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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 인지 재구조화 이순태 202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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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45:1-8절 개역개정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1. 우리가 평소에 어떤 기억을 안고 살아가느냐 라는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이 사실은 매우 복합적이다. 심리학자인 티안 데이튼은 기억에 세 종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명시적 기억’(explicit memory)이다/ 이것은 완전하게 의식하고 있는 기억으로서, 기억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이런 명시적인 기억에 중점을 두고 있다.

둘째는 암묵적 기억’(implicit memory)이다/ 이것은 의식하지 못하는 기억인데, 그렇지만 사고, 감정, 행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대부분의 상업 광고는 암묵적 기억 원리에 입각해서 제작된다. 우리가 쇼핑을 할 때 암묵적 기억 속에 저장된 광고 속 이미지의 영향을 받아 광고에서 무심코 보았던 물건을 사게 된다.

셋째는 감각적 기억’(sensory memory)이다/ 이것은 오감을 통하여 주변 세상을 지각하면서 얻어지는 기억이다. 감각적 기억은 의식적인 집중이 필요치 않다. 감각적 기억은 자동적으로 정보를 선택하고 단기 기억으로 저장된다. 트라우마를 받을 때 사고를 담당하는 뇌 부위는 기능이 막혀 작동을 잘 못하지만, 감각적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는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즉 몸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기억을 방대한 자료의 모음이라고 생각하지만, 흥미롭게도 거의 모든 기억은 사실 재구성된 것이다. 즉 기억이란 고정된 기록을 단순히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뇌에 저장된 정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병행 처리되면서 재구성된 것이다.

심리치료 과정에서 과거의 경험을 재구성하도록 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어린 시절의 상황을 마음 속으로 혹은 역할극을 통해 재연하면서, 어른의 눈으로 그 상황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똑같은 상황을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된다. 결국 기억의 재구조화를 통해서 새롭게 정신 구조가 형성되고, 그러면서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기억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중요한 사건을 회상하고 그 속에 담겨진 부정적 정서, 억압된 감정에 직면하면서 그것을 재해석하여, 똑같은 상황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어렸을 때의 기억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다시 자극된다. 성인이 되어 아이를 낳고 가족을 부양하게 될 때 어린 시절의 경험이 떠오르게 되는데, 이것을 점화경험이라고 한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것 자체가 치유의 한 과정이다. 회복의 과정에서 우리는 잊어버렸던 것을 다시 기억한다. 그 과정에서 잠시이지만 다시 고통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주변의 안정적인 지지를 통해서 고통을 재경험하는 과정을 견딘다면 마음의 치유를 얻을 수 있다.

 

2. 우리는 이처럼 기억이 재구조화되는 모습을 요셉에게서 찾을 수 있다. 어린 시절 야곱의 편애 속에서 자랐던 요셉은 형들과 갈등하게 된다. 형제들 간에 이루어지는 갈등과 경쟁은 흔히 가족 안에서 부모의 애정이나 인정을 두고 벌어진다.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부모 사랑도 자녀에게 쏟을 수 있는 관심의 양과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다. 한정된 자원을 나눠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자기 몫에 만족하지 못할 때 바로 형제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요셉은 형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귀한 집 아들이 애굽까지 끌려가서 노예가 되고 말았다. 보디발의 아내를 희롱했다는 혐의를 받고 억울하게 많은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요셉은 그처럼 불행할 수 있는 인생의 조건과 환경에 있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요셉은 상황을 넘어 소망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후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을 넉넉하게 가졌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을 누리던 요셉에게 어느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곡식이 풍족한 애굽까지 와 곡식을 사려고 들이닥친 형들로 인해 요셉의 마음에 평안이 사라졌다. 심기가 불편해졌다. 자신의 인생에 그토록 아픔을 주었던 형들을 용서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보복을 하는 것 역시 적절치 않았다. ? 적어도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들이 쌀을 사러 애굽에 와서 자신을 몰라본 채 그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궁금한 것이 있었다. 과연 형들이 과거의 일을 제대로 정리하고 손 잡고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들인가?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몇 가지 일을 만들어 형들을 테스트했다. 그냥 만남이 아니라,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 서로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 간첩혐의를 덧씌운다. “너희는 정탐꾼들이다.” 요셉의 형들은 애굽 땅에 아무런 배경이 없기에, 오직 자신들의 가족 사항을 자세히 말함으로써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요셉은 가나안 땅 집에 있다는 막내를 데리고 와서 결백을 입증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래서 시므온이 애굽에 볼모로 잡힌 채, 아홉 형제들은 곡식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도중에 곡식 자루를 열어보니 자신들이 지불한 곡식값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꼼짝없이 도둑으로 몰릴 판이었다.

