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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인 이순태 목사 201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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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인

말씀 / 창세기 4:1-24

 

 

I.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차별 대우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쫓겨난 후, 아들을 얻었다 : 가인과 아벨.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같은 부모 밑에서 함께 자랐다. 후에 가인은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 치는 목자가 되었다. 이들이 자신들의 수확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바쳤다. 가인은 땅에서 얻은 곡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다. 하나님이 자신이 드린 제물은 받으셨는지, 거절하셧는지를 어떻게 알았을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복이 내리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통해서 그것을 판단하였든지(28:3-6), 혹은 하나님께서 불로써 응답하심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왕상 18:38).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은 감사 예물로서, 장래에 복 주시기를 비는 기도와 관련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에게만 복을 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에 따라 몇 가지의 견해로 나뉜다. 첫 번째 견해는 하나님이 농부보다는 목자를 더 좋아하셨기 때문이라고 해석을 한다(궁켈). 그러나 이 주장은 창세기 2:15절에서 아담에게 땅을 경작하도록 시키신 분이 하나님임을 감안할 때 설득력이 없다. 두 번째 견해는 곡식제물보다 짐승제물을 더 받아들여지고 가치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스키너). 그러나 레위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곡식제물을 요구하신다. 세 번째 견해는 가인은 단순히 땅의 소산을 드렸지만, 아벨은 첫 것을 선별하여 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만큼 아벨의 정성이 더 지극해서 하나님은 아벨의 것만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리 개운한 해석은 아니다. 하나님은 첫 것만 받으시고, 첫 것 아닌 것은 안받으시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풀어야 할까? 본문 자체만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를 정확히 꼬집어 낼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자의 자세와 태도의 문제에 집중하기 보다는, 잠시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돌려 보자.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은혜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은혜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스라엘이 선민으로 택함을 받은 것도 이스라엘이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 중 야곱을 선택하셨는데, 아직 그들이 태중에 있을 때 그렇게 하셨다. 왜 그러셨는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오직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마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선택을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만 선호하신다고 판단할 필요는 없다. 6:35,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기 위한 섭리 때문이지, 이유없이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하시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9:19절 이하에서,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그리고 우리 인간을 그릇에 비유하고 있다.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나를 왜 항아리로 만들었느냐고, 나를 왜 밥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항변할 수 없다. 그것이 토기장이의 권한이다. 창조주의 권한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항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오늘 본문에 대해 신약성경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여기서 잠시 생각할 것이 있다.

믿음이다!” 어떤 믿음인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 가인도 있다. 하나님이 내 예물 받으신다는 믿음? 가인도 있다. 그렇다면 아벨의 믿음과 가인의 믿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창세기 본문만으로는 그것을 명확히 밝힐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것에 대한 가인의 반응에서 가인의 믿음 형태를 엿볼 수 있다. 5절을 보면,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한다. 여기서 안색이 변했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나팔의 번역인데, 이것의 본래적인 뜻은 떨어뜨리다, 숙이다이다. 즉 가인은 분노와 미움과 시기로 고개를 푹 숙인 것이다. 또한 7절을 보면 죄가 엎드렸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히브리어 로베츠의 번역인데, 짐승이 먹이를 잡아 먹으려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된 것에 분노를 하였다. 그는 자신의 제물은 당연히 받아들여질 것으로 생각. 그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이 가인의 생각대로 해주기를 바랐다(자기 중심의 죄성).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이 내 생각보다 옳음을 인정하고 그분께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기대가 무너지자, 그는 분노하였고 그 분노를 눈에 보이는 아벨에게 돌렸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7절에서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가인은 그 말씀을 심각히 받지 못하고 결국엔 아벨을 쳐 죽인다. 아벨이 가인에게 잘못한 것 잇는가? 아니다.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아벨을 미워하여 결국은 죽이게 되었다. 자신의 미움과 시기를 다스리지 못할 때, 그 미움과 시기는 더 커져서 살인에 이르게 된다.

 

시기심(envy)은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미모, 뛰어난 능력을 볼 때 억울하고 화가 나는 심리이다. 상대 앞에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화가 난다. 그래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상대를 파괴하고 싶어진다. 그 사람의 행복과 성공을 파괴하여 불행하게 만들고 싶어진다. 상대의 일이 제대로 안되는 것을 보면 안되었네,’ 말을 하면서도 뒤돌아서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것이 시기심이다.

