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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자기와 새로운 자아상 세우기 이순태 목사 2012-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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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자기와 새로운 자아상 세우기

 

 

1. 거짓 자기의 현상

 

1) 나의 스토리

 

얼마전에 만난 한 친구(전주에 있는 모 대학의 독문과 교수)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순태 너는 부자야!”

“...”

난 너의 아픔이 부러워···.”

 

이유인 즉 자신은 부유한 부모 만나서 전혀 어려움 없이 유학 갔다 대학 교수! 그래서 막상 글을 쓰려니 느낌이나 소재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픔이 많으면 소설에 많은 재료를 얻을 수 있고, 상담도 잘 한다네요? ... 글쎄 결과론적으로야 부럽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전 아픔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아픔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

 

아버지는 엄겨한 분이셨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새 아버지와 재혼하셨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또 후첩까지 두었다. 내 뒤로 나와 아버지가 다른 누이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어머니는 반찬 맛있는 것 있으면, 먼저 아버지 몫이었고, 그리고 내 뒤로 나이 차이가 큰 동생들이 있었지만 나와는 다른 피라 생각하니 이 세상은 나 혼자야!’ 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얼마나 엄하고 마작을 좋아하셨는지... 난 이런 모든 상황이 너무 싫어 아버지가 죽어 버렸으면···,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으면···.’ 순종형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외도를 보면서 점차 성격이 포악해셨다. 아버지-어머니의 치열한 싸움이 난 너무나 무서웠고, 나 혼자 뒷간으로 가 마구 울었다.

 

더욱이 내가 살던 곳은 아주 조그만 마을(보리밭)이었다. 어느 집에 무슨 일이 났다 하면 그날로 온 마을에 퍼져 버린다!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 학교 가기가 싫었다. 자주 책보를 등에 메고 물가에 놀다가 학교 끝날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들이 나를 보는 것이 싫었다. 마치 우리 집 얘기만 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몸도 허약한 나는 점점 소심증에 빠졌고 학교에서도 선생님 질문에 답변할 자신이 없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틀리면 어쩔까···하는 불안 때문에 대답을 못했다. ‘저요! 저요!’ 손 드는 것은 나하고는 무관한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 집은 정말 가난 하였다. 버스집 친구집에 놀러간다든가, 굿하는 집에 가면 오히려 영양 보충할 수가 있었다.

 

하여간 나는 가난하고 정떨어지는 환경을 만들어 놓은 부모를 무척 증오했다. 특히 아버지의 바람기에 포기한 어머니는 너 밖에 없어하면서 나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넌 잘되야 된다!’ 그러면서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이다. 정말 싫었다! 부모에 대한 이러한 분노는 무척이나 오래 갔고, 나를 덫처럼 얽어 매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갈 때까지 그 증오심 때문에 나는 수없이 집을 나갔다. ‘어떻게 하면 부모의 속을 끓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에 반응이 오면 오히려 깨소금 맛이었다. 나는 젊음의 에너지를 방향 맞추어 쏟아 붓지 못하고 이리 저리 방황하였다. 마지막에는 자살을 두 번이나 시도하기까지...!

 

그러나 앞이 캄캄하고, 인생에 절벽만 보일 때, 바로 그게 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문은 밀면 열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캄캄 절벽으로만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또 다른 눈으로 보면 그게 기회라는 것 내 앞이 캄캄하여 아무 것도 희망이 없다고 여길 때, 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이 된다. 그게 문이다. 중요한 것은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2) 우리 인간은 마치 자동차와 같다.

 

자동차는 저절로 알아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운전사가 운전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즉 운전사 마음대로 자동차는 움직이게 되어 있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다 운전수가 있다. 그런데 이 운전사들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서 우리 인생자동차를 몰고 다닌다. 어떤 사람 마음속에는 아주 신이 나서 근사하게 좋은 곳으로 몰고 다니는 운전사가 있다. 이런 운전수가 있으면 서서히 일을 하는데도 일이 그렇게 잘 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의 마음에는 불행하고 소극적인 곳으로만 차를 몰고 다니는 고약한 운전사도 있다. 자신과 타인의 부정적인 면만 바라보게 하는 운전사도 있다. 이런 경우는 아무리 열심을 기울여도, 다른 사람보다 배나 노력해도 결과가 형편없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부모나 자식과도 잘 살고 싶고, 부부간에도 싸우고 싶지 않아! 그런데도 그게 안돼! ? 내 속에 나도 모르는 낯선 운전수가 있어서 그렇다. 그러면 왜, 어떻게 해서 이런 운전사들이 우리의 마음 속에 지 멋대로 들어와 자리잡게 되는 것일까? 누구나 불행을 원치 않는다! 그런데도 왜 나의 노력이나 열심과는 달리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구부러진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일까?

