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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서에 대하여 이순태 목사 201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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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서에 대하여

 

이순태 목사(전주신광교회)

 

I. 욥기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1. 욥기에 대한 설교의 어려움

 

욥기는 설교의 본문으로 택하기가 쉬운 책이 아니다. 설령 욥기의 분문 중에서 설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설교가 욥기의 서막인 1-2, 그리고 종장인 42:7-17에 집중된다. 즉 산문체로 되어 있는 두 부분을 제외하고는 욥기의 설교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욥! 하면 인내하는 자, 고난 가운데서도 범죄하지 않는 자, 그 결과 갑절의 복을 받은 자라는 내용의 교훈으로 전개된다. 그러다보니 욥기에서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은 간과하게 된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왜 욥기 설교가 어려운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욥의 생일에 대한 탄식으로 시작되는 3:1절부터 426절에 나오는 욥과 욥 친구들의 논쟁, 하나님의 응답을 담고 있는 본문은 어느 한 부분만 떼어서 설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전후맥락을 잘 따져서 판단해야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녹록치만은 않다.

둘째로 설교가 쉽지 않은 이유는 욥과 욥의 친구들의 말을 비교해보면, 말 자체만 보아서는 친구들의 말이 더 모범적이고 신앙적으로 들린다(. 8:7; 22:21-30). 이와는 대조적으로 욥은 서막부분만 제쳐놓으면 생일을 저주하는가 하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감히 하나님께 대항하는 오만불손한 반항아처럼 비춰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기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보다 욥이 더 옳게말했다고 평가하신다(42:7). 즉 일반 독자가 느끼는 일반적인 욥기에 대한 인상과 하나님의 평가가 상반되는 것이 욥기 설교자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

셋째로 욥기는 의인의 고난과 관련된 신정론(하나님의 의로움의 문제, theodicy)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떤 특정 본문만으로는 그것에 대한 답을 명확히 얻을 수 없다. 결국 욥기 전체를 통해서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갈 수 있는데 이 과제가 쉬운 것이 아니다.

 

2. 욥기 전체의 구조

서론(산문), 1-2: 의인 욥,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 욥에게 닥친 재난

본론(운문), 3:1-42:6

욥의 독백(3) : 자신의 생일과 하나님의 창조를 저주

욥과 세 친구와의 변론(4-27, 세 번에 걸틴 사이클)

1(4-14) : 엘리바스(4-5) - (6-7)

빌닷(8) - (9-10)

소발(11) - (12-14)

2(15-21) : 엘리바스(15) - (16-17)

빌닷(18) - (19)

소발(20) - (21)

3(22-27) : 엘리바스(22) - (23-24)

빌닷(25) - (26-27)

<소발은 없음>

지혜 찬가(28)

욥의 독백·마지막 탄원(29-31)

엘리후의 발언(32-37)

하나님의 말씀과 욥의 응답(38-42:6)

결론(산문), 42:7-17 : 욥의 회복과 축복

 

대부분 욥에 대한 이해는 의인 욥이 무고한 시험을 당하지만, 경건한 신앙으로 극복하고(1-2), 나중에 하나님께 갑절로 복을 받는다(42:7-17)는 산문체의 줄거리이다. 그러나 욥기의 생명력은 욥의 생일 저주로부터 시작되는 3장에서 42장 욥의 최후의 진술에 이르기까지 펼쳐지는 대서사시에 있다.

 

 

3. 욥기의 해석학적 문제

욥기를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설교 메시지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속적으로 네 개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믿는가?” / 욥기 서론에서 사탄은 욥이 가진 신앙의 동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한다. 즉 하나님께서 여러모로 욥에게 복을 주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욥이 하나님을 믿을 것 같습니까? 이것이 사탄의 주장이다. 사탄의 이러한 이의 제기는 욥기 전체의 화두이며, 우리가 믿는 신앙의 동기, 경건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보상을 바라는 신앙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된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최고의 보상으로 생활하는 자가 참된 경건자이다. 욥기에서는 신명기 사가의 신학이 율법을 따르는 언약공동체의 관점에서 야훼 신앙의 의미를 찾던 것과는 달리, 믿는 자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성에서 야훼 신앙을 새롭게 변혁시키는 신학사상이 발견된다.

