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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영성생활 이순태 목사 2012-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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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영성



I. 묵상의 필요

1.
Vincent van Gogh(1853.3.30 - 1890.7.29.)

1972년 미국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인 돈 맥클린의 발표작으로 천재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를 노래하고 있다. 고흐를 아는가?” 특히 이 노래에서는 고흐의 “Starry, starry nights"(별이 빛나는 밤)의 그림을 묘사하고 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성경말씀의 씨를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뿌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한때는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그의 열정을 학교에서 받아주지 못했다. 후에 가난한 탄광촌에서 평신도 전도사로 봉사, 거기서 그는 광부들의 한없이 열악한 환경 속에 함께 살면서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기도하며 말씀을 전했다. 그때 그는 그들의 삶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야겠다는 생각. 후에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열심히 그려댔다. 한때는 정신병원에 들어간 적도 있었는데, 어느 정도 차도가 있을 때 그린 그림이 별이 빛나는 밤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 by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작

 

# 고흐, “그것은 또다시 영원한 질문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인생의 전부일까? 아니면 우리는 죽기 전까지는 과연 반쪽 밖에 모르는 것일까?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저 별은 나를 꿈꾸게 한다. 지도에 도시와 마을로 표시된 검은 점을 보며 꿈꾸는 것과 똑같이.” 사람들은 어둠에서 검은 색만 보았다. 그러나 고흐는 그 어둠에서 온갖 색깔을 보았다.

 

돈 맥클린은 이렇게 노래한다:

지금에야 나는 이해할 수 있다네

당신이 내게 말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당신이 제 정신을 지키려 얼마나 고뇌했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려 얼마나 애섰는지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네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몰랐다네

지금이라면 들을지 모르려만.

 

# 고흐,

우리 영혼에는 거대한 불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에 녹이러 오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굴뚝에서 나오는 한 줄기 연기만 보고 총총 제 갈 길로 가버린다.”

 

돈 맥클린의 노래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지금에야 나는 알 것 같다네

당신이 내게 말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당신이 제 정신을 지커려 얼마나 고뇌했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네

지금도 듣고 있지 않거니와

아마 영원히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네

 

사람들은 고흐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멀리 서서 고흐를 비난하며 발길을 돌렸다. 37년의 생애를 마칠 동안 그의 팔린 작품은 단 하나!

 

2. 성공지향적인 사회:

발전과 진보와 성취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은 영적인 삶에 관한 질문에 쉽게 영향을 끼친다. “내가 얼마나 전진했지?” “영적인 수련을 쌓은 후 내가 얼마나 성숙해졌지?” “지금 내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어떻게 하면 그 다음 수준에 올라갈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이 다 의미가 있긴 하지만, 자칫 성공지향적인 이데올로기 속에 영적인 삶을 평가하려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e.g. 마르다와 마리아(10:38-42)이야기

마르다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들린 예수님을 기쁨과 감사로 영접한다. 가슴이 뛰고 행복했다. 시장에 가서 최상의 것으로 구입하여 주님께 대접하고자 빵을 굽고, 오랫동안 아껴두었던 새그릇도 꺼내었다. 먼 길 오신 주님에게 역시 따뜻한 밥이 최고야! 점점 일손이 바빠지고 이마에 땀이 흘렀다. 그런데 방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게 된다. 도대체 마리아는 왜 나를 돕지 않고 방안에 앉아 있는거야? 조금만 도와주면 일이 훨씬 쉬울텐데... 주님도 이해할 수 없어. 내가 이렇게 일하면 동생을 타일러 언니를 도우라고 하셔야지. 손놀림이 빨라질수록 은근히 마르다는 부아가 났다. 드디어 마르다는 하던 일을 집어던지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도록 가만히 앉아 있도록 왜 내버려 두십니까? 마르다는 분주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주님이 아랑곳하지 않는 것에 대해 화가 났다. 그래서 곧장 주님께 대들었고 자신이 마리아의 언니이며, 이집 주인은 나라는 것을 은근히 주지시킨다. 처음에 주님이 마르다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 집은 반가움과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몇 십분이 지난 후 그곳은 분노와 비난이 있었다. 무엇이 상황을 그토록 만들었을까요? 마르다의 비난에 주님은 말씀.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사실 필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단다.”

 

문제는 많은 일 자체가 아니라, 그 많은 일이 한가지, 꼭 필요한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르다에게는 고요한 중심이 없었다. 바퀴의 회전축이 없었다. 삶이 고정축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준비하는 식사가 그 음식을 먹는 사람보다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지금의 삶은 누구와 가까운가? 주님을 위한다는 좋은 명분을 가지고 마르다, 그러나 그에게 자신이 쉬어갈 내면이 없을 경우는 무언가 쫓기듯이 바쁘고 산만하며, 화가 난다. 이에 반해 마리아는 다소곳이 주님 앞에서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그 분 앞에 무릎 꿇고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영성생활의 시작이라 할 것이다.

 

II. 묵상의 과정

1. 읽기(듣기·보기)

1) 성스러움이란 우리 일상의 평범한 순간속에 숨어 있다.

