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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지롱' 연가
국명자 2013-03-20 추천 0 댓글 1 조회 866


삐지롱연가



                                                                                                                                                 국 명 자

 

갓 피어난 하얀 목련이 방금 세수 끝낸 소녀처럼 청초합니다. 나무 밑에서는 갓 깨어난 노오란 병아리들이 어미닭을 놓질새라 종종걸음치면서 뭐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쉬지않고 옹알댑니다.

 

'삐약 삐약' '삐약삐약'

 

내 귀청에 닿았던 소리들 중 가장 어여쁜 소리입니다. 가장 연한 소리로 가장 먼저 지구를 두드려서 깨워내는 봄의 귀여운 나팔수입니다. 달걀에서부터 가지고 나왔을 그 햇소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들을 때마다 피식 웃곤 합니다.

 

겨우내 조용했던 벌통 출입구가 저리 아수라장이 된 것은 꽃소식 염탐할 척후병들의 파병식 때문일 것입니다. 성질 험한 놈들이라 오며가며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이미 번개같이 쏘고 달아난 후여서 쐰 얼굴은 금세 퉁퉁 부어올라 며칠간은 식구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괴물이 되고맙니다. 벌통들을 놓고 살기에 동네사람들은 번갈아가며 괴물이 되곤 하는데 매년 연례행사처럼 여러번씩 괴물이 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산자락 타고 내려온 노오랗고 뽀송한 햇살이 논과 밭으로 질펀하게 내려 앉는가싶더니 몸을 틀어 내 집 안마당으로 곧장 직진할 모양입니다.

 

서둘러야합니다. 겨우내 게으름부리면서 미루고 쌓아놓기만 했던 것들을 마당에서 깔끔하게 치워놓아야하기에 우리 부부는 봉두난발 까치머리된 채 부랴부랴 빗자루 들고 온 마당 휘젓고 다니면서 새봄맞이 굿 한 판을 벌였습니다.

 

울타리 밖에선 매화 진달래 개나리 개복송 목련들이 매말랐던 나뭇가지에서 어여쁜 꽃잎들이 되어 꿈결처럼 터져나오고 달래 냉이 씀바귀 곰취 쑥부쟁이 멜라초며서둘러 출석부에 이름 올려놓은 성질 급한 생명들이 앞다투어 동토의 지표를 뚫고 줄서서 올라오는 중입니다.

 

내내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얼굴들이 새 생명이 되어 새 기운들을 몰아가지고 대거 들이닥치는 바람에 정신 놓고 넋 놓았던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때가 바로 이 때입니다.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들이 되어 봄 농사도 미뤄둔 채 꿈 꾸기 시작하는 때도 바로 이 때입니다.

 

나도 한 그루 작은 나무가 되어 꿈꾸고싶어서 내 집 마당에서부터 하늘로 치솟고 있는 국수봉 끝자락으로 내려섭니다. 볕 고운 쪽에 두 발 가지런히 내려놓고 마른 두 팔 좌악 벌려 사월 하늘에 올려놓습니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온몸에 두르고 풋풋한 향기로 목을 축인 다음 다사로운 햇살로 얼굴을 닦고 있으면 내 안에서도 기쁨의 수액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제 곧 고운 꽃잎 벙글고 파릇파릇 새순 돋을 나무가 되려는 모양입니다.

 

'구구구우우 구구구우우'

산 능선 타고 깊은 골짜기를 건너왔을 산비둘기의 그윽한 울음 소리를 듣습니다.

'소오쩍 소오쩍' '뽀오 뽀오' '삐지롱 삐지롱' '쪼옷 쪼옷 까르르르롱' '씨월 씨월'

소쩍새 울고 뽀오 새와 삐지롱 새 울고 이름 모를 산새들도 앞 다투어 흐드러지게 울어줍니다.

사월 초하루면 어김없이 솟아오르는 머위 잎 한 장에도 봄 장기(臟器)인 인간의 간() 치유를 위한 막중한 소명이 있어 달려온다는데 저리 신명나게 울어주는 산새들에게는 분명 더 귀한 소명 있을 것이어서 먼 길 마다하지 않으며 그 울음 끝을 끝까지 따라가보고싶어서 신발끈을 묶습니다.

 

산의 심오한 숨소리를 듣습니다. 골짜기의 침묵이 정다워서 몸을 접고 귀를 기울입니다. 흐드러지게 뿜어내는 산자락의 강한 체취엔 취기가 오르고 몸까지 흔들려서 그만 코를 싸매고 돌아섭니다.

 

꿈을 꿉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한 그루 작은 나무로 서서 하늘 향해 두 팔을 벌입니다.

내 메마른 몸 마디마디에서 산정기 받은 고운 꽃망울들이 곧 벙그러질 것같은 설레임으로 온 몸이 뜨겁습니다.

'구구구우우 구구구우우'

때 맞춰 먼 산에서 산비둘기가 울어줍니다.

아아! 이제야 알았습니다. 삭정이 같았던 나무 가지들 끝에서 저리 어여쁜 꽃잎들을 꿈결처럼 피어나도록 마지막 힘실어 불러내어준 것은 산비둘기의 저 애잔한 초혼곡이었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자지러지게 울어주는 산새들의 울음소리 끝에 내 메마른 몸 마디마디에서도 드디어 고운 꽃망울들이 피어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무한 감사와 감격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지난 봄 급성 호흡부전증을 앓았던 슬픔이 있었기에 아직도 숨 쉬면서 이렇게 살아 있음이 눈물겹도록 고마워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로 감사하였음을 전하고 싶고, 모든 사람들에게 달려가고 있는 내 애틋한 사랑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한평생 사람으로 살면서 굽이굽이 서러웠고 고달팠음이 실은 별게 아니었다며 모르는 사람들까지 붙잡고 위로해주고 등두드려주고싶은 마음이 굴뚝보다 더 높게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이제보니 삭정이 끝에서 꿈결처럼 피어났던 꽃잎만이 기적의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왜 몰랐었을까요 우리들의 안에서도 진즉부터 그 놀랍고도 감격스러운 생명이 용솟음치듯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생명 있음 그것만으로도 아아! 모두가 기쁨이었고 행복이었습니다.

 

사월은 마른 나뭇가지에 고운 꽃망울들을 매달아주는 놀라운 솜씨만 가지고 온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도 꽃 잎 따라 꽃 꿈꾸게 하면서 이렇게 무한한 깨달음과 무한한 행복을 은밀하게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산새들이 내 집 앞마당으로 내려옵니다. 감격에 겨워하는 내 마음을 용케도 알아채고 팡파르를 울려줄 모양입니다. 작은 입들을 벌려서 저희들만의 암호로 합창을 시작합니다.

 

뽀오뽀오’ ‘삐지롱 삐지롱’ ‘쪼옷 쪼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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