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과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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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즐기자 : 향유 이순태 20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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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15:17-32절 개역개정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들어 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은전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 그런데 이 비유들은 서로 밀접히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걸까? 누가복음 151-3절은 주님께서 이 비유들을 말씀하시게 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즉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 왔고 주님은 그들을 기쁨으로 받아주셨다. 그러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불평하며 원망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이 저런 죄인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 이런 불평을 계기로 예수님께서는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즉 주님께서 이 세 비유를 말씀하신 일차적인 대상은 주님께 불평과 원망을 쏟아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 비유들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비유인 잃은 양의 비유는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중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그 한 마리를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발견하였다. 그러자 집에 와서 벗과 이웃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둘째 비유인 잃은 은전의 비유는,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다가 결국 은전을 발견했다. 그러자 벗과 이웃을 불러 말했다. “나와 함께 즐기자!”(9). 셋째 비유인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도 그 맥락은 계속 유지된다. 아버지는 방탕한 생활로 알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배설하였다. 그런데 큰 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 분개하여 집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러자 그에게 아버지가 말씀한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 이 말씀 역시 나와 함께 즐기자라는 또 다른 표현이다.

결국 주님께서는 세 비유를 통해서 복음의 핵심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주님과 함께 즐기는 것이다.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은 베드로에게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누가복음 8:28절을 보면 거라사 지역의 한 귀신이 외쳤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기 전에, 이미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귀신은 구원받지 못한다. 왜 그런가? 예수님을, 복음을 즐거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향한 기쁨이 포함되지 못한 고백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 당시 종교적 전문가들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경 지식은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지 못하고 거리를 두고 불평만 하고 있었다.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조차 주님의 잔치를 즐기지 못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베드로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고, 이 소식은 곧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차적인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사도행전 11:2절을 보면, 교인들은 베드로를 비난하였다. “어떻게 부정한 이방인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느냐?” 성령께서 역사하셨는데도 그 장소가 이방인의 집이라는 점 때문에 그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였다. 무엇이 이처럼 복음이 주는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달리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천국 복음에 진정 기뻐할 수 있을까?

 

2.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분노하였다.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는데,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먹어버린 아들이 돌아오니, 그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어찌 보면 큰 아들의 항변은 충분히 일리가 있어 보인다. 큰 아들은 당시의 가치와 인습에서 볼 때,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착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의 등장, 그리고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의외적인 반응으로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흥청망청 돈을 다 써버린 동생을 비난하였고, 그런 동생을 받아 주는 아버지를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그동안 아버지는 자기에게 너무나 인색하고, 엄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큰 아들의 모습에서 그가 그동안 보인 성실성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욕구를 총족시키고 그 댓가로 동생보다 아버지에게 더 인정받기를 원했다. 큰 아들의 관심사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자기실현이 아니라, 아버지를 통해서 자기에게 유용하다고 여기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의 관심은 존재가 아니라 소유였다. 이런 삶의 방식에서는 참 기쁨과 즐거움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한편 작은 아들은 이제까지 그를 형성한 모든 것을 단절한 뒤,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로 인해 그는 함정에 빠졌다. 만일 그가 자기 아버지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그의 자유를 행사했다면, 그는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 아버지를 떠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인간이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기정체성을 가지려면, 일정 부분 분리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마가렛 말러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유아의 심리적 탄생에 관하여 매우 설득력 있는 이론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처음 아이가 태어나면 아기는 엄마와 자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마치 하나인 것처럼 여긴다. 즉 공생의 단계이다. 그러다가 차츰 분리-개별화 단계를 거치는데, 생후 5-6개월이 되면 아기는 어머니와의 공생적 단계에서 벗어나 엄마와 자신을 구분하며, 점차 걸음마를 통해 엄마로부터 벗어나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때 아기는 전능감을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나아가지만, 이리 넘어지고 저리 부딪치면서 자신이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다시금 엄마에게 돌아오곤 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아이는 점차 독립된 인격체가 된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있지만, 아이들은 그 과정에서 책임감을 배우고, 스스로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진다. 이때 부모의 탄력성이 필요하다. 아이가 부모의 지지를 원할 때는 따뜻하게 받아 주고, 분리를 원할 때는 놓아주어야 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본문의 아버지를 보면 새로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작은 아들이 독립하려 할 때, 그 뜻을 꺾지 않으셨다. 따지거나 아버지의 관점을 내세우려 하지도 않았고, 아들을 길들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부터 요청해서 받은 재산을 들고 집을 나서려 할 때, 아직은 자기 삶을 홀로 꾸려 가기에는 많이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붙잡지 않았다. 억지로 붙잡아 둔다고 해서 그 아들이 아버지와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후 작은 아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가?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집을 떠났지만 그는 망하고 말았다. 나중에는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자 돼지 치는 일을 하였는데, 기근이 닥쳐 와 그것조차 용이하지 않았다. 이런 삶의 벼랑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를 망설이게 하는 것들이 있었다. 아버지를 향한 부끄러움과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의 우려를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 그를 받아 주었다.