 

왜 정당한가?” / 욥과 친구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논쟁이 3번의 사이클을 이루면서 나타난다. 반복되는 듯한 지루한 논쟁으로 인해 지금까지 주석가들과 설교가들은 이 부분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 번의 사이클로 논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욥의 사상에서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 친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가 없다. 세 친구들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교리적 관습을 고수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감는다. 그러나 욥은 소모적으로 보이는 논쟁을 통해 조금씩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욥은 지금 남의 이야기를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427절에서 하나님은 욥의 말이 세 친구의 말보다 옳았다고 판정하신다. 도대체 왜 욥의 말이 친구의 말보다 정당한 것인가?

 

욥은 그의 탄식에서 전통적인 회개의 기도(고통의 원인은 나 자신-하나님께 회개)를 드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죄악이 없음을 주장하며 하나님께 항변. 이런 욥에게 기존의 야훼 신앙에 입각한 친구들의 비난은 당연한 것.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손을 들어 주심. 이 의미는? 삶의 현실과 동떨어진 관습화된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는다. 욥처럼 철저히 실존적인 현실을 정직히 껴안은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부르짖음은 응답된다.

 

무엇을 깨달았는가?” / 하나님께서 욥기 38장 이하에 나타나셔서 폭풍(쎄아라 = 돌개바람) 속에서 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도대체 왜 의로운 자가 고통을 당하며 악인이 번영하는가에 대한 욥의 질문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다. 대신 무섭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반문들이 나온다. 결국 욥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주어지지 않았는데, 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무엇을 깨달았는가?

 

욥은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통해 창조의 질서를 깨달았다. 욥이 처한 개별적 상황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세계의 일반적인 질서는 여전히 운행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욥은 자기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비로소 하나님 세상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왜 갑절의 축복인가?” / 욥기의 후기라 할 수 있는 427-17절을 보면 욥의 인내와 순전함으로 욥은 갑절의 복을 받는다. 물론 욥기의 서론과 결론만 읽으면 어색한 부분이 없다. 그러나 욥기의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욥과 친구들과의 대화를 염두에 두면 갑절의 복을 받는다는 내용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욥기가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기존의 전통적인 지혜인 인과응보적인 개념(상선벌악)이 실생활에서 그대로 적용될 수 없지 않느냐 라는 것이다.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그렇게 도식적인 틀은 잘못이라고 지속적으로 항변하면서 인과응보적 교리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런데 욥기 최종 단계에 이르러 다시금 인과응보적인 개념이 긍정되는 듯한, 갑절의 복을 받는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욥기의 저자는 부정된 인과응보 사상을 결론에서 다시 긍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후기에 나오는 갑절의 축복은 욥의 신앙 회복이 단지 영적 영역에서만 아니라 물질적인 영역, 즉 삶의 모든 영역(영과 육)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은 욥의 선함과 인내에 대한 보상이라기 보다는 욥의 깨달음, 온전히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의 깨달음에 대한 보너스라 할 수 있다.

 

 

II. 설교 메시지의 추적

 

1. 서론(1-2)

 

1) 욥의 반응(1:21-22; 2:10)