현대인들은 머리 회전이나 동작이 느린 사람보다는 민첩하고 재빠른 사람을 좋아한다. 세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빨리 달려간다. 그러면서 활동 자체가 고귀한 가치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활동하지 않는 자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무언가 바쁘게 돌아가야 제대로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점점 일의 중독현상속으로 매몰 되어졌다.

그러나 성스러움이란 우리 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에 숨어 있다. 일상의 순간 속에서 성스러운 것을 보려면 걸음을 늦추고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고속도로의 차량의 물결에서는 아무리 좋은 경치가 여러분에게 주어진다고 해도 여러분은 그것을 제대로 누릴 수 없다. 어느 순간에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는바가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걸음을 늦추고 순간을 묵상할 줄 알아야 한다. 묵상이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히 의미 있는 것이 심길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요, 모든 성스러운 것에 대해 영적 감각을 키워 가는 생활방식이다. 그 성스러운 것 중에 하나가 성경이다.

 

2) 읽기의 대상

성경 : 성경은 누구라도 다만 얼마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더욱이 성경에 관한 참고서적이나 주석, 그리고 성경 안내자가 있다면 여러분은 성경에 대해 박식한 사람이 될 것이다. 성경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대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같은 지식에 앞서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을 무엇으로 여기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역사와 사회를, 고대 언어를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변부적인 것이다. 성경은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e.g. 한 율법사: “선생님, 율법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지상계명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4-40)

 

또한 요 13:34을 통하여,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결국 성경은 사랑으로 집약될 수 있고,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연애편지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을 시로, 아름다움과 사랑이 들어 있는 연애편지로 간주하는 것은 성경에서 어떤 논문을 위한 자료로, 혹은 윤리적 행동강령을 추출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 사랑을 보고, 사랑을 주어야 할 이웃을 보고, 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다.

 

일상적인 삶 : 삶을 보다 풍성히 체험하기 위해서는 세상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으로. 하나님을 찾는 우리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은 일상생활에서 서로 만난다.

 

토마스 머튼,

이 땅을 사는 모든 인생의 모든 순간과 모든 사건은 그 영혼에 뭔가를 심어 놓는다. 눈에 보이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듯 영적인 생명의 씨앗도 세월의 흐름을 타고 날아와 인간의 마음과 의지에 살며시 내려 앉는다 그 무수한 씨앗은 대부분 죽어 없어지는데, 그것은 인간이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의 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영화, TV, 소설, 자연, 이웃과의 만남, 직장, 미술, 연극, 음악, 기도, 침묵 등

 

아브라함 헤셀,

거룩한 세계를 느낀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소중한 것을 느끼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공중에 나는 새, 들에 핀 백합화를 보고 가르치셨다.

드러나는 부자가 아니라, 헤어진 옷을 입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못하는 과부의 헌금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다.

 

3) 그러기 위해선 대상에 어떻게 접근 할까?

솔로몬의 지혜 : 왕상 3:9의 말씀을 살펴보면,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물으셨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그러자 솔로몬은 백성을 잘 다스릴수 있도록 지혜로운 마음을 주소서. 그러자 하나님은 그 요구가 마음에 드셔서 그가 요구한 것보다 더 넘치게 주셨다. 여기서 지혜로운 마음 이란 본래 원문에 의하면 듣는 마음”(listening heart)이다. 즉 지혜의 시작은 잘 듣는 것이다. 잘 보는 것이다. 어떤 개념 속에 빠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e.g. 과연 사계절에 대한 묘사가 어느 정도 정확한가?). 솔로몬은 가시덤불과 무너진 담을 본다(24:30-34). 그러나 그것에 멈추지 않고 그것을 통해 밭 주인의 영혼을 본다. 게으름이 어떤 결과를 빚어내는가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밭을 보면서도 무심코 지나쳤을까? 우리의 일상적 삶 이면에는 우리를 가르치는 뭔가가 있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 보일 때까지 보고 또 보아야 한다.

 

C.S.Lewis는 예술 작품을 제대로 보는 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림 앞에 앉을 때는 내가 그 그림으로 뭔가를 하려 하지 말고 그 그림이 나에게 하는 일을 그대로 받으려는 마음으로 앉아야 한다.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제일 먼저 요구하는 것은 복종이다. 보라, 들으라, 받아들이라.”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보고 들은 뒤, 받아들이지 않고 대응한다. 복종하지 않고 저항한다. 변화되어 떠나기 보다는 비평하며 떠난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우리의 전이해를 가지고 들어가는가?

 

e.g. 얼마 전 고대 유대인의 유골을 가지고 컴퓨터로 재구성한적이 있다. 나타난 얼굴을 통하여 예수님의 얼굴을 유추 해 볼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산적같은 얼굴이 나타나자 실망감을 표출하였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예수의 상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미리 어떤 상(이미지)을 갖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그 같은 관념을 내려 놓고 보라는 것, 들으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돈 맥클린이 노래하듯 결코 의미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읽기 과정에서 진행되여야 할 내용은

* 본문 선정 : 반복적으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존중한다는 것은 거기에 뭔가가 있음을 아는 것(나인성 과부, 십자가의 강도, 거지 나사로, 우물가의 여인 등)

* 문맥을 살핌 : 선정된 문맥 전후,

* 관주를 참조 : 때로는 성서의 다른 책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 세부사항 : 성경 사전이나 지도를 통해

 

2. 묵상하기

1) 질문을 던진다 :

q, 예루살렘에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마르다·마리아 집을 방문하셨을 때의 심정은?

q, 세리장인 삭개오가 나무 위에 올라갔을 때의 심정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2) Filling Gaps/ 현대어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상황을 그려라

 

3. 반응하기

1) 말씀을 개인화 한다.

