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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금(精金)같이 되어
국명자 2014-10-25 추천 1 댓글 0 조회 979

 

정금(精金)같이 되어

  국 명자

   나를 바꾸고 싶은 간절한 소망으로 살아간다.

굳어져버린 내 안의 모든 것들과 버릇 들여진 내 모든 행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틈만 나면 <금연><금주>를 부르짖는 사람들처럼 나도 틈만 나면 <나 바꾸기>를 부르짖으며 살아가고 있다.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워주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켜주시오며 ……

우선 급한 것은 말버릇부터 고치는 일이었다. 나이 들고 사는 일에 익숙해지니 함부로 말을 내뱉게 되는 내 모습이 나도 싫었다. 너무 말이 없고 조용하다며 흉 아닌 흉까지 잡혔던 젊었던 고운 시절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이리 수다스러워졌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말을 뱉고 나면 그 여운이 내 귀 언저리에 쟁쟁하게 남아 있는데 건질만한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 억양도 싫고 선택된 어휘들도 싫고 그보다는 말들 속에 담겨 있는 나를 들어내고자 한 오만함도 싫고 괜한 트집기도 싫고 아첨도 싫고 어쨌든 모두 싫었다.

대수롭지 않게 툭툭 던진 말로 하여 오해하고 상처를 입게 되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돌아서버리면 절대 안 될 사람들이 매정하게 돌아서버린 후에라야 가슴을 치곤했었다. 내 말의 본뜻은 그런 게 아니었으니 이해하고 용서해달라며 애원도 해보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만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평생의 가슴의 상처로 보듬고 살아가야만 했었다.

고치고 바꾸어야할 것은 말뿐만이 아니었다. 바꾸어주기를 바라는 것들이 내 앞에 줄을 서 있었는데, 입만 다물면 쉬울 것 같은 말 하나조차도 조절하지 못해서 내 명예와 자존심과 생명까지 추락하는 것을 보면서도 고칠 수가 없는 것을 보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나 바꾸기>는 불가능할 모양이었다.

 

사람 됨됨이를 금의 순도로 평가한다면 나는 그러니까 가짜 금일 것이 분명했다. 십팔 케이 언저리에도 갈 수 없는 잡석 투성이인 가짜 금,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잡석인 셈이었다.

부끄러운 것은 그동안 나는 내가 제법 빛나는 금 그러니까 작고 약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보석류에 속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힘까지 얻고 은근히 콧대까지 높이는 오만함 속에서 살아왔었다는 점이었다.

딸만 둘 두신 부모님께서는 선병질로 태어나 아프기를 밥 먹듯 하는 장녀인 나를 금이야 옥이야 유별난 사랑과 과보호로 키우셨으며 선생님들도 공부 잘한다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시었고 친구들도 그러한 나를 귀한 자리에 서도록 길을 비켜주곤 했었기에, 모든 가치관들이 만들어져 굳어진다는 성장기를 그리 보냈으니 나는 내 자신이 분명 금이고 옥인 줄로 굳게 믿게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진짜 금이 되고 진짜 옥이 되어야만 했었다. 내 남은 날들이 짧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내 영혼을 심판하실 그 분 앞에 서야할 날이 바로 코 앞으로 닥쳐오고 있었다.

그 낌새를 절실하게 눈치 챈 것은 오 년 전부터였다.

남들 공부하며 뛰어다닐 때 홀로 병들어 눕기를 밥 먹듯 하였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그 기운이 돌아올 때까지 장기 결근계를 제출하고 괴로운 투병기를 가져야만했었던 소문난 병골내미가 바로 나였었다.

다시 올 내 후임자가 볼 것같아 사용하던 교무수첩을 남몰래 찢어낸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직장 지붕과 내 집 지붕을 하염없이 보라보면서 곧 닥쳐올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서러워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었다.

