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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게 하소서 : 소그룹 공동체로서의 교회 이순태 목사 2012-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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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게 하소서
: 소그룹 공동체로서의 교회

 

로마서 12:2, 요한복음 17:11

 

 

I. 생명운동을 존재의 이유로 삼는 교회의 현 주소!

 

기독교의 핵심이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면, 그 운동은 곧 생명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운동을 주님은 바로 교회에 맡기셨다. 그렇다면 주님으로부터 생명 운동을 위임을 받은 교회는 어찌해야 하나? 먼저 교회 자신이 생명이 넘쳐 나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교회에 생수의 강이 흐르며, 생명력 넘치는 자리가 될 수 있을까?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에 대해 알아 보자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몸,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것은 교회가 본질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유기체는 살아있는 각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 지체들이 제 역할을 해 줘야 그 몸은 건강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생명력의 환희를 맛볼 수 있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을 향해 생명을 얻으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각 지체들은 어떤 형태로 몸을 이루어야 몸이 건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교회에 대해 성경이 전하는 또 하나의 말씀이 있다.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즉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누가 명령하는가? 오직 예수님일 뿐이다. 교회의 어떤 직분도 예수님의 위치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몸인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뜻을 풀어드리는 것 말고는 교회의 존립 목적은 없다. 머리이신 예수님의 뜻을 잘 알고, 각 지체가 그 뜻에 합당하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때, 교회는 건강한 몸이라 할 수 있고, 비로소 생명의 환희를 맛볼 수 있다.

 

)

스티븐 호킹/ 세계적인 물리학자 “A Short History of Time"(시간의 역사)····베스트셀러. 과학책이 베스트셀러 되는 것은 희귀한 일이다. 아주 쉽게 서술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머리 속에 해박한 지식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잘 아는 사람이 쉽게 설명. 그런데 그 사람은 근육무력증이라는 희귀한 병. 근육이 점점 힘이 없어져! 목 한쪽 젖히며 침을 질질 흘리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를 한다. 그 사람의 머리에 엄청난 것이 들어 있는데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뭘 잡으려 하는데 손이 말을 듣지 않아! 걸어야 하는데 발이 말을 듣지 않아! 그때 느낀 것! ! 저게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계층, 학력, 연령, 이념, 지역별로 나라는 사분오열되어 있다. 사회 통합을 견인해야 할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익에만 급급하여,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거나 즐기고 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가? 더불어 사는 삶을 제대로 이끌고 있는가? 불행히도 그 대답은 아니요! 교회 규모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교회 내부적으로 분열과 갈등의 내홍을 겪지 않는 교회가 드물 지경이다. 이런 상황을 직시하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재점검하고자 한다.

 

 

II. 예수님의 고별 기도에 나타난 주님의 뜻!


  ①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은 예수께서 죽음을 앞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마지막 기도이다. 가룟 유다가 떨어져 나가고, 이제 열한 제자만 남았는데, 그들은 여전히 예수 주변에 모여서 누가 큰 자인지, 누가 높은 자인지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그런 제자들을 보면서 주님은 친히 허리를 굽혀 그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겸손해진 후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옆에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 속에는 자신의 가장 깊은 바람, 소망, 꿈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마지막 소원에 특히 귀를 기울이며 들어 주려고 애를 쓴다. 예수께서도 마지막 시간에 우리에게 당신의 중요관심사가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 주셨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 자신의 삶을 쏟아 부으셨다. 이제는 사람에 대한 자신의 투자 전략과 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다. 마지막 밤에 하늘 아버지께 특별히 기도하시는 내용은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선물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 덕에 영광스런 자리를 원했다. 로마가 무너지기를 바랬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께 간구하신 것은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주 하나가 되든, 둘이 되든, 셋이 되든 하나님의 일만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예수님 보시기에는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였다. 예수님을 흠많은 소집단이 놀랍게도 하나 되도록 진심으로 기도하셨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이 기도에서 우리는 두 단어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우리’, 둘째는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III.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 구절에는 우리라는 복수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라고 호칭하신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 6:4절에 의하면,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라고단정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믿는 핵심 교리중 하나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 안에 여럿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즉 복수로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 이것이 성서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지칭한다. 하나님께서는 한분이신데, 그 안에 셋이 계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수용 되었다.그러나 현대인들은 그것에 함축된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신구약 전체에서 단수로 묘사된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함께 활동하신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공동체이시고, 공동체적으로 일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시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에게 삼위일체의 신성이 있다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 피조물 속에 신적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의 형성을 다른 피조물로 구별되는 영혼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흡족한 설명이 될 수는 없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을 여타의 피조물과는 구별된 영적 존재로 만드셨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 속에 공동체 유전자를 집어넣으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만남, 모임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내성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타인과의 사귐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단순히 영적인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만 교회에 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내적으로 누군가와의 유대관계를 필요로 하여 교회에 나온다. 사람들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굳이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교도소의 죄수들/ 문제 일으키면 그에 따른 제재가 있다. 그중에서도 죄수들이 가장 끔찍한 벌로 여기는 것은 독방에 감금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고독에 시달리다 보면, 그 저인이 혼란해지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 자신이 공동체이고, 또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에게서 공동체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하겠다. 결국 구약의 창조 사건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동체를 갈망하는 것! 더불어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는 이점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하나님이면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 삶을 통해서 제시한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예수의 사역 초기 상황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분이 어디를 가시든지 군중들이 몰려 들었다. 그분을 에워싸고 밀고, 귀찮을 정도로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 이런 경우 어떤 사람은 그러한 인기를 이용해서 군중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더 이름을 알리고, 더 많은 군중들을 다룰 전략을 개발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군중들을 가르치시면서, 동시에 그들로부터 자신을 숨기셨다. 마가복음 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예수님은 군중의 간절한 필요를 잘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부분의 시간, 공생애의 90% 이상을 12제자와 함께 보내셨다. 즉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먼저 소수의 사람들을 모으는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소수의 모임인 삼위일체 공동체 안에서 태초부터 계셨다. 그리고 우리처럼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셨을 때, 소수의 제자들을 공동체로 모으셨다.

