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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공의 운영자 202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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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예레미야22:1-5절 개역개정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에서 이 말을 선언하여

2. 이르기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4.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

5. 그러나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폐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 오늘 본문과 관련된 질문은 다음과 같다.

QT/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의 통치자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고, 무고한 사람이 없도록 공정한 재판을 이끌어, 유다 사회에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평과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이시며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이 실천해야 할 삶의 태도인데, 삶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때에 어떠한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까요?”

 

2. 하버드대학 정치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정의에 대한 관점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정의라고 보는 관점,

둘째, 선택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정의라고 보는 관점,

셋째,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정의라고 보는 관점.

센델 교수는 이 세 가지 모두 정의를 말하기에는 불완전하고 부족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보여주지는 못한다.

한편 팀 켈러목사님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같은 이름의 책에서 성경이 말하는 정의의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녀가시면서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정의가 있는데 왜 우리가 아직도 정의에 대해 말해야 하는가?”

 

성경적 정의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 보여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는 십자가의 사랑이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을 행하는 정의이고, 은혜를 베풂으로 이루는 정의이다. 그런데 오늘날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외치는 사람들은 정의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든 포기하면 온전한 사랑과 정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 사랑과 정의는 함께 가야 한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성전에서 낭독하신 이사야의 글을 통해 밝힌 사명선언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 즉 정의를 이루는 것이라 밝힌다. 이에 근거하여 성경적 정의의 구체적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사람을 법 앞에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성경은 외국인 노동자에게든, 본토인에게든 법을 동일하게 적용하라고 명령한다. 사면하거나 벌을 가할 때에도 종족·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모두 법 앞에 평등하게 대우하고, 뇌물 때문에 편파적으로 재판하지 않는 것이 정의다.

 

둘째, 자신의 소유를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다/ 성경은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각자의 소유에 대한 사용권을 인정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모든 소유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각 사람은 그것을 맡은 청지기일 뿐이다. 언젠가 달란트로 남긴 이윤과 그것의 사용 방식에 대해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받은 것이 많은 자는 더 많이 베푸는 것이 정의다.

 

셋째, 약한 자를 돕는 것이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와 자비를 히브리어로 헤쎄드라고 하는데, 정의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을 동기로 삼아 약자를 돕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취약계층은 고아, 과부, 나그네인데, 오늘날에는 난민, 외국인 노동자, 결손가정 자녀들, 장애인, 노약자들이 우리의 돌봄의 대상이다. 이런 이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단순히 자비나 긍휼이 결여된 것이 아니라, 정의를 파괴하는 것이다.

 

넷째, 어떤 사람의 행위에 합당한 보응이 따르는 것이다/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여 끼친 손해에 대해서 원상 복구하거나, 그에 합당한 배상을 하는 것이 정의다. 최근 일본 핵폐수 해양방류로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 핀란드는 지하 455m에 방폐장을 구축해서 그곳에 핵폐기물을 10만 년동안 가둔다. 핵 사용으로 얻은 유익에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핵폐수의 해양방류를 고집하고 있다. 그것이 훨씬 돈이 덜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을 사용했으면, 그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 정의다.

 

3.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다. 고대 사회에서의 신()들은 힘 있는 왕이나 장군들의 편이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다’(68:4, 5).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한 것이라 말씀하셨다. 우리 주변에 작은 자, 힘 없는 자에게 댓가 없는 사랑을 베풀라! 그것이 바로 성경적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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