시기심이 많은 사람은 누구와도 원만한 관계를 갖기 어렵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나보다 나아지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딸 일류 대학 들어갔어!”··· 다른 사람 잘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입으로는 축하해! 하면서도 세상 참 불공평 해. 나는 왜 이리 되는 일이 없냐?’ 며 불쾌한 감정을 느낀다면 시기심이 잇는 것이다.

직장에서 동료들에 대해 경쟁심이 유별난 사람들이 있다. 상사가 다른 누구를 칭찬하면, 그냥 얼굴이 일그러진다. 매사에 경쟁적이기에 사소한 일에도 싸움이 나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많다. 마음속에 시기하는 아이는 흔히 부모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은데 받지 못해서 생겨난다. 질투하는 아이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해 남보다 나아야 비로소 안심한다. 그래야 여유를 가지고 상대에게 잘 해준다. 단 나보다 못할 때에만!

 

<사례>

박 집사/ 우울증. 시어머니가 싫고 시어머니 편드는 남편에게도 섭섭함이 가득했다. 만사가 귀찮고 살림도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남편은 정말 가정적이고 나무랄데 없는 사람이다. 부인도 그것을 잘 안다. 사실 시어머니도 겸손하고 희생적이고 교회에서도 존경받는 분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박집사는 시어머니가 미운 것이다.

? ··· 시어머니는 유난히도 막내 동서를 예뻐하셨다. 그런데 동서는 명절 때가 되면 당일 아침에야 시댁에 도착한다. 맏며느리인 박 집사는 전날에 와서 뼈 빠지게 일하는데 늦게 온 동서는 시어머니와 안방에서 TV를 보면 쉬운 일만 한다. 또 명절 끝나면 뒷마무리는 박 집사 몫이다. 동서는 늘 할 일이 있다며 일찍 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동서가 직장 생활하느라 고생이 많다며 음식도 잔뜩 싸준다. 박 집사는 시어머니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막내 동생은 실직한 상태이고, 형제들 가운데 가장 형편이 어렵기에 더 마음이 가는 것, 이해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박 집사의 마음은 우울하다.

왜 그럴까? ··· 박 집사의 마음 상태는 시어머니와 관계가 전부가 아니다. 이것을 한꺼풀 벗겨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박 집사는 친정에서 막내였다. 언니는 공부를 잘해 어머니의 관심을 독차지하였다. 좋은 것은 다 언니 차지였다. 언니는 공주고 자신은 시녀였다. 박집사는 어려서 그것이 운명이려니 했지만, 무의식에는 질투하는 아이가 자리를 잡았다. 막내 동서와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은 사실은 언니와 친정 어머니에게 던졌던 미움이 투사된 것이다.


시기심은 부모와 자식간에도 작동한다
··· 딸의 넓은 아파트, 어머니가 시기해서 너만 이렇게 좋은데 사느냐 하며 커피를 벽에 뿌린다. 시기심을 느끼게 하는 상대와는 겉으로는 친한 척해도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시기심이 심한 경우는 가치가 역전된다. 그래서 나쁜 것, 악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 어떤 학생은 꼭 문제아 친구들만 사귄다. “나는 정숙?, 젠틀맨? 이런 것 싫다

) 고부관계/ 시모가 자기 안에 자존감이 없을수록 아들에게 의존(투사적 동일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러면서 며느리를 망가뜨린다. 이런 경우는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며느리가 잘 되면 관계가 좋아진다? 아니다! 잘하면 잘할수록 더욱 미워져 보인다. 신데렐라 = “재를 뒤집어 쓴 아이란 의미. 조금쯤은 가치를 숨기는 것이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바람직하다.

멜라니 클라인이라는 정신분석가는 시기심을 인간의 타고난 본능이라고 주장한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증오하고 좋은 것을 파괴해 버리려는 시기심은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갖고 있다는 것이다.

 

 

II.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아벨을 들로 데리고 가서 쳐죽였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던진 두 번째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은? 아담에게 하신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잇느냐?’(where are you?) 이것은 아담에게 하나님과 관련된 실존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즉 너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잇느냐?

이제 두 번째 질문,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where are your brother?))은 형제, 이웃과의 관계성을 묻고 잇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가인의 답변은 냉랭하였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예수님은 성경의 엑기스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적지 않은 교인들이 하나님 사랑은 고백하면서도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좀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둘은 결코 떼어놓지 않는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가인의 가치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떼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가인은 그의 아우를 미워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예배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제시하고 계신다.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네 형제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 질문을 잊어온 것은 아닐까?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 세리, 소외된 자들을 자신의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형제, 자매는 누구인가? 예배드리러 온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그들과 화해했느냐? 그들은 어디 있느냐?’ 묻고 계신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까? ‘내가 그들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대답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주님이 찾으시는 그 형제, 그 자매와 함께 나왔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옳은가?

