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신학

  • 홈 >
  • 목회와 신학 >
  • 말씀과 신학

 

말씀과 신학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질문 이순태 2022-10-02
  • 추천 0
  • 댓글 0
  • 조회 318

http://singwang.onmam.com/bbs/bbsView/9/6152819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질문

 

이순태 목사(전주신광교회)

 

들어가면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네 이름이 무엇이냐?” 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등등.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사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하나님의 촉구이다. 그래서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던지시는 질문들 몇 개를 묵상하면서, 새롭게 결단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1.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숨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 세상의 불행의 원인을 죄에서 찾고 있다. 여러분, 죄가 무엇인가? 죄를 헬라어로 하마르티아라고 한다. 이것은 본래 과녁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났다면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화살인가? 아니다. 과녁인가? 아니다. 잘못은 과녁을 향하여 바르게 겨냥하지 못한 궁수에게 있다. 조준이 잘못되는 한, 수백발을 쏜다고 해도 모두 과녁을 빗나갈 뿐이다. 죄란 이처럼 하나님을 향해 정조준되어야 할 인간의 중심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어긴 아담을 어둠과 사망의 공간에 내버려두기를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먼저 찾아오셨고, 먼저 죄인을 불러 내셨다. “네가 어디 있느냐?하나님은 음지에 숨어 있는 아담을 그가 있어야 할 공간으로 불러내셨다.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 있는 거냐?” 하나님의 이 질문에는 긍휼하신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들어 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에게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 중심, 자기 욕망을 정조준하는 인간에게 무슨 평강이 있겠는가? 바로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주님이 인간에게 행하신 첫 번째 설교내용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417절은 이렇게 한 구절로 압축하고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주님이 인간에게 하신 설교의 첫 단어는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회개란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회개는 단순히 자복과는 다르다. 눈물을 흘리며 자복하는 것은 회개의 시작일 수 있지만 회개 자체는 아니다. 회개는 반드시 삶의 변화를 야기시키는 중심의 이동이 있어야 한다. 중심 이동이 없는 자복은 그저 카타르시스에 불과한 것이다. 회개는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의 자리바꿈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된다.

목회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자칫 목회가 나의 야망의 여정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주님의 택함을 받고, 은혜 속에서 목회자가 되었음을 머리로는 인식하면서도, 마음 다른 부분에서는 나를 성취하고자 하는 야망이 고개를 든다. 어느 정도 목회를 좀 알겠다 싶을 때,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으려는 유혹이다. 하나님의 영광 대신 나의 영광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 조심해야 한다.

 

2.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쫓겨난 후, 아들을 얻었다 : 가인과 아벨. 후에 가인은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 치는 목자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수확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바쳤다. 가인은 땅에서 얻은 곡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 성경 본문 자체만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를 정확히 꼬집어 내기가 어렵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신약성경은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여기서 잠시 생각할 것이 있다. 믿음! 어떤 믿음인가?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된 것에 대해 분노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이 따라와 주실 것을 기대했다. 가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다. 그 마음 중심에 자기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항상 그분의 뜻이 내 뜻보다 옳음을 인정하고 내 삶을 그분께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기대가 무너지자, 그는 분노하였고, 결국엔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자신의 미움과 시기를 다스리지 못할 때, 그 미움과 시기는 더 커져서 살인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시기심(envy)은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미모, 뛰어난 능력을 볼 때 억울하고 화가 나는 심리이다. 상대 앞에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화가 난다. 그래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상대를 파괴하고 싶어진다. 그 사람의 행복과 성공을 파괴하여 불행하게 만들고 싶어진다. 상대의 일이 제대로 안되는 것을 보면 안되었네~” 말을 하면서도 뒤돌아서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것이 시기심이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들로 데리고 가서 죽였고,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던진 두 번째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where are you?). 이것은 아담에게 하나님과 관련된 실존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너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이제 두 번째 질문,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where are your brother?). 이것은 이웃과의 관계성을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가인의 답변은 매우 냉랭하였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예수님은 성경의 최고 계명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함께 말씀하셨다. 그러나 가인의 가치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떼어놓는 것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인의 가치관은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하여 자신의 생명과 유익을 유지하는 가치관이다.