사탄의 지적은 신앙인들이라도 자기들의 소유와 생명의 보호망이 제거되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첫 번째 에피소드(재물과 자녀를 잃음)에서 욥은 (욥기 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그런데 두 번째 에피소드(온몸에 악창)에서는 (2:10) "...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여기서는 첫 번째 대답에는 없던 단어가 추가되었다. ‘입술로그렇다면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떤 요동이 없었을까? 그런데 욥기 3장에 나오는 욥의 탄식, 생일에 대한 저주를 보면 그 마음속은 그의 말과는 달리 요동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마 욥은 어떤 면에서 기존의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고수하고자 입술로는 범죄하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2)
아내의 반응(2:9)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이에 대한 욥의 반응은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옛날부터 지금까지 욥의 아내에 대한 주석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욥의 평가를 따르고 있다. 어거스틴은 욥의 아내를 사탄의 협조자라고 부르는 하면, 성 요한 크리소스톰 같은 이는 욥의 고통을 더하게 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욥의 아내를 데려 가지 않으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때로는 그녀에 대한 동조적인 해석들이 있기도 했다. 가령 ‘70인역의 경우, 그녀는 욥과 자신의 괴로움에 대해 깊고도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당신은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버티고 있을 작정이에요? 당신이 이런 처지에서 구원받을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아직도 가지고 계신 거예요 여보 날 좀 보세요. 이제 이 세상에서 당신을 기억해 줄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당신에게는 당신을 기억해 줄 자식도 하나 없어요. 내가 해산의 고통을 겪고 낳은 자식들, 내가 온갖 고생 다 해가면서 키운 자식들, 다 없어졌어요. 당신은 이렇게 바깥 거름더미 위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고, 나는 이곳저곳,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종살이나 하고 있고, 이 지긋지긋한 고된 일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보려는 생각에서 하루 종일 해지기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어요. 제발 주님께 뭐라고 말 좀 하고서 죽어버리세요.”

 

또한 욥의 유언서의 경우에서는 분명히 욥의 아내는 파토스적인 인물로서 남편의 고통에 함께 괴로워하는 자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양자 모두가 욥의 도덕적 우월성을 전제하고 있으나, 욥의 아내는 무고한 자의 고난을 욥보다 먼저 인식했던 자이기도 하다. 다만 그녀의 관습타파적인 말들이 많은 비난을 야기시키기는 했지만, 그 사회의 주변부에 처해 있는 한 여인의 통찰력은 남자의 낡은 자기 만족을 깨뜨리는 자극제가 되었다. 욥의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원망하라고 말하는게 아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토로하라는 것이다.

 

3) 친구들의 일차적인 반응(2:11-13) : 위로자의 모습

이제 막은 바뀌고 다시 새로운 장면이 떠오르고 친구들이 등장한다. 욥의 친구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욥의 소식을 접한다. 엘리바스는 남쪽 에돔에 사는 친구, 빌닷은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그리고 소발은 다메섹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 친구들은 서로간에 삼 사백 km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함께 약속을 하고 욥을 찾아 왔다.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전설에 의하면 욥의 친구들은 왕들인데, 각자 서로 다른 친구들의 화상이 새겨진 나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중 하나가 불행을 당하면 즉시 그 화상이 변했기에, 친구들이 멀리 있으면서도 욥의 재앙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여간 욥의 친구들이 서로 마음을 같이 하는 자들이었고, 욥을 찾게 된 동기는 어디까지나 순수하고 선한 것이었다.

 

이들이 욥을 찾아와 보인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공감이다. 좋은 위로자가 되려면 슬픔 당한 자의 그 슬픔을 나도 느끼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욥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 친구들은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욥을 찾아왔다. 그리고 욥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함께 울었다. 자기들도 욥처럼 옷을 찢고 머리에 먼지를 날리면서 욥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 예수님의 성육신 / 노자의 도덕경에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말이 있다. ‘빛을 고르게 하고 티끌과 함께 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남의 눈에 눈부시도록 광채를 방사하지 않고 그것을 부드럽게 하여서 티끌과 함께 섞여 있다는 것. 참으로 예수님은 남루한 베옷을 입으시면서도 귀한 옥을 가슴에 품고 사셨다. ? 바로 우리 죄인에게 다가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둘째는 침묵이다.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자에게는 적절한 위로의 말을 던지기가 쉽지 않다. 친구들은 욥을 찾아와서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이미 말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11절 마지막 부분에 위로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것은 히브리어 nûd 라는 단어의 번역인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공감의 표시로 몸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위로란 무슨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말을 이리 저리 판단하는 것도 아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 쏟아내는 말에 공감을 표하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어의 위로이다.