 

상담 예화> 어느 아내의 이야기

한 부부가 이혼 소송을 결심 하였다. 그러자 주변에서 그래도 마지막으로 결정하기 전에 상담을 한번 받아 보라고 권면하였다. 그래서 그 아내가 저를 찾아 왔다. 결혼한 지 5년이 지난 둘 다 좋은 대학 나와서 모두 직장을 잘 다니고 있는 겉으로 본다면 화목한 가정이다. 하지만 아내의 말에 의하면 그런 지옥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남편이 싫고 내가 저런 남자 왜 만났나 싶다는 것이다. 특히 남편을 믿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저녁에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면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몸서리가 난다고 하였다. 한참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들은 후 그녀의 과거 얘기를 물었다.

그 여자의 아버지는 결혼한 지 한 달만에 자기 어머니 버리고 딴 여자 얻었다. 그런데 그 한 달 동안에 그 어머니가 임신했는데, 바로 이 여자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평생 남자에게 버림 받은 채 살아갔다. 후에 이 여자가 컸는데도 그 아버지는 코배기도 보지 않았다! 결국

남자는 믿을 놈 하나도 없어! 저놈도, 이놈도 똑같아!”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혼하면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돈이 1억정도 있다는 것이다. ‘남편도 그 돈 있는 것을 아느냐?’ 물으니 모른다고 하였다. ‘아니 언제부터 돈을 모았느냐?’고 물으니 결혼하면서부터 모았다는 것이다! ‘저 놈도 언제 나 차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기 나름대로 자구책을 구한 끝에 돈을 모은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참 잘 생각했지요. 그렇지 않으면 알거지 될 뻔 했어요

 

그래서 내가 말했다.

 

눈을 뜨세요. 당신의 남편은 당신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지금 당신 가지고 있는 돈 남편에게 돌려주고, 다시 그것을 주면 받고 주지 않으면 법적인 절차를 거쳐 이혼을 하든지 하세요! 당신의 남편은 당신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눈을 뜨세요!”

 

그러자 이 여자의 표정이 바뀌어지면서 중얼거렸다. ‘내 남편은 내 아버지가 아냐... 맞어 내 남편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 그러다가 어느날 집에서 데굴데굴 방을 굴르면서 소리쳤다. ‘내 남편은 내 아버지가 아니다!!!’ 그 날 저녁에 이 여자가 통장 3(1) 들고 남편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용서해달라고, 내가 이때까지 당신을 아버지로 보았노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믿지 못하고 돈 몰래 모았노라고! 여기 돈 있으니 받으시고 알아서 하시라... 남편이 가만히 이 아내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껴안으면서 소리쳤다.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눈을 떠야 한다. 그래서 먼저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지금 나를 움직이고 있는 운전사가 어떤 종류인지 알아야 하고, 왜 그런 운전사가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제대로 깨닫게 되면 우리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종종 교인들 이끌고 풍광 좋은 곳으로 단합대회를 가면 하는 자주 들리는 소리가 있다.

 

이곳 땅값 비싸겠네. 이곳에다 땅에 사 놓으면 괜찮겠네...”

 

완전히 부동산업자들이 다 된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볼 줄 아는 눈을 상실해 버렸다. 그러니 눈을 떠야 한다.