4:8절에서 말하고라는 부분에 관한 고대 한 역본에 의하면 가인은 아벨에게 우리가 들로 나가자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다. 죽이기 위해 가인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는 형제, 자매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가자초청하는 것으로부터 참된 예배는 시작된다.


 

III. 가인의 길

 

가인은 아벨을 죽였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아벨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죽임당한 아벨을 포함하여 인간은 모두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9: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 그런데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셔서, 가인의 생명을 취하는 대신, 농사짓는 땅에서 떠나는 삶을 살게 하셨다.

가인은 이로 인해 자신이 당할 고통에 대해 불평을 하였지만,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인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대신, 에덴의 동쪽으로 가서 도성을 지었다. 그는 도성에서 죄 때문에 잃어버린 복을 대신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자 했다. 그의 후손들은 각종 도구들, 악기들을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가인은 문명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면서 문화를 일군 것이다. 문화 발달은 하나님 없이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이라는 지적이 성경 속에 들어 있다. 특히 라멕이 부르는 노래(4:23-24)를 통해서 문화 속에 폭력이 들어옴을 알 수 있다.

결국 가인의 가치관,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라는 사고는 문화의 패턴을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문명사회 건설로 확장되었다. 가인이 건설한 문명사회는 하나님이 홍수로 쓸어버리셔야 할만큼 악해지고 난폭해졌다.

 

 

IV. 시기심을 이기는 길

 

요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가인의 시기심이 극에 달해 살인을 낳고 폭력적인 문화를 만들었다.

우리는 가인의 태도에서 무엇보다도 그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선택권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자신의 계획, 자신의 생각, 자신의 기대감에 하나님을 가두려 해서는 안된다.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분의 주권을, 섭리를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요소이다.

) 가인과 아벨/ 가인이 적절한 대응은, 아벨을 칭찬해주고, 하나님께 자신의 예물이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묻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예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마치 아벨때문인양 생각하고 아벨을 죽이게 된다.

시기심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상대를 증오하고 파괴하려 한다. 클라인은 시기심을 없애는 치료제는 사랑과 감사라고 말한다. 시기심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공동체가 무력해진다. 동창회가 깨지는 이유는 한두 사람이 너무 잘 나가니까! 그래서 상대의 시기심을 받아 줄 수 있어야! 아이가 엄마의 젖을 물어 뜯어도 엄마는 보복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준다. 사랑의 마음, 감사의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고, 그런 사람과 자주 만나면 시기심은 치료된다.

 

시기심은 비교의식 때문에 작동된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스스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무엇을 가졌기에 나인 것이 아니다. 내가 외모가 탁월해서 나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고 나를 사랑하시기에, 그것으로 나의 존재 이유가 충분하다.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구하는 기도’(serenity prayer)에서 이렇게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시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주옵소서. 또한 지혜를 주시어 이 둘을 분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자기 인식,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재능과 약점이 있는지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F.B. 마이어 목사/ 영국 런던에서 목회를 하신 분. 세계적인 설교가이자 저술가. 그런데 당시 같은 런던에 다른 유명한 목사님 두 분이 계셨다. 하나는 스펄전이고, 다른 한 분은 캠벨 몰간이다. 그런데 마이어 목사님은 자신의 일기장에 자기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갈등을 이렇게 기록했다. “캠벨 몰간 목사님이 우리 도시에 온 이후로 내 마음은 그 목사님을 향한 질투와 시기심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기도했다. 하나님, 시기하지 않게 하소서! 그런데 기도 중에 그는 한 도전을 받앗다. ‘너는 네 속에 시기가 없어지도록만 기도했지, 그를 하나님이 축복하시도록 기도한 일이 있는가?’ 이런 도전을 받고 마이어 목사님은 기도를 바꾸었다. ‘하나님, 몰간 목사님이 사역하는 교회를 축복하소서. 넘쳐 흐르게 하소서. 그래서 넘쳐 흘러 그 풍성함을 저도 누리게 하소서.’ 그러던 어느날, 몰간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 뒷 좌석에 앉아 설교를 들으면서 마이어 목사님은 말할 수 없는 감동에 감사할 수 잇었다.

여러분, 내 주변에 누군가가 나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고, 더 많이 알고 있고,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에 대해 미움이나 시기심이 생기는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를 축복하라! 그럴 때 여러분의 마음이 변화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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