 

 

2. 본론(3:1-42:6)

 

1) 친구들의 주장

세 친구들의 논리와 주장 자체는 매우 신앙적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옳다(22:21-30). 그러나 욥기 42:7절에 의하면 세 친구들의 말은 욥의 말보다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의 주장이 상황 인식과는 무관하게 인과응보적 교리에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잠언이나 신명기에 나오는 전통적인 지혜의 핵심은 인과응보적 교리이다.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4:7,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이것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신앙적 틀을 형성하고 있다. 욥의 친구들은 바로 이 틀을 가지고 욥의 상황을 해석하려고 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범한 핵심적인 잘못은 인과응보적 교리를 하나님과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 의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벌을 받는다는 원리를 적용하면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 특히 죄인을 대신하여 고통을 당하는 대속의 사랑이 들어갈 자리는 없게 된다.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을 욥의 친구들이 만났을 때, 그들은 그 제자들에게 예수 십자가에 대해 어떤 설명을 했을까? ‘그분이 능력 많고 훌륭한 분이지만, 무언가 죄가 있으니 그런 것일게다라고 했을 것이다. 결국 인과응보적 교리는 공의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속성의 한 부분이지 하나님 자체는 아니다.

 

한편 욥의 친구들의 입에서 나오는 내용 중에서 참으로 간직하고 싶은 말씀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전체 문맥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얼마든지 인간적인 목적에 의해 왜곡되거나 악용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사용하는 기본 지침을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사랑과 생명을 지향하느냐 라는 것이다.

 

2) 욥의 주장

욥은 1-2장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3장에 이르러서 자신의 생일에 대한 지독한 저주를 퍼부으며 탄식을 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바뀔 수가 있을까? 아마 아내의 태도가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같다고 무시했지만, 적어도 그 아내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한편 욥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와 7일 밤낮을 욥과 함께 침묵하며 애통해 한 친구들의 위로가 욥 자신의 속을 드러내게 했을 것이다.

욥이 부딪친 딜레마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해석을 위해 욥 역시 그 친구들처럼 기존의 인과응보적 틀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기존의 틀 속에 머물면서 그 틀과 자신의 경험을 조화하려다 보니 욥에게는 도저히 해결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구들의 점점 날카로워지는 공격을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었다. 결국 욥은 친구들의 공격에 무관심하게 되면서 점차 그 초점을 하나님께 돌린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19:25-26>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23:10>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욥은 천상 법정 소송을 제기한다(31:35-37).

 

욥이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자신의 고난이 자신의 죄에 대한 댓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처럼 의로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만한 고통을 겪어야 할 죄를 지은 적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욥의 무오성의 주장은 - 욥이 명시한 바는 없지만 - 하나님의 유오성으로 확대될 위험이 항상 있다.

그러면 우리는 욥의 언어, 투박하고 때로는 불경한 듯한 그의 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고통에 처한 자들이 자주 그러하듯이 욥 역시 자기중심성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그들에게 바깥 세상은 의미가 없다. 자신의 무너짐은 곧 세상의 무너짐이 된다. 특히 이런 자들이 쏟아내는 말들은 어떤 이론이나 교리적인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고난의 탄식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관습적인 입술의 고백보다는 정직한 부르짖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의 표출이 더 건강한 신앙인임을 알아야 한다. 시편의 3분의 1이 넘는 시가 바로 탄식시이다. 구약의 시인들은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노출하면서 그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았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요, 나 자신의 감정에 정직해지는 것이다.

 

3) 엘리후의 주장(32-37)

엘리후가 보기에는 욥이나 욥의 친구들 모두 고난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고난의 원인이 죄에 있다, 그렇지 않다를 가지고 논쟁을 했는데, 그들 간의 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고난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엘리후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즉 그는 고난과 질병을 단순히 과거의 행위에 대한 댓가를 넘어서서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와 교육적인 훈련으로 간주한다(참조 이사 38:17, 12:10). 예수의 보혈로 죄가 사해졌다고 해서 고난이 면제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를 자녀답게 하기 위해 고난을 통해서 훈련을 시키신다. 고난에 대한 이같은 긍정적인 눈을 지님으로써 우리는 고난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

 

한편 엘리후는 세 친구와는 달리 욥의 문제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욥은 친구들이 묘사한 그런 죄인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욥이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때문에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욥의 불평은 무엇인가? ‘자신은 깨끗하다, 고난 받을 만한 허물은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를 칠 틈을 찾고 계신다.’ 지금 엘리후가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욥이 자기의 결백을 내세우다가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엘리후는 자연에 나타나는 경이로움(36:27-37:24)을 통해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서 동등한 위치로 서 있을 수 없음을 잘 지적한다. 그러나 엘리후의 주장만으로는 아직 욥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 등장이 필요하다.