가인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에덴의 동쪽으로 가서 도성(에녹 성)을 지었다. 그는 죄 때문에 잃어버린 복을 도성을 통해서 찾고자 하였다. 가인의 후손들은 각종 도구들, 악기들을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가인은 문명의 조상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면서 문명사회를 구축하였다. 특히 라멕이 부르는 노래(4:23-24)를 보면, 가인의 문화 속에 폭력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결국 가인의 가치관,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라는 가치관은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문명 사회 건설로 확장되었다.

사람은 홀로 서는 존재가 아니다. 정신분석가인 위니캇은 이렇게 말한다. “아기는 없다. 엄마와 아기가 있을 뿐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저절로 자라는가? 아니다. 엄마와의 관계성 속에서 아기의 인격이 형성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관계적 존재이다.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인격은 마지막까지 성장하게 된다.

더욱이 우리는 주님의 사역자로서 함께 부름받고 수련을 쌓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다. 꼭 붙잡고 함께 가야 한다. 주님이 뜻이 있어서 여러분을 한신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셨다. 여러분 스스로 결정한 것 같지만, 그 결정 이면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사역을 이루실 것이다. 내가 하는 것 아니다. 주님이 하신다. 다만 우리는 함께 가는 것이다. 목회는 홀로서기가 아니다. 영웅 놀이가 아니다. 부름받았지만 부족한 종들, 함께 기도하고, 함께 배우고, 함께 아파하며, 함께 기뻐하자!

 

3.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야곱입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12지파를 탄생시킨 조상이다. 그는 애굽의 바로 앞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묘사한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47:9). 야곱은 자신의 삶이 나그네 길이었고, 그 여정은 험악했다고 말한다. 일국의 왕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야곱은 자기 인생을 어두운 그림자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그의 인생이 어떠하였길래 그런 고백을 하는가?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그 의미는 이중적으로 나타난다. 첫째로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아케브)와 관련되어 있다. 야곱이라는 이름이 지니는 둘째 의미는 속이다, 거짓말하다이다. 야곱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배고픈 에서의 약점을 이용하였고, 눈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였다. 또한 야곱은 무척이나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야곱의 삶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 인생은 참으로 험악한 세월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야곱 인생을 안아주는 분이 계셨다. 바로 하나님! 하나님과의 만남은 야곱에겐 그의 삶을 새롭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야곱은 장자권을 가로챈 자신을 죽이겠다고 벼르는 형 에서를 피해 도망을 쳤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가족도, 재물도 없었다. 그런데 그의 곁에 함께 하시는 분이 있었다. 하나님! 야곱은 하란으로 향하는 중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그분의 약속을 받았다. 내가 복을 줄 것이다, 너를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너를 떠나지 않겠다! 하나님의 이 약속을 야곱은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았다.

야곱은 하나님을 또 어디서 만나는가? 얍복강 나루터에서! 20년 만에 고향으로 향하는 야곱이 직면해야 할 대상이 있었다. 바로 형 에서이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집에 가 있는 동안, 에서와 그 자식들은 에돔이라는 강력한 부족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그 에서가 4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야곱에게 온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이때 야곱은 몹시 두려웠다(32:6). 20년 전, 야곱은 자신이 에서인양 행동하면서 장자의 축복을 빼앗았는데, 그로 인해 에서는 야곱을 죽이겠다고 별렀다. 그런데 그 형을 이제 다시 만나는 것이다. 야곱은 에서가 부하들을 이끌고 오는 것은 야곱을 죽이고 모든 재물을 빼앗으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딱히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짜낸 전략은 가족과 가축을 두 떼로 나누는 것이었다. 그리곤 야곱은 맨 뒤로 빠졌다.

그런데 야곱은 얍복강 나루터에서 그를 찾아온 한 낯선 사람의 공격을 받고, 그와 밤을 세워 씨름을 하게 되었다. 밤이 깊어가는 동안, 야곱은 자신이 그 불가사의한 상대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미 그의 허벅지 관절은 어긋나 다리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이제는 씨름이 아니다. 야곱은 그냥 붙잡고 매달리는 것 외에 할 것이 없었다. 하나님은 한순간에 야곱을 거꾸러뜨리실 수도 있다. 그러나 야곱이 씨름을 멈추고, 항복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했다.