 

) 패러다임의 전환/ 지하철에서 중년 남자/ 두 자녀/ 노신사

 

 

3) 내 안에 숨겨진 아이

 

우리가 제대로 보는 것을 막는 것,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방향으로 짜증나고 피곤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는 운전수를 학자들은 내적 아이혹은 숨겨진 아이라고 부른다. 저는 분명 어른이다. 그런데 과연 내가 항상 어른답게 사는가? 되돌아보면 그렇지 않았음을 고백하게 된다. 어떤 때는 게으르고 눈치를 본다. 어떤 때는 어린애처럼 안절부절하고 충동적이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면서도 화를 터뜨려 놓고 나중에 후회한다. 분노를 통제를 못해! 때로는 어떤 사람과는 유달리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 어떤 때는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경향이 있고, 지나친 책임의식으로 쉽게 지쳐버리고 만다. 그런데 이러한 열심에 대해 저를 아는 한 전문가는 내 속에 들어 있는 열등감에서 나온 것이라는 분석을 한다. 기가 막힌 일이다.

또 어떤 이들은 중년에 자꾸만 집을 나가고 싶어 하고, 실제로 가출을 자주 한다. 가정이나 사회에 도무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직장도 오래 견디질 못한다. 이처럼 어른들에게서 나타나는 아이들의 모습은 바로 출생 이후 양육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생겨난 산물이다.

 

나의 지금의 나 됨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즉 개개인의 형성과정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어린 시절을 거쳐 어른이 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를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아무도 어린 시절을 건너 뛴 사람은 없으며, 과거에 우리는 우리를 양육한 부모나 친척들로부터 받은 삶의 형태나 행동양식 등으로 인해 오늘의 내가 있다. 특히 어린 시절에 경험한 상처, 충격 등에 의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형성과정의 예를 들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끝없이 잔소리를 듣고 자란 사람들 중에는 습관적으로 남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는 자들이 많다. 왜냐면 부모의 잔소리에 무의식적인 저항감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에 귀머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건망증도 그렇다. 건망증은 인류의 역사상 최고의 석학으로 꼽는 아인슈타인을 빼놓을 수 없다. 한번은 그가 버스를 탔는데, 차장이 차표를 검사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차표가 없는 것이다! 한참을 뒤지는데, 차장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이슈타인을 알아보고는 그만 됐다고 했다. 그런데도 아인슈타인은 호주머니를 계속 뒤지는 것이다. 이에 차장이 자신의 성의를 무시한다 싶어 괜찮다는데 왜 그러시냐고짜증을 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인슈타인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야 필요 없지만, 나에겐 꼭 있어야 해요. 차표가 있어야 내가 어디서 내려야 하는대 알 것 아니요?”

 

건망증도 심한 압력이나 부담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도피라 할 수 있다.

 

 

4) 그러면 이런 내적 아이는 언제 등장하는가?

 

감정의 자제력을 상실했을 때(홧김에)

가정과 같이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는 상황에서 잘 나타난다(결혼 전후의 모습이나 가정에서 모습과 사회에서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2. 참자기 형성은 어떻게?

 

그러면 내 속에 들어 있는 어린애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성장과정에서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애 같은 모습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어느 정도는 다 상처를 갖고 있고, 잘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조금씩은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상처를 받을 때, 더 이상 그 어린애의 모습이 어른으로 성장을 못해! 그래서 우리 마음 한 구석에 상처 받은 그 모습대로 머물러 있는 것! 고착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이것이 무의식 속에 가라 앉아 있다가, 긴장을 풀거나(주변환경, ) 하면 갑자기 나타나!

이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

 

 

1) 먼저 내 속에 숨겨진 내적 아이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야 한다.

 

방금전 예화 중에서, 왜 아내는 남편을 그토록 의심하고 믿지 못하여 이혼 결심까지 했는가? 그것은 여자가 어려서 받은 아버지에 대한 의심을 남편에게 그대로 던지기 때문이다.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 투사라고 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왜 내가 남편을 그토록 의심하며 정을 주지 못하는지를 모른다.

