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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적 맥락에서 얼굴 묵상하기 이순태 202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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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마태복음 6:22-23

제목 / 히브리적 맥락에서 얼굴 묵상하기

설교자/ 이순태 목사(전주신광교회)

 

1. 히브리적 맥락에서 보기

언젠가 WCC에서 발간한 잡지에서 생소한 예수님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입술이 투박하게 나온 흑인 여성이었다. 물론 예수님 상을 그렇게 묘사한 신학적 의미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을 유대인 남성이 아니라 흑인 여성으로 그린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얼굴은 대부분 화가 각각이 속한 문화가 그안에 담겨진다. 그림만이 아니다. 책도 그렇다. 어떤 책은 예수님을 방랑하는 현자의 모습으로 그리는가 하면, 어떤 책은 예수님을 반체제 인사로 묘사한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비즈니스 CEO의 전형으로 보는가 하면, 꿈꾸는 신비주의자로 묘사하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을 포토샵 처리하지 않고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예수님의 말씀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까?

분명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처럼 사셨고, 유대인처럼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랍비로 여겼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데 있어서 유대 사회에 대한 이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도 기독교와 가장 가까운 종교인 유대교와 대화하기를 꺼려왔다. 그 이유는 이방인이 교회에서 압도적 다수가 된 후 신약에 대한 반유대적 이해가 증가하였고, 이런 이해는 후에 반유대주의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많은 그리스도인이 유대적 배경에 관심을 별로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예배드리셨고, 그분의 제자들과 예루살렘의 초대교인은 모두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계속 토라를 공부하였고, 성전에서 예배드렸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의 시대상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실제로 그리스도 전후 수 세기동안 유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문헌들은 적지 않게 존재한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미쉬나’(주전 200경부터 주후 200까지 성문율법에 관한 랍비들의 해설들을 모은 것)탈무드’(미쉬나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한 방대한 책, 주후 400년경-예루살렘 탈무드, 주후 500년경-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있다. 이 두 책은 예수님 시대의 사상적 흐름을 들여다보는데 매우 유익하다. 또한 힐렐과 샴마이 같은 랍비들이 예수님 전후 수십 년간 활동하였다.

그밖에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히브리어의 독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수록된 히브리어 어휘는 총 8천여 개 정도에 불과하다. 이것을 영어 성경은 40만개 단어로 번역하였다. 한글은 토씨까지 한 단어로 보기에 한글성경의 단어는 더욱 많을 것이다. 이 사실은 히브리어의 적은 단어들이 다양한 개념을 함축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욱이 우리 문화에서는 정신적 상태를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히브리어 단어들이 정신적인 것을 넘어 구체적인 물리적 결과까지도 내포하기도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서 우리는 얼굴에 있는 기관들, , , 입에 주목하면서 그와 관련된 단어가 히브리적 맥락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2. , ,

1) /

유대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쉐마의 첫 줄 신명기 6:4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쉐마라는 불리는 것은 신명기 6:4절의 첫 단어가 쉐마, 들으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듣다라는 동사, ‘샤마는 어떤 소리를 지각하는 것 이상의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즉 히브리어에서 듣다라는 것은 듣고 순종으로 행함을 포함한다.

시편에서 다윗은 , 주님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간청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귀머거리거나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힐난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이 들으소서라는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13절에서 천사는 사가랴에게 나타나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들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불임 부부의 간구에 구체적으로 응답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종종 하신 말씀이 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씀의 진의는 무엇인가? 내 가르침을 들었으니 이제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라! 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마가복음 4:9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나님은 땅의 상당부분이 척박하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밭에 파종을 하는 농부와 같다. 그런데 하나님이 파종하는 씨앗은 능력으로 가득 차 있다. 아무리 땅의 여건이 좋지 않을지라도 말씀을 잘 듣는 순종적인 제자 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실로 기적적인 일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신다는 말씀이다.

