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담과 하와 | 이순태 목사 | 2012-04-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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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담과 하와 말씀 / 창세기 1:1-3:24 I. 마음의 행복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성공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을 분석하며 산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렇게 우울하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그 답을 찾으려 한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편하고 자유롭고 행복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 관해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 마음 나도 몰라!’ 이다. 내가 어떤 일을 다짐하고 결단한다고 해서 실제로 내 마음이 그 방향으로 가는 것만은 아니다. 즉 우리 마음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과는 대비되는, ‘무의식’이라 부른다. 자기 마음이면서도 자기가 모르는 마음이 무의식이다. 우리가 의식하는 것은 무의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자신을 이해하는 영역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무의식까지 나아가야 한다. 1) 또 다른 내가 있다 2006년 1월 동아일보가 코리아 리서치, 인제대 서울 백병원과 함께 직장인의 행복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난 것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비슷한 시기에 삼성전자가 대리급 직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조직 내 인간관계 갈등’이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든 점 1위였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인간관계에 관한 책 한두 권쯤은 다 갖고 있다. 1936년 출간된 ‘데일 카네기’가 지은 “인간관계론”은 전세계적으로 3천만부가 팔렸으며, 70년이 지난 지금도 새로운 번역과 장정으로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카네기를 비롯한 여러 현자들이 이야기하는 인간관계론의 핵심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 “다른 사람의 얘기를 진심으로 경청하라, 상대방과 논쟁해 이기려 하지 마라, 상대방을 비난하지 말고 진심으로 칭찬하라.” 가정이나 직장에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좋은 관계를 맺어가는데 꼭 필요한 지혜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책에 소개된 방법을 적용해 자신의 대인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인간관계가 개선되고, 행복한 관계를 만끽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머리로는 아는데 실생활에서는 생각대로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다. 속으로는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오히려 사람들과 불화를 일으켜 트러블 메이커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조차 알고 보면 인간관계 때문에 남몰래 고통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관계가 어려운 것은 우리가 인간관계의 처세술을 몰라서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아는 만큼 실행하기가 어려운데 더 큰 이유가 있다. 즉 인간관계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과 지식으로 좌우되지 않는 또 다른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머리로는 잘 해보려 해도 우리 내면은 정반대로 간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그것을 ‘유년기의 상처,’ ‘심리적 갈등,’ ‘마음속의 아이,’ ‘내면의 아이’ ‘쓴 뿌리’ 등으로 표현한다. 바로 이런 직면해야 한다.
2) 나르시스의 가치관과 성서 그리스 신화를 보면, 나르시스(Narcissus) 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강의 요정인 리리오페가 강의 신인 케피소스에게 강간을 당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가 바로 나르시스이다. 그의 어머니 리리오페는 예언자인 티레시아스를 찾아가 자기 아들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자 티레시아스는 나르시스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한,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을 한다. 그 예언으로 인해, 나르시스는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닫혀 진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나르시스는 매우 잘 생겨서, 남녀를 막론하고 그에게 반한 사람들이 수시로 그를 찾았다. 그렇지만 나르시스는 그들 모두를 비웃듯 숲속에서 은둔하여 혼자 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어느 날 그가 맑은 연못에 가서 그 안을 들여다보는데, 정말 멋있는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는 그 모습이 자신인 줄도 모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실물처럼 보이는 연못속의 모습에 점차 사로잡혀서, 강박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자기 모습만 바라보다가 죽게 되었다. 나르시스는 다른 대상과 관계 맺는 것을 몰랐다. 그것은 또한 자기 자신과도 제대로 직면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의미가 된다. 그 결과 정서적으로 발달하지 못했고, 성장할 수도 없었다. 나르시스에게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다. 성경은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을 때,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그 인물들을 수 천년 전 역사속의 인물로만 간주한다면, 우리는 그 속에 담겨진 참으로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인물들을 통해서 나를 돌아보고,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를 바로 볼 수 있는 자만이 성숙할 수 있고, 하나님과 이웃을 바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속에 나오는 군상들을 살펴 봄으로써, 우리 자신을 바로 보고자 한다. 어느 신학자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 모두 앞으로 만나게 될 여러 성경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만날 수 있기를! II.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 1) 아담 ① 흙/ 먼저 아담이라는 이름은 ‘아다마’에서 나온 것인데, 그 뜻은 ‘흙’이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지으셨다. 그래서 사람을 짓기 전에 하늘과 땅, 그 안에 온갖 것들을 만드셨다. 땅은 사람을 위해 준비되었고, 사람은 땅을 사용하고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이 그가 사용해야 할 그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시편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어느 누구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아무리 유명해도, 하나님에게는 여전히 그 이름은 아담, 곧 흙일뿐이다. ② 하나님의 생기/ 그런데 흙이 인간의 전부는 아니다. 그의 본질적인 생명은 사람의 모습으로 만든 그 흙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즉 인간은 흙과 동일시되는 육체적인 몸과, 하늘에서 온 영적 본질이 독특하게 결합되어 있다. 만일 하나님을 배제시키면, 아담은 단순히 하나의 동물일 뿐이다. 