 

4) 하나님과 욥의 만남(38:1-42:6)

하나님과 욥의 만남은 욥기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그 만남은 두 번에 걸쳐서 하나님의 말씀과 욥의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38-39/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 40:1-5/ 욥의 첫 번째 응답; 40:6-41/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 42:1-6/ 욥의 두 번째 응답.

인간의 부르짖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응답하시는 장면이 구약성경에는 흔치 않다. 대개의 경우 제사장들이나 예언자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응답하신다. 그런데 욥기에서는 욥의 요구대로 하나님 자신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신다. 더욱이 하나님은 대화하듯 구약 다른 부분에서는 볼 수 없는 긴 말씀을 선포하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출현과 말씀들을 담고 있는 욥기 38-41장은 구약성경 중에서도 가장 흥미진진한 장면으로 손꼽힌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출현과 응답도 그렇지만, 우리로 하여금 더욱 흥분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인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답변하실까 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라는 욥의 질문을 염두에 담고, 4126절에 달하는 하나님의 언설을 읽고 나면, 우리는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대했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왜 욥이 그토록 심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일말의 해결점을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하나님의 질문 공세들만이 귀를 때릴 뿐이다. 마치 동문서답을 듣는 격이다.

 

욥의 질문에 대해 먼저 하나님은 38:2,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히브리어 원문에서는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가 ’(누구냐?)이다. 욥의 질문은 고통받는 이유인 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 질문에 대해 누구냐’(ימ)라고 물으신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오히려 욥에게 대답하라고 독촉하신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이거야말로 혹 떼러갔다가 혹 붙여오는 격이다. 야훼의 반문은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는 것들로 일관되어 있다.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너는 아느냐?” “너는 ···할 수 있느냐?” 욥은 아무런 답변도 얻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 속에 깊이 압도당한다. 그 반문에 욥은 답변을 못하고 고스란히 자신의 무지함과 유한함을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창조 세계의 오묘함을 들은 후의 욥의 반응은 어떤가? 욥의 첫 반응이 40:4-5절에 나온다. 두 가지 내용이다. 하나는 내가 참으로 미천한 존재입니다, 다른 하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손으로 내 입을 가린다라는 표현만으로는 욥의 속내를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욥이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통해서 보여준 전능성에 감동하여 굴복한다는 것인지, 자신이 듣고자 하는 답변을 분명히 제시하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볼멘 소리인지 모호하다. 어쨌든 욥의 소극적인 응답은 하나님께 그리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에 하나님께서 두 번째 말씀(40:6-41:34)을 하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난 후 욥이 보인 두 번째 반응이다.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마치 욥은 자신이 제시한 질문에 대해 답변을 들은 사람처럼, 그래서 큰 깨달음에 이른 듯한 고백을 한다. 도대체 쏟아지는 하나님의 반문을 통해서 욥은 어떤 해답을 얻은 것일까?

 

욥은 답답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질문했다.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받는 것입니까, 좀더 확장해서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그렇게 친절한 답변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해명보다는 네가 누구냐를 물으시면서 새로운 깨달음으로 욥을 인도하신다. 어떤?

 

첫째, 창조세계의 신비를 통해서 욥이 지니는 자기 중심성, 인간중심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창조세계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그대로 구현되는 곳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어떤 가치판단도, 의미 부여도 없다. 거기에는 인간중심적 판단과 전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둘째, 욥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서 신관이 달라졌다. 욥이 고통당하면서 가지고 있던 신관은 전제군주처럼 자기 마음대로 하시는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서, 그의 신관은 피조물을 어두운 길에서도 붙들어 주시며 품고 가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변화되었다.