그러나 큰 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이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받아들여지고, 잔치를 베풀면서까지 환영받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집 재산 말아먹고 돌아왔는데, 어떻게 기뻐해? 기뻐하는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의 모습에 큰 아들의 속은 뒤집어졌다. 사실 잃은 아들의 비유는 우리를 좀 당황하게 만든다. 그것은 덕과 교양을 갖추고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나름대로 도덕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분개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지시대로 살았지만, 정작 아버지를 몰랐다. 아버지는 재산만 가지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 용서의 가슴을 지니고 있으며, 기쁨을 누릴 줄 아는 분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런 모습이어서는 안 되었다. 오직 큰 아들처럼 착한 아들만 사랑하고, 그렇지 못한 자녀는 배척하는 분이어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큰 아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정말 잘못하고 돌아온 동생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드디어 큰 아들은 아버지를 비난한다. “나에게 염소새끼 한 마리라도 줘서 친구들하고 즐기게 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이같은 불평에서 우리는 큰 아들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아버지를 비난하는 큰 아들의 이면에서 자기애적 성향을 볼 수 있다. 이런 성격은 자기중심적이고, 특별히 타인의 관심 대상이 되는 것을 무척이나 열망한다. 그래서 자기의 욕구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으면 그 잘못을 상대에게 쏟아 붓는다.

 

3. 어떻게 즐길 수 있는가?

누가복음 15장의 핵심은 주님과 함께 즐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 밥상에 함께 앉아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 먼저 함께 즐김을 방해하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 주님과 함께 즐기지 못하고 밖에서 비난만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특성은 무엇인가? 나는 너희들과는 달라! 우리는 의롭지만, 너희는 죄가 많아!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중요한 존재로서 지음 받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존재로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이러한 욕구는 갓 태어난 아이 때부터 절실히 필요한 것인데, 이런 욕구가 적절히 충족되면서 자존감, 자기 정체성이 형성되고, 이것은 삶을 즐겁게 살아가는데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존재의 소중함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 도덕에 지나치게 매달린다. 그것을 통해서라도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여지없이 상대를 비난하면서 반동적으로 자신을 들어올린다. 코헛이라는 심리학자는 이것을 과대 자기라는 용어로 표현하는데, 사실 이것은 자신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여야 한다는 필요가 좌절된 데서 오는 절박한 반응이다.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큰 아들에게서 발견되는 심리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헨리 나웬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영성 신학자 중 하나이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해 수도원에 7달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곳에 머물면서 자기 속에 분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유는 아무도 자기를 몰라준다는 것이다. 그는 노틀담 대학교, 예일 대학교, 하바드 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40권 이상의 베스트셀러를 쓴 영성의 대가다. 그런데 수도사들 아무도 그에게 별다른 대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수도원에서 그는 남과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일해야 했다. 똑같이 수도원 규칙을 준수해야 했다. 예외가 없다. 그러다보니 난 너와 달라! 라는 자부심이 여지 없이 망가지면서 화가 솟아나는 것이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어느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 더 나아가 그 속에서 하나가 되고 함께 즐긴다는 것은 그들과 같아지는 것이구나!

그렇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즐기시기 위해 먼저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 되셨다. 그렇다면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모두 죄인임을 인식할 때, 또한 하나님은 도덕적 우열을 가려 사랑하시는 분이 아님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함께 즐길 수 있다. 주님의 지상 명령,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에서 땅끝은 단순히 공간적인 개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비공간적 대인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인격을 존중히 여기고, 그들과 함께 밥상에 앉는 것 역시 지상 명령의 실천이 아니겠는가? 이런 따뜻한 신앙이 우리 신광교회의 신앙이길 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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