이제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 에서가 공격을 해도 도망칠 수가 없다. 더 이상 인간적인 계획이나 꾀가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상황에서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을 때, 그는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하나님! “저는 남의 발뒤꿈치를 붙잡는 사람입니다. 저는 남의 약점을 이용해서 내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속이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새 이름을 주셨다. “이스라엘!” 그 의미에 대해서 창세기 32:28절은 이렇게 설명한다.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제 야곱은 다리를 절며 승리의 면류관을 쓰게 되었다. 하나님께 정복당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을 이긴 사람이 되었다. 그 모습을 창세기 32:31절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비록의 야곱의 몸은 불구가 되었지만, 또한 새 날이 그에게 시작되었다.

야곱은 얍복 강에서 큰 체험을 하였다. 에서와도 감격적인 해후를 하였다. 이제 걱정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잘 풀어지나 싶었다. 그후 야곱은 숙곳이라는 곳에 정착을 하였다. 숙곳은 세겜 근처의 목초지로서, 가축을 기르기에 적당한 곳이라 판단하여 야곱은 그곳에 머물고자 하였다. 20년 전 야곱이 하나님께 굳게 서원했던 곳인 벧엘이 매우 가까이 있었지만, 아직 야곱의 눈에는 벧엘이 보이지 않았다. 땅까지 구입하면서 야곱은 세겜 지역에 상당 기간 정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성을 구경하러 갔다가, 그 성의 추장인 세겜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야곱의 아들들 중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성의 모든 남자들을 죽여 복수를 하였다. 이런 대량 보복행위에 대해 야곱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먼저 야곱은 두려웠다. 대량학살 소문이 퍼지면, 가나안 원주민들이 야곱을 아주 역겨운 존재로 여길 것이며,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이 두려웠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변화를 시도한다. 생각이나 지식의 변화를 위해서 책을 읽고, 세미나에 참석을 한다. 신체의 변화를 위해 다이어트나 운동을 한다. 마음의 변화를 위해 쉼을 갖거나 취미생활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시도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몸의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시도하지만, 몸의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시도에 저항을 한다. 그냥 예전의 익숙함에 머물고자 한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원하면서도 제대로 변화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야곱은 세겜에서 정착하고자 했지만, 결과는 잠시 지나가는 간이역이 되고 말았다. 야곱이 앞으로 어떻게 할까 염려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35:1). 그러자 야곱은 창세기 35:3절에서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야곱은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는가?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야곱은 그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토착 세력의 보복 공격과 추격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다.

야곱은 마침내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을 엘벧엘이라 불렀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고쳐주신다. 창세기 35: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 이것은 얍복강 나루터의 하룻밤 씨름으로 야곱이 철저히 변화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한 번의 열정으로 다 된 것 아니다. 하나님은 긴 시간 반복적으로 우리의 인격을 연단하신다. 정신분석에서는 이것을 ‘working through’(훈습, 혹은 반복훈련)이라고 한다. 즉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는 아직 아니다.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몸으로 그것이 배어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병리적인 것을 이기고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가 이루어진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그렇다. 말로는 옳게 고백한다. 머리로는 교리를 정확히 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고백대로, 그 지식대로 살지 못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지속적인 훈련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리 머리는 알지만, 우리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정작 나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갈 수 있을까? 바로 성령님의 도움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다시금 만나야 한다.

 

4.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지신 질문이 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주저 없이 대답하엿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 후에 주님은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날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제자들이 할 일은, 그리스도이신 주님의 계획을 듣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베드로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마태복음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항변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피티마오인데 그 의미는 꾸짖다, 비난하다이다. 즉 베드로는 주님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주님을 꾸짖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옷을 붙잡고 주님을 힐문하는 그 순간만은, 베드로 자신이 스승이요, 하나님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는 주님에 대해 적확한 고백을 하였지만, 아직 그 고백이 몸에 체화되지는 못했다.

