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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老婦)의 연가(戀歌)
국명자 2013-08-11 추천 0 댓글 0 조회 844


노부(老婦)의 연가(戀歌)


                                                                                                   국 명 자


 유별나게 긴 속 눈썹을 매달고 있었던 남자였습니다. 소리 없이 웃던 눈웃음과 그렇게 웃을 때마다 소년처럼 수줍게 옴폭 패이던 양 볼의 보조개는 여자인 나에게도 없는 매혹적인 것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평생 이유 없이 무한 기분 좋게 해주었던 남자였습니다.

  다리긴 아저씨를 연모하였던 철없던 어린 처녀시절부터 그에게 따라다니는 여풍(女豊) 여다(女多) 여난(女亂)의 흥미로운 소식들을 간간이 들으면서 살아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이었던가 길일(?)을 택해서 용기 내어 그를 직접 만나보았더니, 주말마다 산을 탔었다는 그의 긴 건각(健脚)부터가 감히 나 같은 애송이가 욕심내기엔 너무도 과분해보였던 남자였었습니다.

  신문지상에 올리던 그의 유쾌한 문장의 해박한 글들과 날카로운 논조는 독자들의 탄성을 이끌어내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소문이 널리 돌고 있었습니다. 그의 영문 이니셜이 글 꽁무니에 붙어 나왔던 상자 안의 맛갈스러웠던 짦은 글들과 고정란의 그의 긴 글들을, 나도 날마다 빼놓지 않고 감탄하면서 읽고 또 읽곤 하였었습니다.

  동서양의 아름다운 시들이 그의 입에서 막힘없이 암송되어 나올 때면 듣는 사람들마다 그만 감격하고 말았다는데, 숱한 후배들과 선배들이 그리고 꽃다운 여인들이 그에게 끌리고 반할 수밖에 없게 하였던 이유들을 그는 두루 그렇게 갖추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홀로 살아왔었던 외로움이 그의 눈가와 목 언저리에 깊게 서리어 있었지만 반면 무척 유쾌한 사람이어서 가곡이건 유행가건 그가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낯선 사람들까지 그의 노래를 듣고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전해져오고 있었습니다.

 그가 내 남편이 되어 내게로 왔을 때에 두려웠었던 것은, 그는 그리움의 대상으로는 최상의 남자였으나 남편감으로는 단연 최악의 부적격자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뭇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면서 살아왔었던 그가 한 여자만을 바라보면서 삶의 진흙 땅으로 어떻게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런지, 먼저 그것부터가 걱정이 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삼십 년 전 일이었습니다. 남편은 큰 딸애의 서울대학교 원서를 접수시키기 위하여 강추위로 꽁꽁 얼었던 날,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었습니다. 원서는 학교에서 단체로 보내던가 아니면 우편으로 보내어도 되었을 일을, 왠지 접수하는 첫날이어야만 되었고 그것도 내 손으로 원서를 접수시켜주어야만 될 것 같았던, 소심하고도 치기어린 내 마음을 읽어준 남편은 두 말도 없이 딸애의 원서를 가슴 안에 품은 채 떠났었습니다.

 원서접수, 시험, 논술고사, 함격자 발표, 신체검사, 오리엔테이션, 입학식까지 연달아 일곱 번을 그는 줄곧 춥고 어설펐던 겨울날에, 딸과 함께이거나 아니면 그 홀로 그렇게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고 또 꽁꽁 얼어서 돌아오곤 했었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있었던 딸애는 학부모들이 대기하고 있는 뒷좌석에서 버스럭대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그지없이 숭배(?)해마지 않았을 제 아빠가 퍼런 비닐우산을 접으면서 내는 소리였더라고 했었습니다.

 먼 훗날 제 아빠가 지상에서 떠나는 날이 온다면, 구격 맞추기 결벽증이 있는 아빠가 우산 접는 것에 골몰하느라고 잔뜩 구부리고 있었을 모습을 떠올리면서 분명 통곡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습니다.

 먼 자리에서만 빛날 줄 알았던 남편은 딸애의 뒤에서 비닐우산을 접고 있는 어찌 보면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었던 그 자상한 모습으로 내 옆에서도 그렇게 있어주었고 지켜주었던 남자였었습니다. 뜻밖이었습니다.