선병질로 비정상적인 위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사람이면 당연히 즐기고 누리는 맛난 음식들을 먹을 수가 없는 것이 평생 또 내게 지워진 무거운 형벌이었다. 자로 잰 듯 저울로 단 듯, 일정량의 밥 한 공기와 채식만을 아주 조금씩 환자인 듯 먹어야만 그나마라도 몸의 평안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크림빵 한 개, 우동 한 그릇 먹어보는데 내 평생 소원이기도 했었다. 밀가루 음식까지도 위장이 아예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널린 그 많은 맛난 것들을 참아내는 일이야말로 내 안에서 매일 매 끼니 소리 없이 일어났던 심각한 전쟁이었다. 딸기 세 알을 먹고 석 달간 배앓이를 했었지만 그러나 이런 모든 증세들은 내 평생 자주 찾아왔었던 아주 친근한 증세들이어서 전혀 염려가 되지 않았던 터였다.

암환자보다 더 무섭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던 삼십 사 키로그램의 체중을 보면서 놀라 체중계를 치우고 두려운 뇌수막염과 싸웠던 때가 바로 오년 전 여름이었다. 음식물들이 삼켜지지도 않았고 뱃속은 곪아 터진 것처럼 쉬임없는 통증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해골처럼 말라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달려온 자식들의 눈물짓던 모습과 간병하면서 절망에 빠져가던 남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밤중에 일어났는데 호흡이 들이쉬지도 내쉬지도 못하게 꽉 막혔던 기막힌 일을 당했던 때는 바로 작년 오월이었다. 거실 안을 건중건중 뛰어다니는 나에게 왠 일이냐고 묻는 남편에게 말문까지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석 달간 그 증세는 나를 공포에 몰아넣으며 괴롭혔었고 지금도 생각하기 싫은 악몽이고 흉몽이 되고 있었다.

 

어쨌든 이제부터는 서둘러 내 안을 비워내고 새로 바꾸는 작업을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내 추한 모습으로 내 생을 마쳐서는 안될 일이었다.

……사랑하고 용서하며…… 오래 참고 기다리며…… 두려워 말고 굳센 믿음으로 일어설 것이며……

사랑만 받았던, 더 사랑 받지 못해서 안달하고만 살았던 나같은 욕심 많은 사람이 어찌 사랑을 알기나 할 것이며, 내 가슴을 찌른 자만 생각하면 다시 피가 콸콸 흐르기 시작하는 얇은 가슴으로 감히 누굴 용서한다고 나설 것이며…… 왕 겁쟁이인 내가 어찌 굳센 믿음 언저리께나 다가갈 수 있을 것이며…… 참지 못하고 발발 떠는 유별난 유전인자가 깊이 박힌 오장육부를 가지고 어찌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며……

 

<사람 바꾸는 일>은 알면 알수록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참으로 어려운 일 아니 절대 불가능한 일임을 뼈저리게 알아야만 했었다. 그게 정답이었다.

나의 전능하신 주군께 매달렸다. <사람 바꾸는 그 일>은 결국은 그분만의 권능 안에 있는 일이었다. 그분이 허락하실 사안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 여느날 처럼 <나 바꾸기>를 간절하게 소원하며 예배를 드리던 중, 무심코 정면의 화면 위로 떠오른 찬양가사를 보다가 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정금이 꼭 되고 싶었던 사람이어서 그러나 결코 정금이 될 수 없는 사람이어서 울었다. 뜨겁고 험악한 담금질을 당하고 또 당한 후에라야만 어렵사리 정금이 되어 나올 사람들이 너무 안스러워 울었다.

 

유별나도록 긴 육신의 고통과 그리고 부끄러운 실패와 좌절로 켜켜이 쌓인 그동안의 내 마음속 상처들이 실은 재앙이 아니었으며 당신의 계획된 뜨거운 단련이었고 사랑이었음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어서 감격하여 거푸 눈물을 쏟았었다.

 

눈물을 닦으면서 일어서는데, 언젠가는 정금같이 되어 당신 앞에 서도록 허락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확신이 되어 내게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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