이런 형태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재연되고 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서도, 세상 논리에 머물고 있는가? 오늘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초대교회가 지니고 있었던 주님의 논리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세상의 논리, 성공의 논리로는 더 이상 교회다움을 찾을 수 없다. 십자가 없이 영광과 성공을 추구하는 것은 주님의 방식이 아니다. 바른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우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거듭거듭 주님 앞에 나를 내려놓고, 주님의 능력을 받아 우리의 삶이 거룩하게 되는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한번의 감동으로 되는 것 아니다. 감동은 시간이 가면 식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한다. 물론 그 훈련은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이 함께 우리와 하신다. 또한 여러분 옆에 있는 동역자들이 함께 한다.

 

5. 하나님의 제사장, 그리스도의 일꾼

사사기를 보면,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돈으로 자기 집에 신당을 세우고, 그 안에 신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돈을 들여 여러 제의 기구를 갖추었지만, 하나 빠진 것이 있었다. 바로 제사장이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아 예배를 인도하게 하였다.

그런데 한 레위인이 미가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그 레위인은 거주할 곳을 찾아 헤메는 사람이었다. 미가는 궁여지책으로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지만, 레위인이 아니라는 점이 영 마음에 걸렸는데, 마침 젊은 레위인이 찾아오자 즉석에서 제안을 한다. “당신이 나를 위하여 제사장이 되면,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겠소.” 레위인은 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여 사사기 17:12절의 말씀처럼 미가의 제사장이 되었다. 미가는 레위인을 내 제사장이라고 불렀다. 즉 그 레위인은 미가에 의해 고용된 존재였다.

그후 무장을 한 단지파 사람 6백명이 미가의 집을 에워싸면서 그 집에 있는 신상을 빼앗아 갔다. 그 과정에서 미가의 제사장은 이 강도질을 눈감아 주는 대신, 한 제의를 받는다.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보다는 그래도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우리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라!” 이에 그 레위인은 기꺼이 그 제의를 받아들여 단 지파를 따라 갔다. 이제 그는 개인의 제사장에서 한 지파의 제사장으로 위치가 승격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그럴까?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기뻐하실까? 그러나 제사장이라면, 미가의 제사장도 아니고, 단지파의 제사장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제사장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왕이심을 선포하고, 그분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 따라 살아가는 자! 바로 그것이 제사장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바울 당시 고린도교회 내부는 여러 개의 파벌로 나뉘어져 있었다. 당사자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자기들 나름대로 수장을 세워놓고, 교회 안에서 분열을 조성하였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4:1절에서 분명히 말한다. “오직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라!”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백성을 전하는 상황에 대해 출애굽기 20:2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사역자로 부름받은 자들에게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 만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교회 직분 맡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조용히 만나는 것이다. 그분을 통해서 말씀을 먹는 것이다. 아니 말씀에 먹히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 누구요?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나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요!”

소아정신과 의사인 위니캇은 being(존재) doing(행함)에 있어서 존재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신이 된 자만이 진정 겸손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기가 태어나 엄마로부터 신처럼, 아기 예수가 경배받은 것처럼 존귀하게 사랑을 받게 될 때, 자존감이 형성되고 성인이 되어서 진정으로 겸손한 인격이 된다는 것이다.

신앙도 그렇다. 처음 우리는 존재감으로 신앙을 시작한다. 나 예수 믿어! 나 하나님의 자녀야! 감동한다. 그러면서 현장에서 들어서면서 주변의 요구에 부응하다 보니, 어느새 doing(행함)에 몰두하게 된다. 힘들다! 일 자체보다 더욱 힘든 것은 나의 이런 진심을 교인들이 몰라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우리 안에 불평과 원망이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나된 것 하나님의 은혜! 내가 열심히 수고하며 섬길 수 있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 그렇다. 은혜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바울은 롬 1: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렇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은혜 안에 머무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바로 나는 은혜에 빚진 자라는 의식을 놓지 않는 것이다. 바울이 고후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라고 말씀한다. 여러분, 예수님에게 한번 미쳐 보시지 않겠는가? 한번 왔다 가는 인생!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여러분을 불러 주셨는데, 마음과 몸과 물질을 바치면서 미치지 않겠는가?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히브리적 맥락에서 얼굴 묵상하기 이순태 2022.10.02 0 395
다음글 도시 목회에 대하여 이순태 목사 2012.11.13 0 1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