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과 성경

  • 홈 >
  • 목회와 신학 >
  • 심리학과 성경
심리학과 성경
내 아들 압살롬아 : 양가감정 이순태 2023-08-03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27

http://singwang.onmam.com/bbs/bbsView/118/6279192

[성경본문] 사무엘하18:24-33절 개역개정

24.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25. 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26.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27.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30.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 언젠가 이종누님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자식들에게도 말조심해야겠어요.” 무슨 이야기인가 물었더니 이런 내용이다. 그분의 딸이 학교 다닐 때에 그렇게 까다로웠다. 툭 하면 신경질이고, 학교에서 공부 등수가 조금 내려갔다 하면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짜증을 퍼부어댔다. 밥도 제대로 안 먹고 하룻내 우울하다. 그런 일을 수시로 경험하면서 한번은 그분이 화가 나서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꼭 너 닮은 딸 하나 낳아 키워 봐라.” 그 후 딸이 시집가서 서울에 살면서 딸을 낳았다. 그런데 정말 제 엄마를 꼭 닮았다. 학교 성적 순위가 12위 하는데도 조금이라도 순위가 내려갈 것 같으면 예전에 그 아이 엄마가 그런 것처럼 밥도 안 먹고 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그 엄마가 하도 힘들어 친정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것을 보면서 친정 엄마는 이전에 딸에게 어렸을 때 했던 말이 떠올라 후회를 하였다. 정말 말이 씨가 되는구나~. 이처럼 부모의 가슴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미움이 함께 자리하기도 한다.

어릴 적 그렇게 귀엽고 예쁜 자녀들이 어른이 된 뒤로 부모를 잊어버리고 새로 만난 배우자만 생각하는 것을 보면, 부모 마음은 좀 섭섭하다. 잘 키운 자식을 딴 사람에게 빼앗긴 기분이다.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자식들이 부모 마음 몰라 주고 자기들 좋을대로 살면서 부모를 외면하거나 무시할 때, 부모는 여전히 자식을 사랑하지만, 또한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양가감정’(Ambivalence)이라고 한다. ‘양가감정1910년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블로일러’(E. Bleuler)가 처음 소개한 개념인데, 다른 사람이나 사물, 또는 상황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감정과 태도 경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면 어떤 대상에 대하여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을 말한다. 나를 힘들고 괴롭게 하는 사람이 동시에 나에게 사랑을 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우리 마음은 혼란을 느낀다. 그래서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어렵게 된다.

양가감정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느낄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부모에 대해 느낀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자기 엄마 아빠가 최고인 줄 안다. 그래서 부모를 닮고자 한다. 부모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다가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면서 달라진다. 나는 아빠 같은 인생 살고 싶지 않아! 적어도 엄마처럼은 살진 않을 거야! 자녀들이 자라면서 부모에 대해 두 개의 상반된 마음을 가진다. 사랑과 미움, 존경과 경멸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양가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으로 이상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말에도 시원섭섭이라는 말이 있다. 한편으로는 다 털어버려서 개운하고 기분 좋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왠지 미련이 남고 아쉽다는 말이다. 말썽만 피우던 자녀가 결혼하거나 분가해서 독립할 때 부모는 시원섭섭함을 느낀다. 결혼을 앞둔 자녀가 결혼해도 부모를 모시고 살겠다고 하면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손사래를 치지만, 속으로는 그런 자녀가 고맙고 눈물이 날 지경이다. 바로 양가감정이다.

 

2.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다윗의 양가감정을 보게 된다. 사무엘하 18:33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을 하고 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숲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자, 창자를 쥐어 짜는 듯한 통곡을 하였다. 그런데 왜 압살롬이 살해되었는가?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그 와중에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압살롬이 죽임을 하게 된 것이다. 반역자가 죽었느니 다행이다 싶지만, 또한 아들이 죽음이니 슬픔이 가득하였다. 그야말로 다윗의 마음 속에는 두 감정이 회오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상황에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 과정을 살피려면, 11년 전으로 거슬러가야 한다.

11년 전 압살롬의 누이 다말이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압살롬과 배다른 형제인 암논이 다말을 자기 방으로 끌어 들여 성폭행하였다. 암논은 다말을 성폭행한 후, 종을 시켜 다말을 창녀처럼 자기 방에서 끌어내고 문빗장을 잠가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친오빠인 압살롬은 격분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제심을 잃지 않고 누이를 다독이며 상황을 주시하였다.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삼하 13:20). 압살롬은 기다렸다. 이 상황을 아버지 다윗 왕이 알기에 적절히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왕세자인 암논이 이복누이를 성폭행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크게 화를 내었다(삼하 13:21).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다윗은 암논과 다말에게 어떤 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압살롬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압살롬은 냉정하게 사태를 읽어 가면서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2년이 흘러 다말을 성폭행한 사건이 타인의 뇌리에 잊혀질 즈음, 압살롬은 양털을 깎는 축제에 모든 형제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배풀었다. 모두들 먹고 마시고 즐거워할 때, 압살롬은 종들을 시켜 암논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나선, 압살롬은 요단 강을 건너 어머니의 고향인 그술로 도망가, 외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그렇게 3년이 흘러흘렀다. 압살롬이 3년 동안 외지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서 다윗은 압살롬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자 재치 있게 요압 장군이 개입해서 다윗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은 허락하였다. 그러나 압살롬을 만나는 것은 거부하였다. 그래서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2년 동안 부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워해서 오라 할 때는 언제고, 막상 오니까 다시금 미워지고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마 이러한 다윗의 마음에는 매우 복합적인 감정들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압살롬이 멀리 떨어져 있어 보고 싶었는데, 막상 그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니, 암논의 성폭행과 피살 사건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런 기억은 그 이전의 기억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즉 다윗 자신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더 나아가 그녀의 남편까지 죽게 한 사건을 생각나게 했을 것이다. 두 사건 모두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인데, 압살롬을 통해서 이 아픔이 다시 떠오르자 방어 심리로 압살롬을 멀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동기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압살롬이 경험한 것은 아버지 다윗의 냉담과 거절이었다.