 

오늘날 우리 문화가 개인주의와 자기를 의지하는 것을 강조하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은혜를 놓치고 있다. 그들은 공동체로 모이지 않고도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공동체로 모이는 것은 선택사항으로 여긴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교인들이 소비형 교인이다. 즉 교회를 레스토랑 정도로 여긴다.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은 자기 입맛에 맞는 곳에 가서 음식을 먹고 가면 그걸로 끝이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와 자기 가족을 살찌우는 일이다. 삶을 변화시키는 공동체는 그들의 안중에도 없다. 물론 이런 식의 신앙은 지옥에는 가지 않게 해줄지는 몰라도, 적어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공동체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의 필요를 위해 섬기는 것이다.

 

 

IV.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우리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가?

하나가 된다는 것’ = 낮아진다는 것, 같아지는 것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으로 이 세상을 이길 수 없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적대하는 자들 앞에서 분열하는 것! 이것은 곧 죽음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우리의 하나 됨, 더불어의 삶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다. 하나 된다는 것, 이것은 교회를 어떤 획일적인 조직으로 묶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온 세계 교회를 한 조직 밑에서 움직이도록 하라는 뜻도 아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됨은 진리로 하나 되는 것이다.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진리로 하나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똑같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모두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하나 될 수 있다.

 

또한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우리 모두는 교회라는 한 몸을 이루는 지체이다. 그 몸이 온전히, 건강히 세워지기 위해서는 각 지체가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교리적인 하나는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 이것이 추상이 아니라, 구체성을 띨 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공동체의 토대는 일차적으로 인간 서로에 대한 생각, 느낌 혹은 감정들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공통된 추구,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이라는 바퀴의 중심축이시다. 우리가 진리와 사랑이신 하나님께 좀더 가까워질 때,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더욱 하나님께로 향할 때, 우리는 좀더 온전하게 함께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공통된 이끌림 때문이다.

저는 요즘 제 속에 다른 사람과 좀 다르게 살겠다는 묘한 욕망이 있음을 감지한다. 이 욕망이 내 삶에 어떤 작용을 해왔는가를 점검해보니, 결국 내가 내 삶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 문화는 개성을 강조한다. 나 자신의 독특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강조 저변에는 나의 삶은 나의 것이라는 주장이 깔려 있다. 즉 삶의 한 가운데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나에게도 유사한 모습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주목을 받고 싶어한다. 뭔가 특이함을 통해서 이야기 거리가 되고 싶어한다. 이전에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믿게 만들만한 그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어한다. 뭔가 남과 다르다는 식으로, 뭔가 선풍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자 한다. 그런 저의 모습에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기 위주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위험천만한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는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남과 다름으로 그 길을 메워버린다.

 

) 헨리 나웬/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영성 신학자! 어느날 그가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해 수도원에 7달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 머물면서 자신 속에 있는 분노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유는 아무도 자기를 몰라주는 것. 노틀담 대학교, 예일대학교, 하바드대학교 교수, 40권 이상의 베스트셀러를 쓴 영성의 대가! 그런데 수도사들 아무도 그에게 별다른 대우를 하지 않는 것! 수도원에서 그는 남다를 것 없이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일해야 한다. 똑같이 수도원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예외가 없다. 그러다보니 난 너와 달라! 라는 자부심이 여지 없이 망가지면서 화가 솟아나는 것! 그러면서 깨달은 것··· 어느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 더 나아가 그속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들과 같아지는 것이구나! 다른 수도사와 같아지는 것/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

그렇다! 우리가 남과 색다르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를 특별히 배려 받을 권리가 전혀 없는 죄인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낮아질 수 있다. 나같은 죄인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음을 깨달을 때,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V. 성령의 역사를 향한 마음 열기

지난 2004년도 우리 교단의 총회 주제인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라는 외침은 우리 안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우리 맘을 열라는 주님 요청의 또 다른 표현이라 생각된다. 기존의 사고의 틀 속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열어 참으로 주님의 뜻이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 교회는 그야말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교회가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소그룹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 안에서 셋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다. 이 땅에 성육하셔서 사역하신 예수님의 사역 방식에 아멘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예수님의 고별기도에서 보여 주신 주님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다. 교회가 소그룹으로 형성되면서 모든 교인들이 어떤 소그룹에든 참여함으로써 나홀로의 신앙이 아니라, 더불어의 신앙을 가질 때 교회는 살아날 것이다. 교회는 참으로 생명력이 넘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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