 

2) /

이미 소천하신 옥한흠 목사님이 생전에 하신 말씀이 있다. 그분이 일본에서 강의를 하실 때, 사랑의 교회 한 장로님을 예로 들면서 그 장로님은 목사 뺨칠 정도로 신앙이 좋으신 분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강연이 끝난 후, 한 일본 목사님이 와서 옥 한흠 목사님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렇게 신앙이 좋은 장로가 왜 목사님의 빰을 때렸습니까?” 통역자가 뺨칠 정도로 신앙이 좋다라는 말을 의역해서 알기 쉽게 했어야 했는데, 고지식하게 그대로 통역을 한 것이다. 그래서 장로가 목사님의 뺨을 친 꼴이 되었다. 모든 언어에는 토착어의 맥락 밖에서는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관용구와 비유가 있다. 그래서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서 뺨의 의미, 치다의 의미를 추적한다고 해도 그 의미는 삼천포로 빠질 뿐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의 흐름을 바로 알려면, 그 문화적 맥락을 알아야 한다. 그런 예를 하나 살펴보겠다.

마태복음 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는가? 그냥 내용 그대로 눈이 좋으면 잘 보일 것이고, 눈이 나쁘면 얼마나 답답하겠느냐? 이런 의미인가? 그렇다면 너무나 당연한 말씀을 주님은 왜 하셨을까?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우리 이마의 중앙에 영을 깨우치는 제 3의 눈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또 어떤 이는 눈이 좋고 나쁨의 차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과 하나가 되었으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이는 예수님께서는 시력의 건강함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며, 우리가 세상을 잘 볼 수 있음에 감사하라는 뜻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진의를 알 수 있을까? 예수님은 2천년 전 유대인 랍비였다. 그렇다면 에 대해 이해하려면, 유대인이 사용하는 관용구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히브리어에서는 을 사용하여 남을 대하는 자세를 설명하는 관용구들이 많다.

좋은 눈은 히브리어로 아인 토바인데, 남의 필요를 살피고 가난한 자에게 넉넉히 베푼다는 뜻이다. 반면 나쁜 눈은 히브리어로 아인 라아인데 욕심이 많고 자기중심적이며 주변의 궁핍을 외면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도 나쁜 눈으로 인색함을 표현하신 적이 있다.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일꾼 비유를 보면,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을 고용한 후, 저물녘에 모든 품꾼들에게 동일한 품삯,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 그러자 일찍 온 품꾼이 불평을 하였다. “일을 한 양이 다른데, 어떻게 품삯이 똑같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내가 너와 한 데나리온 약속을 했지 않느냐? 그러면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에 온 사람에게 얼마를 주든 그것은 내 뜻이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20:15절에서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원문 그대로 표현하면, “너의 눈이 나쁘냐?”여기서 눈이 나쁘냐? 라는 말씀은 내가 선하게 행동하는데, 왜 너는 인색하냐? 그런 뜻이다. 눈과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잠언 28:22,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잠언 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선한 눈, 악한 눈이 지니고 있는 관용적 의미는 오늘날도 유대인 사회에서 그대로 사용된다. 그래서 자선 단체들이 모금을 하러 다닐 때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눈으로 기부하세요

그런데 좋은 눈, 혹은 나쁜 눈을 가졌다는 발상은 히브리어 보다’(라아 rā’āh)의 의미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히브리어에서 보다라는 동사 rā’āh는 그냥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 필요에 부응한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러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데, 이삭이 물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한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22:8). 여기서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동사는 직역하면 보실 것이다이다. 즉 아브라함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보실 것이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거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은 좋은 눈을 가지셨다는 뜻이다.