 

나의 경우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어른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있었다. 난 왜 그렇게도 교수님들이나 선배들과 친해지지 못하는지 몰랐다. 그들 앞에만 서면 두렵고, 말이 떨리고... 자꾸 부딪히게 된다!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니면서도 목사님이나 장로님들과도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아버지는 군인 출신이었다. ‘틈만 나면 사내자식이...’ 하며 자꾸 때리고, 나만 때리는 게 아니다! 종종 아버지는 어머니도 때렸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유사한 다른 남자 어른들에게 투사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른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더욱이 난 초기 나의 아내와의 관계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아내의 잔소리가 죽기보다 싫었다. 아내는 나에게 사랑으로 다가와 이야기하는데도 난 그것들이 다 잔소리로 들린 것이다.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치밀어 올랐다. 이것을 한걸음 뒤로 물러서 나를 보니, 내속에 엄마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이었다. 나만 믿고 나에게 끝없이 집착하시던 어머니의 간섭! 당신이 원하는 것은 기어코 내가 하도록 만드는 그 집념, 그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런데 아내가 비슷하게 하자 난 아내에게 즉각적인 짜증과 분노로 반응한다. 다른 사람들은 별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느냐고 그랬다. 나는 내가 왜 그런지를 몰랐다. 그냥 내 아내가 문제인 것으로 알았다. 그러다보니 이유를 모르고 난 불행하였던 것이다.

 

 

2)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여야 한다.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그들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많이 밖으로 돌아 다녔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사랑을 깨닫게 된거야!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불쌍한 존재구나 하는 생각! 그분들 나름대로 그분의 부모들로부터 또한 받은 상처가 있었고, 그것이 나에게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동안 엉엉 울었다. 그들을 향해 불쌍한 마음, 용서의 마음이 생기니, 나를 꽉 붙잡고 놓지 않던 그 내적 아이가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후로 참으로 마음이 편해지고, 인간관계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마틴 루터 킹은 용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서가 없으면 상처는 거침없이 커져서 우리를 실패와 분노, 비통의 쳇바퀴에 몰아 넣는다. 용서는 신선한 시작, 새로운 출발이 필요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촉매제이다.”

 

미켈란젤로는 자기의 그림을 훼손한 라이벌을 용서하는데 25년이 걸렸다. 그동안 침체의 늪과 우울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드디어 상대를 용서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자유함을 느끼며 새로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복수심, 심판해야 한다는 생각은 결국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오랏줄로 묶는다.

 

 

3) 내 마음 속에 운전수가 큰 꿈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물을 준비해도 간장 종지는 그만큼의 물만 담을 수 있다. 이렇게 조그만 자아상을 가진 자의 심리적 특징이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할 지 몰라!’ ‘다른 사람이 나를 미워할지도 몰라!’ ‘다른 사람이 나를 헐뜯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이 지배할 때 타인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래서 타인 앞에 서면 얼굴이 굳어져. 그러다보니 차갑다, 교만하다, 건방지다라는 등의 오해를 사게 된다. 내 속마음 안 그런데··· 자꾸 눈치가 보이고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자아상은 또한 매우 독선적으로 흐르게 된다.

 

이런 자아상이 큰 자아상으로 바뀌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자아를 안아줄 수 있는 인물을 만나야 한다. 아이가 갓 태어나 생후 6개월 정도까지를 절대적 의존기라 하는데, 이때 어머니는 아기의 모든 응석을 다 받아 준다. 재빨리 아이의 울음소리를 간파하여 배고프구나 하면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알아서 대처 한다. 이 시기 아이는 마술적인 전능 환상 속에 있게 된다. 울면 알아서 먹을 것이 들어온다! 울면 알아서 개운하게 기저귀를 갈아준다! 어머니는 온갖 앙탈을 다 받아준다! 이때 어머니는 아이의 뜻을 재빨리 알아서 처신해야 한다! 이러한 공감 과정을 제대로 거치면 아이는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고, 자아정체성이 제대로 형성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아이는 세상을 의혹의 눈으로 보고, 매사에 의심을 하게 된다. 아무리 울어도 응답이 없을 경우 애들은 재빨리 세상에 적응하는 것부터 배우면서 애늙은이가 된다.

 

이제 생후 6개월이 지나 상대적 의존기에 이르면 점차 현실을 분별, 그리고 어머니는 예전처럼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이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게 된다. 이때 아이는 적절한 좌절감을 맛보면서 건강하게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배운다. 과잉보호는 아이의 성장을 막는다. 어머니는 적절하게 아이가 혼자 있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데, 사사건건 간섭을 하면 아이는 스스로 서지를 못한다. 어머니가 함께 있으면서 혼자 놀 수 있는 여유를 주어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 뭔가에 자꾸 의존하게 된다(이성중독, 일중독, 알콜 중독 등).