 

 아들이 사법시험에서 일 이 점 차이로 서른 살이 넘어설 때까지 계속 떨어지는 아픔을 치뤄낼 때마다 나보다는 남편이 먼저 소리 없이 때로는 몸부림치면서 울었었습니다. 다시 공부하러 들어가겠다며 우릴 위로하고 추레한 모습으로 들어가던 불쌍한 내 아들보다는 차가운 거실 바닥에 몸을 던져놓은 채 ‘내 아들 불쌍해서 어찌 할거나’라며 슬퍼하던 거인(?) 거구였던 내 남편이 더 불쌍하여 그 때문에 내가 더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향하여 들어내 보이는 그 애연한 슬픔과 약함을 보면서,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 정신없이 헤집고다닐 것만 같았던 그에 대한 나의 불안감이 단번에 해결되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뜻밖이었습니다.

 

 남편이 기도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자유로운 영혼을 막을 자 없었고, 중앙동 거리에서 긴 다리를 가진 방랑자 사나이로 널리 소문나고 있었던 사람이어서, 사남매의 아이들과 함께 돌아가면서 맡았던 밥상머리에서의 식사기도만은 그가 빼달라고 부탁했었을 때 당연히 그래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병약했었던 나는 그 앞에서 여러 번 사경을 헤매었었고, 그가 끔찍이 아끼던 두 딸애들은 대학교와 대학원을 한국에서 다 마치고도 팔 년씩 독일과 일본에서 계속 공부하느라 아까운 청춘들을 늙히면서 썩히고(?) 있었는데,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만 된다면서 그들을 등 떠밀며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남편은 그것에 대하여서도 무척, 아주 무척 가슴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언감생심 생각지도 못했을 기도를 남편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이 그의 가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작하였을 것이었습니다. 주권자께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무릎 꿇을 생각이 없는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어주시고 그들을 통한 통절한 아픔을 주시면서 그를 부르셨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주권자께서도 그를 사랑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던가 보았습니다. 뜻밖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여든 한 살의 극 노인의 대열에 올라서고 있었습니다. 세월은 참으로 잠깐이었습니다. 나와 뭇 사람들을 감동시켰었던 그의 빛나던 것들은 이제 곧 그에게서 떠나갈 것이었습니다. 당당했던 목소리도 유쾌한 웃음소리도 유난히 빛났던 총기까지도 그에게서 떠날 날을 잡아놓고 서두르고 있을 것이었습니다. 몸 안팎 여기저기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생각지도 못하였던 여러 잡다한 고장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늘 아픈 몸이었지만 더욱 수상하다싶은 심각한 증세가 내게 찾아올 때면, 남편부터 떠오르면서 목이 메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남편 홀로 남게 될까 봐 가슴이 메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심신 공히 병약했었던 내 앞에,  최상의 그리운 남자로만 멀리 서 있어주어도 행복했었을 것인데  뜻밖에도 자상하고 따뜻한  최상의 남편으로 변신하여 기적처럼 달려와주었던 고마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내게 남편이기 전에 흔하지 않을, 옆에 있어도 그립고 다시 보고싶어지는 그 그리운 사람이 된 것이었습니다.

 심혈관 수술 후부터 한 번이라도 놓지면 절대 안될, 시간 맞춰 복용해야할 여러 약들이며, 먹고 자는 여러 소소한 일들에까지 두루 서투른 내 남편 때문에 어쨋든 나는 그보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아야만 되는 몸이었습니다.

 눈가와 목 언저리에 인장처럼 외로움이 박혀 있는 그의 옆에서, 그를 빛나게 해주었던 소중한 것들마저 이제 곧 떠날 참인데 나까지 먼저 떠나버려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와의 하루가 너무도 소중하고 감사한 생각이 들어서 그의 옆에 가만히 다가서니, 평생 동안 날 이유 없이 기분좋게 해주었고 반하게하였었던 그 볼우물을 만들면서 그는 눈웃음을 치고 있었습니다. 가슴이 또 메어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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