 

3) /

요즘 TV나 여러 미디어들을 보면, 추악한 말들이 일상이 되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국회의원들의 모임에 욕설이 오가는 경우를 대중매체를 통해서 접하기도 한다. 연예인들의 추문이나 개인적인 내용을 드러내는 프로그램도 있다. 인터넷이나 각종 댓글에는 비수 같은 논평이 차고 넘친다. 이에 대해 야고보서 3:5절의 말씀이 새삼 다가온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오랫동안 유대 랍비들은 혀에 대한 교훈을 다루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5:11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우리의 비난으로 아이의 자존감이 무너질 수도 있고, 뒤에서 소곤거리는 말로 우정이 깨질 수도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는다 하면서도 입에서 나오는 말로 인해 얼마나 자주 넘어지는가? 남에게 말로 상처를 주는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에 대한 비방과 험담에 익숙하다 보면, 어느새 그것들이 우리 행동과 태도에 배여 있어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의식조차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혀를 개선할 수 있을까?

34:12-13,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행복과 장수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 혀를 악에서 금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혀를 악에서 금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히브리어로 라숀 하라라는 말이 있다. “악한 혀라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가십, 비방, 험담을 통칭해서 일컫는 말이다. 근거 없는 비방은 분명 잘못이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상대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라숀 하라악한 혀는 거짓을 말하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에게 피해가 되는 부정적인 진실을 말하는 행위에도 사용된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틀린 얘기 아니잖아! 내가 없는 말 했어?”

그러나 황금률은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 내용이 드러나는게 가슴 아프고 수치스럽다면, 아무리 사실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옮겨서는 안 된다. 어느 날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옷을 벗고 천막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함이 그 모양을 보고 셈과 야벳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전하였다. 그러자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아버지의 몸을 덮어드렸다. 그로 인해 함은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게 된다. 함이 없는 말 지어냈는가? 사실이다. 그러나 남의 허물 드러내며 웃지 말고 덮어 줄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험담을 할까? 주된 이유는 남을 깎아내림으로써 나의 격을 높이려는 욕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에 대한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빌립보서 2: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우리가 진심으로 남을 나처럼 배려한다면, 나의 명예가 귀하듯 타인의 명예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21-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지금 예수님은 혀로 짓는 죄를 살인에 비교하신다. 그만큼 함부로 말하는 것이 큰 죄라는 것이다. 종종 정치인들이 반대쪽 사람들에 대해 이런 저런 비방을 하다가 근거가 없으면 하는 말이 있다. “아님 말고~” 이것은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죄다. 아님 말고가 아니다. 빈 총도 안 맞는 것이 낫다 라는 말이 있다. 근거가 없어도 일단 험담이 흘러나가면, 그 말 때문에 당사자는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정통 유대교에서는 말하기 윤리를 매우 중요하게 가르친다. 유대인 고등학교에서는 쉬미랏 할라숀’(shimirat halashon), 혀 지키기대회를 열기도 한다. 그만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중 특별히 답답함과 조심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판단에 관한 말씀일 것이다. 판단하지 말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죄에 대해 무조건 눈 감으라는 말씀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그래서 판단하는 죄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죄를 걸러낼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판단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온 화두였다. 주전 120년경, “예호슈아 벤 페라키아라는 랍비가 이런 말을 하였다. “각 사람을 그들에게 가중 조절된 저울로 판단하라.” 마음씨 좋은 가게 주인은 저울추 접시가 균형점을 넘어 기울 때까지 덤으로 얹어준다. 그러니까 랍비의 말은 남의 행위를 너그럽게 봐주라는 것, 우호적으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악수를 청하는데, 상대방이 악수를 거절하였다. 건방지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기분이 나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그가 아직 사람 만나는 것이 어색해서 그럴 수도 있고, 혹시 감기가 들어 나를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유대 문화는 수천 년에 걸쳐 남을 우호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기도와 성경 교육만큼이나 중시하였다. 우호적인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면, 좀더 친절하고 오래 참는 사람이 된다. 주변 사람에 대해서 좀더 다정다감해진다. 그런데 어찌 보면 억지 춘향이라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렀는데, 왜 내가 억지로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야 하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해야지 왜 내가 이해하려고 하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상대가 잘못했으니 내가 화를 내고 잘못했다고 지적해야지~ 라는 생각이 해결의 형평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 역시 나의 주관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린 자주 우리의 주관이나 기분, 경험에 따라 잘못된 방식으로 남을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예수님 역시 우호적인 판단에 대해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랍비들과 다른 무엇이 있다. 성경에서 판단과 관련된 동사는 헬라어로 크리노’(krinō), 히브리어로는 ’(dan) ‘샤파트’(shafat)인데, “분별하다, 판단을 내리다, 정죄하다등 여러 의미가 있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분별하다가 될 수도 있고, ‘정죄하다라는 의미도 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판단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분별보다는, ‘정죄의 의미로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잘못을 외면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마태 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만일 누군가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잘못을 범하면 그가 회개하고 용서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를 대면하고 죄에 대해 언급하라고 주님은 가르치신다.