아무리 지식적으로 뛰어나도 말이다. ‘로이 채프만 앤드류스’(Roy Chapman Andrews)는 사람을 ‘가능성을 가진 원숭이’라고 규정.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왜 그런 가능성들이 있는지, 그 가능성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은 동물과 다른 존재도 아니고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말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비교할 때,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고, 그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인가? 아니다! 하류 동물에게는 생활사가 있지만, 인간에게는 역사가 있다. 우리는 ‘꿀벌의 생애’라는 제목의 책을 쓸 수 있다. 그것은 한 마리의 꿀벌의 생애는 다른 꿀벌의 생애와 거의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애’라는 책을 쓸 수는 없다. 왜? 각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독특한 개인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차별성을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③ 하나님의 형상/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 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분명히 언급된 부분이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형상이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이 있다. 그것은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고대 세계에서는 위대한 지배자들이 잘 보이는 곳에 종종 자신의 동상을 세우곤 했다. 그것은 자국보다는 자국 바깥의 영토나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웠다. 예를 들면 로마 황제들의 동상은 이탈리아나 로마보다는 그리스나 터키, 이집트에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된다. 한 황제가 복속된 영토에 자신의 형상을 세우는 이유는 자신이 통치자이므로, 그에 부합하게 처신하라는 사실을 그 땅의 백성들에게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세상을 사랑하셔서 최선을 다해 그 세상을 돌보기를 원하셨다. 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세상을 돌볼 피조물을 그 가운데 세우셨다. 그래서 그 피조물은 창조세계를 향하여 창조주가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며, 창조세계가 발전하고 번영하게 만들어 창조세계의 목적을 달성하는 일을 감당해야 했다. 2) 하와 ① 돕는 배필/ 아담의 삶에 대해서 창 2:19-20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들 중에는 자신에게 적합한 배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담은 자연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여전히 자신의 일에 만족이 없었고, 외로움을 달랠 위안이 없었다. 그 어떤 동물도 그에게는 의미 있는 동료가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최초의 여자 하와가 만들어지게 된다. 여기서 하와를 ‘돕는 배필’이라고 부른다. ‘돕다’라는 말은 가치가 덜하거나 지위가 낮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시는 분인데, 그렇다고 그분이 인간 이하의 존재인가? 바울은 고전 11: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 언뜻 보면, 여자가 남자보다 하급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 ‘드와이트 허비 스몰’박사는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한다.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여자에게 초라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만이 그를 채워 줄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은 그녀에게 영광이 된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여자 없이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이 남자에게 초라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여자가 그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영광이 된다.” ② 옆구리/ 창 2:21-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흙으로 지으셨고, 그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야 했다. 그러나 여자는 아담의 살아 있는 조직, 옆구리의 일부로 만드셨다. 이에 대해서 성경주석가인 매튜 헨리는 이렇게 말한다. “남자는 정제된 흙이다. 그러나 여자는 두 배로 정제된 흙이다.” 또한 여자가 남자의 옆구리에서 만들어졋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남자를 다스리거나 남자에게 짓밟히도록 남자의 머리나 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대신 남자와 대등하고 그의 팔 아래서 보호받도록 그리고 그의 사랑을 받도록 그의 가슴에서 가까운 옆구리로 만들어졌다.” ··· 결혼 생활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보충해주고 서로를 섬기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서로를 더욱 필요로 하게 되고, 더욱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아담은 에덴이라는 동산에서 땅을 경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아내와 함께 복을 누렸다. 창 2:23절, “내 뼈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III. 타락과 그 이후 1) 죄의 속성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불순종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것은 다 자유로 먹되, 한 나무(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 이유는? 그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고 선악을 알게 된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서! 바로 이것이 최초의 인간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의 속성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 그래서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① 방어 : 범죄후,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찾으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 이것은 공간적인 질문이 아니라, 실존적인 질문이다. 넌 지금 어느 형편에 있는 것이냐?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다가오심을 두려워하여 피하여 숨었다. 아담은 대답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사실 아담은 이 시점에서 벌거벗은 것은 아니엇다. 무화과나무 잎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인해 자신의 문제에 직면할 수 없는 무력감을 드러냈다. *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Where are you?) 유년기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인격의 일부분이 미숙한 채로 성인에게도 남아 있게 된다. 이 철들지 못한 부분으로 인해 자신도 고통을 받지만, 주변사람들도 괴롭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플랭클은 이런 말을 한다. “사람들과 인사할 때 ‘어떻게 지내십니까?’(How are you?)라고 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Where are you?)라고 묻는 것이다.” 여기서 ‘어디에?’