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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 성인 아이 이순태 20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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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전서3:1-8절 개역개정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1절에서 교인들을 두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하나는 신령한 자, 다른 하나는 육신에 속한 자이다. 육신에 속한 자에 대해서 바울은 설명을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 ‘어린 아이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육신에 속한 자다라는 표현을 한 것은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이 복음 앞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라면, 그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어느 연륜이 들어 신앙에 있어서 어른이 될 만한 시기가 되었는데도, 계속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어린 아이를 언급할 때의 의도는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안고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며 말씀하신 것과는 다르다. 그와는 달리 아이가 지니는 미성숙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금방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다. 영적인 면에서는 단계가 있기 마련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도 그것을 잘 먹을 수 있도록 젖으로 먹였는데, 그런지가 어느 정도 흘렀으니 이젠 영적으로 컸어야 하는데 아직도 어린 아이 행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다, 어린 아이다 라고 평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린도전서 1:5절 이하를 보면, 고린도 교인들은 탁월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그들은 고린도전서 1:5절을 보면, 모든 언변과 지식에 풍족하였다. 즉 말을 참 논리 있게 잘 하며, 지식에 있어서도 해박하였다. 고린도전서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증거가 그들 중에 견고하였다. 즉 확실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산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고린도전서 1:7절을 보면 고린도 교인들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잘 설명할 줄 알았고, 철학이나 수사학 등에 관한 지식들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확실하였고, 또한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은사들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정도 되는 교인이라면 그야말로 A급이 아닐까? 그런데도 바울은 그들을 육신에 속한 자, 어린 아이라고 부르고 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고린도전서 3: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 어린 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교인들 간에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면 더욱 칭찬하고 격려해야 옳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고린도 교회 내에는 어느 누가 특별히 수고를 하고 열심히 하면, 칭찬은 고사하고 시기심으로 깎아내리려 한다.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하는 사람을 칭찬할 때도 그 칭찬을 견디지를 못한다.

바울이 어린 아이라고 질책하는 또 다른 이유는 교회 안에 분쟁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최고다, 어떤 이는 아볼로가 최고다 하면서 파벌을 만들어 싸우는 것이다. 도대체 교회가 무엇인가? 믿음의 어린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양육해서 성숙하게 만드는 곳이다. 교회에서 아이 신자가 말씀을 받고 성령 충만하여 성숙한 어른이 되는 곳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커야 할 어린 아이가 크지 않으면,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닌가? 신앙 연륜이 붙으면 성장해야 할 교인들이 계속 어린 아이로만 남게 되면, 그것은 교회가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

종종 이런 어린 아이같은 사람들은 교회를 비난하면서 다른 교회로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다른 교회로 간다고 해서 미성숙한 신앙이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기간까지는 그 미성숙함이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리 이동이 아니라, 내가 인격적으로 변화되고 자라나는 것이다. 그래야 교회가 성숙한 교회가 될 수 있다. 교회의 성숙도는 교회 나이가 몇 살이냐, 몇 명이 모이느냐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교회가 성숙한 교회인가? 시기과 분쟁을 버리고 파벌을 떠나 사랑으로 하나되는 공동체이다. 교회가 평안하려면 영적으로 성숙한 어른들이 많아야 한다. 영적으로 미성숙한 아이들이 많고 어른들이 적으면 그 교회는 아주 시끄럽고 분쟁이 끊이지를 않는다.

 

2. 우리는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 부모와 나의 관계는 성인이 된 후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토대가 된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면서 부모와의 관계, 혹은 부모 상호간의 관계를 보며 많은 감정들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부모와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느낌이나 안정감을 얻지 못하고, 수치심과 죄책감, 절망감과 두려움, 소심함과 불안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지나치게 경험하거나 만성적으로 시달릴 때, 이것이 마치 나의 진짜 감정처럼 여겨지게 된다.

유년기에 경험한 정신적 상처는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마치 감당할 수 없는 짐처럼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거나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과거의 결핍을 채우고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성인이 된 이후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작동하곤 한다. 그래서 성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린 아이같은 비합리적 사고나 왜곡된 신념이 자동적으로 반복된다.