 

 

3. 결론(42:7-17)

 

1) 하나님의 세 친구들에 대한 책망(42:7) :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 친구에게 화를 내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정당하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욕한 것 아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높이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도 자칫하면 하나님 한 면만을 강조하다 보니 다른 면이 간과될 수도 있다. 욥의 친구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원리로서 인과응보적 시각을 고수했다. 즉 하나님을 인과응보적 틀에 집어 넣은 것이다. , .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 외에도 하나님의 다른 면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죄를 지은 자를 위해서 무한한 사랑을 주시고, 죄지은 당사자 대신에 고통을 당하시기도 하시는 대속의 하나님이다. 친구들은 이 점을 몰랐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마치 다 아는 양 처신했기에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욥의 손을 들어 주셨다. 그렇다면 욥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했나?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기존에 자신이 지니고 있던 교리, 전통으로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안은 채 자신의 실존의 문제를 솔직하게 토로하며 하나님께 나아갔던 욥의 편에 서셨다.

 

2) 욥의 중보(42:8-9) : 친구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수송아지 일곱 마리, 수양 일곱 마리를 가지고 욥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욥은 그들의 부탁대로 행하였다. 인간적으로 볼 때, 욥에게 이처럼 통쾌한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끈덕지게 욥에게 네가 죄가 있어서 그러니 회개하라고 공격했던 친구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는 욥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욥은 그것으로 인해 교만하지 않았다. 본문에 나타나는 욥은 그저 묵묵히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뿐이었다.

 

3) 욥의 회복(42:10) :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욥이 회복되는 시점이다. 욥이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도 그의 상황은 이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여전히 곤경 속에. 그러나 그가 친구들을 위해 기도를 하자 그때서야 욥의 곤경이 갑절의 복으로 변화되었다. 즉 삶의 곤경으로부터 회복에 이르는 첫 단계는 용서다. 사실 친구들이 욥에게 준 상처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러나 욥은 그들을 위해 속죄의 번제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모든 상처를 단번에 날려 버렸다. 이러한 욥의 변화는 그가 하나님과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후로 욥은 사회적, 경제적, 자손과 장수의 복을 누리게 된다.


 

III. 마무리

 

욥기 서론부에 해당하는 1:1-5절과 결론부에 해당하는 42:7-17절을 비교해 보면, 겉모습이 참으로 유사하다. 욥은 경제적으로 큰 재력가요, 가정적으로는 많은 자손들을 얻은 자이며, 종교적으로는 속죄제를 드리는 자이다. 이렇듯 두 본문은 욥의 세계가 완벽하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서론에서 묘사된 욥의 세계는 금방 붕괴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들은 인과응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결론에서 욥에게 새롭게 펼쳐진 세계는 고통을 경험하기 전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는 갑절의 재산을 소유했으며, 딸들에게조차 유산을 상속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또한 단지 자기 자녀들뿐 아니라, 대적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로서 활동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전에 욥은 자신이 애써 둘러 놓은 울타리로 인해 사람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으며 세상에서 왕 같은 삶을 누렸다. 그러나 그런 울타리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에 불과했다. 이제 욥의 삶은 자신의 선행의 댓가로 무엇을 쌓는 삶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 놓인 인생으로 변화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서의 겸손함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아무 지식을 가지고 갈 수도 없으며, 그 어떤 피난처도 만들어낼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상처받기 쉬운 인생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 탕자처럼 집을 나간 것도 아니었다. 특별히 덕이나 선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의 한계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다. 기존의 인과응보의 교리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오직 하나님은 선악을 가려 심판하시는 하나님일 뿐이다. 그러나 폭풍 속에서 말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욥은 인간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자유함을 깨달았다. 인과응보의 틀에 갇힌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 긍휼 베푸실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 일꾼 비유가 나온다. 일꾼에게 일을 시킨 후, 품삯을 주는데, 아침에 온 일꾼이 불평을 한다. 나는 아침부터 일했는데, 왜 늦게 온 사람이나 나나 똑같이 품삯이 일 데나리온 밖에 안되느냐 따지는 품꾼에게 주인은 말한다. 너하고는 한 데나리온 약속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주든 내 것 가지고 내가 주는데 네가 웬 불평이냐? 이 비유가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자유함이다.

욥기가 보여주는 것은 믿는 자가 누리게 될 인과응보적인 보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 신앙영웅의 해피 엔딩도 아니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온전한 관계를 회복한 자가 보너스로 충만한 인생을 누리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하나님의 자유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열려 있는 삶이 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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