압살롬이 원하는 것은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인격적인 용서, 은혜와 자비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사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은혜를 받았다. 그가 밧세바와 간음한 후,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용서를 빌 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용서를 선언하셨다(삼하 12:13). 그러나 정작 다윗 자신은 아들에게 그 은혜와 용서 베풀기를 거부하였다.

아버지와 가까워질 희망이 보이지 않자, 압살롬은 요압 장군에게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으면서도, 아버지 얼굴을 2년 동안 보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 되냐?”고 푸념하였다. 그러자 요압이 다시 중재에 나서서 다윗은 압살롬을 만나게 된다. 사무엘하 14:33절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압살롬이 다윗에게 절을 하고, 다윗은 압살롬에게 입을 맞추었다. 요압 장군의 강권으로 둘이 만나기는 했지만, 아버지도 아들도 자기들의 생각을 서로에게 드러내지 않는 만남이었다. 싸늘하다. 그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압살롬의 마음은 어두워지게 되었다.

이제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반역을 다짐하였다. 이를 위해 4년 동안 압살롬은 자기를 위하여 친위대를 형성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모아 추종세력들을 키워 나갔다. 이제 민심이 자기에게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감지한 압살롬은 드디어 헤브론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면서 순식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다윗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예루살렘 성읍에서 광야로 도망을 쳤다.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난 지 수 일이 지나서 양쪽 군대가 접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때 한 지시를 내렸다.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 18:5). 너그러이 대우하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인 요압 장군은 다윗의 명을 따르지 않고 압살롬을 죽여버렸다. 이 소식을 듣자 다윗은 슬피 울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며 죽었다며 좋았을 것을”(삼하 18:33). 다윗의 눈물에는 그동안 그의 마음에 담겨진 사랑과 미움, 죄책감과 배신감, 후회와 안타까움이 모두 녹아져 있었다.

 

3. 부모와 자식 관계는 애증관계다. 그래서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언제라도 상처를 주고 받는 미움의 관계일 수 있다. 그러기에 서로의 양가감정에 잘 대처함으로써 아름다운 가족으로 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부모와 자녀 간에 존재하는 양가감정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첫째, 동일한 대상에 대해 두 가지 감정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 할지라도 부모에게도 좋고 나쁜 감정이 있다.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려면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 역시 자녀들이 부모를 향해 가지고 있는 마음이 두 가지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유아의 미성숙한 자아는 한 대상 안에 좋음과 나쁨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좋으면 좋은 것이고, 나쁘면 나쁜 것이다. 한 대상 안에 그 둘이 함께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아는 좋은 감정을 유지하고 나쁜 감정을 회피하기 위하여 분열’(splitting)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유아는 어떤 대상을 좋은 대상으로 간주하면, 그에게서 느껴지는 나쁜 감정은 그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으로 생각한다. 유아에게 엄마는 젖을 주고 안아주고 불안을 해결해주는 좋은 대상이다. 그러나 종종 엄마가 실수하거나 유아의 욕구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때 유아가 갖는 나쁜 감정은 그 좋은 엄마가 아니라, 나쁜 엄마로부터 온 것으로 간주한다. 즉 동일한 엄마에게서 좋은 요소, 나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유아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좋은 감정은 좋은 대상에게서, 나쁜 감정은 나쁜 대상에게서 받게 된다고 느끼며 세계를 양극단으로 분열하게 된다. 그러다가 자아가 성숙해지면 좋음과 나쁨이 동일한 대상에서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둘째로, 매사에 긍정적으로 접근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좋음과 나쁨이 있는데, 감정의 순서를 바꿔보는 것이 좋다. 넌 다 좋은데 이게 나빠라고 말하는 것보다, “너는 이것만 바꾸면 완벽한 아들이야!”라고 하는 것이다. 두 개의 감정이 교차할 경우, 좋은 감정을 먼저 말한 후 좋지 않은 감정을 토로해서 쐐기를 박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오히려 좋지 않은 감정을 먼저 순화해서 말한 다음, 좋은 감정을 말하는 것이 더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자식 사랑하는 부모 마음, 부모 사랑하는 자식 마음 다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그래도 서로에 대해 양가감정이 있을 때, 가깝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더욱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로, 항상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안에 가족에 대한 양가감정이 있어 그것으로 괴로운가? 그렇다면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라! 죄 많은 인생을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상대방을 향한 부정적인 판단이나 감정보다는, 주님의 은혜 안에서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를 새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동력임을 기억하자!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 성인 아이 이순태 2023.08.03 0 130
다음글 나와 함께 즐기자 : 향유 이순태 2023.08.03 0 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