라는 것은 전주나 김제 같은 공간적 장소가 아니라, 심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실제 현실에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유아기에 형성된 ‘심리적 상처’에서 멈추어 있는지를 물어보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과거의 경험들이 만들어 놓은 유아적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래서 우리 속에 들어 있는 ‘마음속의 아이’로 인해 우리는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때로는 어떤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렇지도 않은데,자신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분노나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어떤 때는 나이가 들었는데도 아이처럼 화가 나고 아이처럼 서럽다. 아이가 엄마의 눈치를 살피듯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초조해한다. 어떤 사람은 아니오! 라는 말을 못하여 매우 순종형 인간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분노로 가득 차 있다. 매사에 의심부터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난 체 하여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남의 비위를 항상 맞추면서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과 사귀기는 하지만 누구에게도 깊이 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굉장히 활발한 것 같지만, 혼자 있으면 견딜 수 없는 외로움에 어쩔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이성간의 친구로 사귀다가 사랑이 느껴지면 도망가는 사람이 있다. 사랑하면 결국에 다 불행할거야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일까? 죄! 이 죄에 대해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방어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아담은 하나님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창 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 아담은 여기서 여자뿐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비난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 여자를 주셨기에, 그 여자가 그 열매를 주었기에! 차라리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화해를 구하여야 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아내를 보호하여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그 두 가지중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하와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뱀에게 책임을 돌렸다. 같은 뼈요, 같은 살이던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향해 화를 내고 원망했다. 그것은 곧 자신을 향한 분노와 비난이었다. ② 관계의 단절 및 왜곡 :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아담, 아담과 하와의 관계에 본질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상대를 평가하고, 자연을 통치하기보다는 탐욕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었고, 사람은 자연에 대한 통치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방식 대신에 자신의 방식대로 살고자 했다. 여기서 인간은 갈등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하나님 없이는 참 만족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한편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고 한다. 이에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간파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게 될 때까지 우리 마음은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피하고 싶어 하는 죄의 속성을 우리에게 물려 주었다. 한편 아담과 하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타락의 결과로 남녀간에 상하구조가 형성되었다. ③ 범죄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몸과 마음, 의지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와 열정은 죄로 오염되어, 그 결과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과학적 지식은 가속도로 발전한다. 해충을 죽이기 위해 살충제를 만들었다. 그것의 결과는 비참하다. 물이 오염되어 물고기가 감염되고, 사람에게 전달되어 암을 일으키고, 땅들이 죽어간다. 한 가지를 해결하면, 두 세가지 이상의 문제점들이 따라온다. 이런 역설과 모순, 갈등을 어떻게 해결? 여기서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다. IV. 새로운 길 1)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개입은 어떤 식으로?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안에 사람들을 더 온전히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아담에게 하나님은 창 3:17절에서 말씀하신다.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의 노동은 한층 더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노동을 통해서 여전히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또한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게 하셨다. 하와 = 생명. 이제 하와는 아이를 임신하고 양육하며 아이가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2) 또한 하나님은 큰 구원의 청사진을 말씀하신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탄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이제 여자는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는 일을 돕게 된다.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사탄을 밟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창 3:15절/ 구세주가 인간이 되실 것, 창 12:1-3절/ 구세주가 유대인이 될 것, 창 49:10절/ 구세주가 유다의 지파에서 나오게 될 것, 삼하 7:12-16/ 구세주가 유다지파중 다윗에게서 나오게 될 것, 미가 5:2/ 구세주는 다윗성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 이사야 7:14/ 구세주가 처녀를 통해서 태어나실 것. ··· 이러한 예언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남자 없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3) 새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롬 5:17절에서 이렇게 표현 하였다. “한 사람의 범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회의론자들은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반문한다. 그런데 이것은 공평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문제이다. 만일 하나님이 공평하게 하셨다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더 이상 개의치 않으셔야 했다. 첫 아담의 불순종은 죄와 사망의 통치를 이 세상에 불러 왔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치유와 부활을 불러왔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한 복잡한 문제를 이처럼 은혜로 풀어가셨다. |
댓글 1
김정림 2012.8.10 13:08
(Where are you?)..... 목사님 동감입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드려요^^*~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