가수 거미가 어른 아이라는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착한 아이처럼 말만 잘 들으라 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자꾸 지겨워 해/ 아무리 떼를 써도 차라리 토라져 봐도/ 남자가 주는 이별에 항상 울기만 해.” 성인이 된 여성이 아이처럼 사고하고 행동함으로써 사귀던 남성이 지겨워 떠나자, 여성은 아이처럼 울다가 다시 다른 남성을 사귀면 다시 또 착한 아이처럼 여전히 말을 잘 듣는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어른 아이란 성인아이’(Adult Child)를 가리킨다. 본래 성인아이는 부모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가정에서 자라 성인이 된 사람들을 뜻하는 용어였다. 그러다가 그 의미가 확대되어 부모나 사회로부터 학대를 받거나 가정불화를 겪는 등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함으로써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을 일컫게 되었다.

성인아이는 몸은 어른이지만, 감정 표현은 어린 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어,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성격에 고쳐야 할 부분들이 참 많다. 우리 속에 내재된 아이들, 자라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한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아무리 공부를 해도 더 노력하라고 책망만 받고 자란 아이들은 끊임없이 속에 불만이 있다. 그리고 항상 성취하지 못했다는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 내면에 열등감이 있는 아이가 웅크리고 있다.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부모의 훈계 때문에 속에서 파괴적인 공격성이 형성된 자에게는 분노하는 아이가 숨어 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지나친 과잉 보호나 간섭이 있을 때, 그 내면에 의존적 아이가 눈치를 보며 숨어 있다. 부모와 일찍이 떨어져서 자란 아이들, 혹은 함께 살아도 제대로 부모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 중에는 외로움을 운명처럼 살아간다. 그 안에 외로운 아이가 고개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거부형의 부모 슬하에서 자란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수시로 거절당하는 자신에 대해 자괴감이 깊이 형성되어서 끊임없이 자학을 한다. 그 안에 자학적인 아이가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왜 부정적인 모습을 한 어린 아이들이 우리들의 내면에 있는 것일까? 어린 시절에 감당하지 못할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녹여내지 못할 때 고착’(fixation)이 발생한다. 그래서 몸은 성인이 되었는데도 상처받은 그 마음은 자라지 못한 채 아이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

3.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도, 예언도, 능력도 행했다. 또한 성경에 대해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서 유치한 면을 보았다. 그들은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신령한 방언을 하면서도 남들과 대화할 때는 남의 흉이나 보고 비난하면서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또 그들은 영 분별을 하고, 방언을 통변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어린 아이같이 한쪽 면만 보면서 그것이 전체인양 판단하는 것이다. 하늘의 비밀을 많이 깨닫고 놀라운 말은 하면서도, 전혀 남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매사에 논쟁하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은혜를 받을 때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보면 간단히 넘어갈 것도 따지고 다툰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거듭났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젓하게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볼 때 다 천당갈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속에는 전혀 변하지 않은 자아, 여전히 상처 입은 내면 아이’(inner child)가 그대로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산다고 말하지만, 상처 받은 내면 아이는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깨닫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 안에 있는 내면아이를 치유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경험은 저절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자라서 성인이 되었다고 어린 아이의 일이 낙엽이 지듯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내면아이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첫째로, 과거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나의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위로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한다. ‘상처받은 내면아이란 우리의 정신 속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내 안에 상처받고 웅크리고 있는 나를 의미한다. 우리는 각 발달 단계에서 충족되지 못했거나 감정적으로 힘든 일상이 반복되면서 성인이 될 경우 미처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내면아이에 의해 삶이 지배당하게 된다. 따라서 과거 결핍되고 상처받았던 나의 마음을 깊이 공감하고 자신에게 따뜻한 위로를 스스로 건네주어야 한다. 내가 나를 안아줄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내면아이의 요구에 완전히 부응해주는 현실은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살다보면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우리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다. 하물며 나 아닌 타인이 나의 마음을 온전히 알거나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런 비현실적인 소망을 고수한다고 할 때 우리 마음은 한없이 연약해지고 사소한 일에도 상처받기가 쉽다. 그러나 타인이 나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타인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이 말씀은 사랑의 찬가로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버렸노라라는 단어는 헬라어 카테르게카’(katērgēka)인데, 그 의미는 끊는다, 묶어놓은 것을 풀어 놓다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인간적 지식과 이해, 노력만으로 가능할까? 상처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웅크리고 있는 내면아이를 녹여낼 사랑이 필요하다. 그 사랑은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이 제공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온전하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랑, 이땅에 계시면서 친히 상처를 입으셔서 상처받은 자를 잘 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상처받은 내면아이는 치유될 수 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우리 모두 진정한 어른으로 성숙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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