공부를 중시하는 세상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자주 분석과 토론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쪼개는 대신 하나로 묶어야 하며, 생각과 묵상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말씀이 나에게는 어떻게 연관되는가?(요한 8,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그 여자를 둘러싼 많은 군상들, 그 속에 당신은 어디 있는가? 마르다처럼 주님 주변에 힘쓰다가 정작 주님을 만나지는 못한게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2) 말씀을 두고 기도한다.

3) 마음에 말씀이 머물 자리를 내준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하였다. “묵상중에 꼭 새로운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 봐야 마음만 분산되고 허영심만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읽고 묵상한 말씀이 우리 마음을 뚫고 들어와 거기 거하는 것으로 족하다..... 말씀은 우리를 뒤흔들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움직이기 원한다. 하루 종일 말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 한다. 그럴 때 종종 우리도 의식 못하는 사이에 말씀은 우리 안에서 역사할 것이다.”

4) 행동한다.

 

III. 묵상이 나아갈 길

1. 묵상의 궁극적인 목표는 더 잘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묵상하며 영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지상계명 곧 하나님과 이웃을 더 잘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할 수 있으려면 먼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파스칼이 이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모르는 사람은 교만해진다. 자기의 비참함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성육신은 인간에게 얼마나 심각한 처방이 필요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여 준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싸움은 내면의 싸움이다. 예레미야 17:9로 이렇게 고백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

 

인간에게는 누구나 어둡고 그늘진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아픔이 많고 상처가 많을수록 독이 쏟아져 나온다.

 

2. 헨리 나웬의 3개의 약극점

20세기 최고의 영성가요 기독상담가인 헨리 나우웬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3개의 양극점이 있음을 피력했다.

자신과 관련/ lonliness(외로움) solitude(고독)

타인과 관련/ hostility(적대감) hospitality(환대)

하나님과의 관련/ illusion(환상) prayer(기도)

 

특히 외로움은 인간 고통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중의 하나이다. 다양한 질병과 자살의 원인, 각종 사고의 원인이 외로움이다. 오늘날처럼 경쟁을 하나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문화에서는 서로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에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조건 없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거나 사랑을 베풀어 줄 사람은 어디도 없으며, 이용당할 염려 없이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는 의심을 먹고 살아간다.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은 혼자 있기를 두려워한다. 일이나 게임의 분주함 속에서 자기를 잊으려 한다. 외로움에 지친 사람은 타인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에게 자유로운 공간을 마련해줄 수 없기에 이웃은 부담스러워하고 결국엔 서로가 지치게 되고 만다. 그런데 이 같은 외로움은 잊거나 부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가슴 속의 상처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 외로움을 점차 생산성 있는 고독으로 바꾸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 3 양극점 사이 어딘가에 어정쩡하게 매달려 있다.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양극점을 의식하고 우리의 삶을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이웃에 대한 적대감에서 따뜻한 환대로, 근거 없는 환상에서 기도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영적인 삶에는 샛길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외로움, 적대감, 환상을 피해 또 다른 극점으로 결코 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고요한 고독에도 외로움이 묻어 나오고, 이웃에 대한 섬김에도 분노가 섞여 있다. 우리의 기도에는 어느덧 세상의 잘못된 환상이 나타난다. 결국 또다른 극점을 향한 움직임은 갈등이며, 고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같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소망의 흔적이 된다.

 

3. 씨뿌리는 비유 :

30, 60, 100배의 옥토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런 수확을 내려면 땅을 갈아야 하고, 흙덩어리를 부수어야 하며, 돌멩이와 잡초를 일일이 제거해야. 나뭇잎, 잔가지가 땅에 떨어져야 썩어야 한다. 습기가 있고 지렁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누구나 풍성한 삶을 원하지만, 이런 과정을 누가 거치려고 할까? 누군들 달콤하고 손쉬운 성공을 바라지 않을까? 어느 누가 슬픔과 고통을 아는 자가 되고 싶으랴? 그러나 그것을 거칠 때만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너를 위로하려는 내가, 간혹 네게 유익이 되는 순박하고 고요한 언어 속에서 고생 없이 편히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내 삶에는 어려움과 슬픔이 많다. 내 삶은 네 삶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 그런 언어를 찾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주님은 마 11:29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심령의 가난함, 겸손. 이것이 있을 때 우리에게 쉼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연약함을 자랑할 수 있다(고후 12:10). 이웃에게 편안한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주님의 사랑을 믿고 영적인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흔적을 묵상하며 살아가겠노라고 새롭게 다짐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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