈 때, 그것은 아니라고! 외치며, 좁은 문으로 들어갔다. 단순히 말로만 아니라, 삶으로 그것을 보여 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긁어 모으고 소비하는 일에 허둥거리도록 만드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일을 성취하는데 필요시에 사용되는 정도. 그러나 예레미야는 진정한 믿음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믿음은 자신보다는 하나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데서 나온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인간적인 교만이나 출세 의식, 혹은 개인적인 성취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이런 예레미야는 세상적인 요구에 자신을 맞추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자 하는 열정을 우리에게 불러 일으킨다. 그저 하잘 것 없는 일로 바쁜 일과를 툭툭 털고 과감하게 최상의 삶을 살도록 도전받을 필요가 있을 때, 예레미야는 우리의 중요한 모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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