그러면서 또한 마태복음 5: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히브리어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구법을 사용하셨다. 대구법(평행법)은 어떤 한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두 번 이상 비슷한 의미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구법을 발견하면, 차이점이 아니라 그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마태복음 5:22절에서 노하는 자에 상응하는 단어는 라가’(무가치한 자), ‘미련한 놈이다. 그리고 심판에 상응하는 단어는 공회’ ‘지옥불이다. 지금 예수님은 거의 같은 내용을 세 번에 걸쳐 말씀하신 것이다 : ‘분노하고 욕하면 심판을 받는다

예수님은 남을 판단하는 문제, 정죄하는 문제를 강하게 경고하셨다. 화가 나면 보통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와 악수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가 거만하다고 넘겨짚지만 않는다면 화가 나지 않는다. 그럼 언제 화가 나는가? 그 행동이 이기적이고 나쁜 동기가 깔려 있다고 가정할 때이다. 모욕도 그렇다. 어떤 사람을 라가, 즉 무가치한 자(쓸데 없는 놈)이라고 한다든지 미련한 놈이라는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철저히 무시한 것이다. 이런 모욕은 최종 판결과 같은 것으로서, 넌 희망 없는 놈이야, 쓸데 없는 놈이야! 예수님은 이런 판단하는 태도가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시도록 자극한다고 말씀하신다.

유대인 랍비들은 대체로 우호적으로 판단하는 것,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이런 권면은 실제로 효과가 있다. 그런데 이처럼 우호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한 전제가 있다. 즉 사람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이 죄인이고, 나 또한 죄인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타인에 대해 하나님의 정죄를 선포한다면, 이것은 흡사 하나님에게 나도 정죄해달라고 초청장을 내미는 것이나 다름없다.

 

3. 행동으로 구체화되는 사랑

지금까지 귀를 기울이라(들으라), 좋은 눈으로 보라, 악한 혀를 금하라는 교훈을 들었다. 이 모두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을 보여 주고 있다. 히브리어 동사들은 겉으로의 번역만 보면 정신적 활동을 일컫는다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에 상응하는 물리적 결과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즉 히브리어 동사들은 단순히 정신적 활동이 아닌 행동과 효과를 강조한다. ‘믿는다라는 단어 역시 그렇다.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내용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까지는 포함해서 믿는다라고 말한다. 이런 히브리어의 특성이 간과될 때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플라톤을 포함한 헬라 문화에서는 정신 세계를 더 우선으로 간주하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실체는 무가치한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서구문화는 지성은 보물처럼 떠받들면서도 행동은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영향으로 믿음을 내면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초대 교인들에게 나타났다. 이에 대항하여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2:17)이라고 주장한다. 야고보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믿음의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하려는 시도인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으뜸 계명을 질문 받으셨을 때, 하나님 사랑과 더불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자신처럼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높은 목표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레위기 19:18절을 인용하신 것인데 카모카’(like yourself)라는 단어를 네 자신과 같이가 아니라 네 자신과 같은이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도 있다. “네 자신과 같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우리 모두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이다, 동시에 우리 모두 죄를 범한 자들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도토리 키재기이다. 결국 주님의 뜻은 무작정 좋게 생각하라가 아니라, 모두 주님 앞에 죄인임을 알고 서로에게 자비롭게 판단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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