 

그런데 이 과정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 성격적인 결함이 생기거나, 신경증, 혹은 정신증으로 발전하게 된다. 평소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도 부담 없는 환경이나 그런 사람을 만나면 완전히 아기처럼 되는 경우가 있다. ? 자신의 미성숙된 마음을 드러내어서 다시금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상대가 어머니처럼 자신을 받아 들여 주고 자신의 앙탈을 수용해주면, 드디어 성격상의 문제, 혹은 정신적인 문제가 해결 받게 된다.

 

중학교 어느 영어 여선생 이야기

자기애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머리도 좋고, 매사에 적극적이라고 인정받는 선생이었다. 그런데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 못했다. 진심으로 타인을 인정 못했다. 친구를 칭찬할 때에도 자기에게 유익할 때만 칭찬을 하였었고 그렇지 않으면 상대가 잘 되는 것을 견디지를 못했다. 그리고 자기 속내를 절대로 드러내질 않았다(감정 표현이 없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지 못했다! ····· 처음 이 여자를 만날 때, 완전히 나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당신이 나를 과연 상담할 수 있을까? 라는 말투로 그냥 호기심 때문에 온 것이니 부담 갖지 말라는 것이다.

예전에 그 어머니가 딸인 자신을 다른 자녀와 비교하면서 무시, 비아냥했다. 지금 그것을 나에게 그대로 재연하는 것이다. 이것을 내가 공감하면서 왜 나를 미워하는지를 해석해주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차도가 있더니만 또 토를 단다. 상담에 늦고 게으름피고, 자꾸 나의 방식이 문제 있다고 시비를 건다. 그녀는 내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을 너무 잘 분석을 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 기분 나쁜 것이다! 그러기를 10개월 동안 상담을 한 후 좋은 성격으로 바뀌었다.

즉 자신의 부족함, 부끄러움, 결함을 다 안아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날 때 사람은 변화된다. 여러분 주위에 그런 분이 있는가?

 

호랑이를 잡은 사냥개 이야기

미국에서 한 재미교포가 큰 호랑이를 잡은 사실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니 실제 공헌자는 사냥개였다. 그 교포가 겨울에 사냥을 즐겨 사냥을 갔는데 개 두 마리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런데 어디서 주인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자동차를 타고 쫓아가보니 사냥개 두 마리가 나무 위를 보고 짖고 있었다. 그래서 나무 밑으로 가보니 바로 위에 사람 키보다 더 큰 호랑이가 밑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다. 어찌나 놀랬는지 재빨리 총을 꺼내 쏘았는데 호랑이가 떨어졌다.

문제는 어떻게 사냥개가 호랑이를 쫓아갔느냐는 것이야. 동물심리학에 의하면 사자 외에 어떤 동물도 호랑이를 보면 으르렁거리다 얼른 도망을 간다. 그런데 이 사냥개에게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학자들이 조사해보니 이 사냥개는 5년 동안 주인과 같이 지냈다. 주인 앞에서는 어떤 짐승도 넘어진 것을 경험했다. 집채 만한 곰도 자기 주인만 있으면 그냥 쓰러졌다. 이것을 본 사냥개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바로 자기들의 주인에게 대한 신념이다! 그 같은 신념이 호랑이를 추적하게 한 것이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이야기

다윗은 이새의 막내(8번째) 아들이다. 사무엘 선지자가 왕이 될 사람을 물색하던 차에 이새의 아들을 선보았다. 첫째(늠름한 모습), 둘째·······그런데 하나님의 싸인이 없었다. 사무엘은 또 없느냐?’ 그러자 이새가 들에서 양치는 막내가 있습니다.’ 아버지 이새도 다윗을 왕의 후보로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점지하셨다. ? 아버지는 다윗을 별로 보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큰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다윗-골리앗의 대결은 큰 자아상이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골리앗에게 승리하였다.

 

저는 아무도 저의 외로움을 안아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아픔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손가락질만 했다. 그 속에서 방황하다가 전 나중에 나의 죄를 안아주는 예수님 만나 변화되었다.

 

누구에게나 상처 받은 자아를 안고 살아간다. 그 자아는 나와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과 나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내속에 있는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새롭게 변화시킬 때 우리는 올바른 관계와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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