그후 사 온 곡식이 다 떨어지자 야곱의 양해를 간신히 받아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을 방문하였다. 간첩혐의는 벗겨졌으니, 이제 무사히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길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귀가하는 중에 베냐민의 자루에서 요셉의 은잔이 발견이 되었다. 물론 사전에 요셉이 꾸민 것이기는 하지만, 꼼짝없이 베냐민이 도둑의 누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자 유다가 나서서 탄원하였다.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슬픔으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제가 대신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20년 만에 만난 형들은 과거의 형들이 아니었다. 기꺼이 다른 형제를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형들의 변화된 모습에 감격한 요셉은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변의 호위병과 신하들을 다 물러가게 하곤, 큰 소리로 울며 형들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당신들이 애굽에 판 그 동생입니다.이때 형들은 반가워하기보다는 두려워서 떨었다. 20여년 전에 그렇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동생의 부르짖음을 외면하고 이방의 상인들에게 팔아 버렸는데, 그 동생이 지금 애굽의 권력자가 되어 자기들 앞에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형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 잡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요셉은 반가움으로 형들을 불렀지만, 형들은 그 반가움을 그대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자 창세기 45:5절에서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말한다. 요셉은 분명 형들에 의해 팔려 애굽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머슴살이, 감옥살이까지 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거짓으로 만들어낸 것 아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면, 요셉은 두 가지의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형들에 행한 죄에 대해 톡톡히 그 값을 치루게 하는 것이다. 즉 상응하는 벌과 고통을 형들에게 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형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용서해주는 것이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 앞으로는 배은망덕하지 말아! 이 두 방법 모두 요셉이 사실에 근거해서 처신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 둘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형들에게 벌을 주든 용서를 하든 요셉이 주어가 된다는 것이다. 즉 요셉이 여전히 형들 위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상하 관계에서 참된 화해와 소통은 어렵게 된다.

요셉은 이 두 방법이 아니라 세 번째 방법을 사용해서 문제를 처리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을 주어로 삼는 것이다. 하나님께 이 모든 것을 이루셨다! 요셉이 노예로 팔리고 감옥살이를 하고, 애굽의 총리가 된 모든 과정이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비적 조처라고 요셉은 해석한 것이다. 창세기 45:8절에서 요셉은 거듭 이렇게 말한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다. 요셉은 고난 앞에서 원망과 불평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요셉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장해갔다.

요셉은 아프고 힘들었던 이제까지의 여정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발견하였다. 성경은 요셉의 이야기에서 이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노예로 팔려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 창세기 39:2절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고 말씀한다. 그런가 하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창세기 39: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라고 되어 있다. 상황은 점점 절망적이다. 그러나 성경이 거듭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 곧 임마누엘의 신앙이다. 그래서 요셉은 노예로 살아야 했던 비참한 시간에도, 감옥에 갇혀 있었던 절망의 시간에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요셉은 고백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신앙은 이런 임마누엘 신앙에서 점차 섭리 신앙으로 발전한다. 섭리 신앙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분이 내 삶을 다스리고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신앙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은 사실 주권 이양이다. 내가 쥐고 있던 주권을 하나님께로 옮겨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을 때,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고 답답한 일도 있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고백할 수 있다.

 

3. 요셉의 아름다움은 그가 성공한 권력자였다는 데에 있지 않다. 노예 출신이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의 인물이라는 데에 있지 않다. 그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섭리 앞에 순복할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데에 있다. 요셉이 노예로 팔리고, 감옥에 갇히면서 젊은 날을 허비하는 것 같았지만, 그 모든 이면에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사실을 요셉은 깨달았다. 그러면서 요셉은 그가 형들로부터 당한 20여년 전 아픔의 기억을 하나님의 섭리 신앙 안에서 재구성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뛰어넘어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였으며, 형제들 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차단되고 억압되었던 자기를 만나게 될 때, 친밀한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고통을 차단하지 않을 때, 그것에 직면하고 재구성할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행복은 반드시 삶의 조건이나 그것에 대한 마음 자세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삶의 조건을 갖추었어도, 또 그것을 누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진정한 행복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을 위해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도, 그 행복감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신앙이란 무엇일까?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내 뜻과 내 계획을 내려놓는 것이다. 요셉은 지금 자신이 남부러울 것 없이 살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 복을 주신 이유가 형제들과 나누게 하시려는 것, 생명을 살리기 위함인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요셉의 말에서 거듭 거듭 나오는 단어가 무엇인가? 하나님! 이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 나를 세우신 분도 하나님! 힘들고 어려운 길목에도 나를 도우신 분,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송이 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 저에게도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시골 논두렁에 버려질 인생, 공사판에 묻혀버릴 수도 있는 인생이었다. 그런 사실 자체만으로만 판단하면 원망과 섭섭함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그분의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딴 길로 가려 할 때 매를 때리면서 방향 조정을 하셨다. 그 모든 것이 은혜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섭리 신앙으로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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