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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호수아 이순태 목사 2012-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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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호수아

말씀 / 여호수아 1-24

 

I. 여호수아의 프로필

1) 섬김의 사람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사건은 출애굽기 178절 이하에 아말렉족과의 전쟁이다. 출애굽 이후 홍해를 건넌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은 르비딤이라는 곳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말렉족과 전쟁을 치루게 되는데, 그때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말했다. ‘너는 사람들을 끌고 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나는 내일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그래서 모세는 아론, 훌과 함께 산에 올라가 지팡이를 손에 들고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때 아론과 훌은 모세의 손이 피곤하지 않도록 옆에서 양손을 붙들어 주었다. 반면 여호수아는 산 아래에서 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출 24:13절에서 여호수아는 모세의 부하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충심으로 보좌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세우고자 하실 때는, 먼저 종으로부터 시작하게 하신다. 섬겨본 자만이 다른 사람을 바로 지도할 수 있는 것이다(cf. 마태 23:11,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2) 약속의 사람

민수기 13-14/ 정탐꾼 사건에서 여호수아가 다시 등장한다. 가나안땅을 들어가기 전, 모세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한 사람씩을 뽑아, 12명의 정탐꾼이 40일간 가나안땅을 탐지하도록 하였다. 이때 12중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로 여호수아가 등장한다. 12명이 가나안땅을 두루 다닌 후, 돌아와 백성들 앞에서 보고를 하였다. 이때 12명의 정탐꾼들은 한 목소리로 참으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가지고 온 과일들을 보여 주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그후에 정탐꾼들의 의견은 둘로 나뉜다.

첫 번째 견해는 부정적 ··· ‘그 땅의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심히 견고하다. 게다가 거인족인 아낙자손을 보았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메뚜기와 같았다.’ 그러자 이스라엘 온 회중은 밤새도록 통곡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왜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냐고! 그러면서 우리가 지휘관을 세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러는 것!.

이때 여호수아가 등장한다. 갈렙과 더불어 여호수아는 옷을 찢으며, 백성들에게 외친다. 14:8-9;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그러자 백성은 그렇게 말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 하였다. 여호수아는 먼저 문제를 보고 압도되어 주저앉는 자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보고, 그분의 약속을 보고 그 다음에 문제를 보는 자였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걸어가는 약속의 사람!

 

 

II. 여호수아의 계승

모세가 자신의 때가 다 되었다 싶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을 하신다. 27:18-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모세의 시종으로 섬겨온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지도권을 이양하라는 것. 그것도 은밀하게가 아니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 그렇게 해서 아무도 여호수아의 자격에 대해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 이제 여호수아는 새로운 세대를 이끌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야 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여호수아는 지도자 역할을 맡는 것에 주저했던 것으로보인다. 먼저 여호수아는 그가 오랫동안 섬겨온 모세에게 닥칠 일로 인해 두려워하고 망설였다. 모세는 40년간을 광야에서 백성을 이끌며 놀랍게 헌신하였는데도, 그가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다. ‘모세가 그런데 어떻게 나 같은 것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제대로 인도할 수 있을까?’라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 더욱이 신 34:10절에 모세에 대해 어떻게 평가?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위대한 자의 후임이 된다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서로 비교가 되고, 당장에는 이전에 오랫동안 지도해온 모세에게 더 큰 향수를 느낄 수밖에 없다. 물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점은 같지만, 그 지도 방식에 있어서는 다를 수밖에 없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똑같이 될 수는 없다. 사람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다. 지도자는 자신의 시대에 걸맞는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어떤 지도자도 다른 지도자가 살아 있든 아니든, 그의 그늘 밑에서는 효과적으로 통치를 할 수 없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스타일대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제2의 모세가 됨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여호수아가 됨으로써만이 성공적으로 모세의 뒤를 계승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거듭 힘을 실어 주셨다. 여호수아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강하고 담대하라.’ 17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19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백성 중의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강한 지도자로서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를 원하셨다.

 

따뜻한 위로

우리나라에서는 설날에 떡국을 먹는다. 그런데 일본은 섣달 그믐날에는 우동을 먹는 풍습이 있다. 일본 북해도의 북해시에 유명한 우동집이 있는데, ‘북해정이라는 우동집이었다. 2차 대전 직후 어느 섣달 그믐날 밤이었다. 아침부터 저녁 10시까지 정신없이 손님을 받다가 문을 닫으려는데, 한 중년 여인이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와! 그런데 그 뒤로 치맛자락 사이로 아이 둘이 있어. 그 여인은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저어 우동 한 그릇만 시켜도 되나요?”

3명인데 한 그릇? , 어떤 사정이 있나 보구나 생각하고는 주인집 아줌마는 주방에 있는 남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여보, 우동 한그릇!”

밖을 내다 보던 남편도 얼른 감을 잡고 곱빼기로 가득 한 그릇을 내놓았다. 한 그릇을 놓고 세 명이 맛있게, 맛있게 먹고 치웠다. 그리곤 한 그릇 값을 내고 나가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전송해 주었다.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와 주어서 고맙다,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라

하는 것이었다. 또 한해 가 지나고 섣달 그믐날이 되었다. 북해정 우동집은 하루종일 부산했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어 문을 닫으려는 즈음에 바로 작년에 왔던 그 중년여인이 아이 둘을 데리고 또 나타난 것이었다.

우동 한 그릇만 시켜도 되나요?”

이번에도 주인 아줌마는 남편을 향해

우동 한 그릇!”

남편은 푸짐하게 우동 한 그릇을 내어 놓았고, 셋은 이를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다시 일년이 지났다. 10시가 북해정 아줌마는 은근히 그들이 기다려졌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들이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좀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아주머니, 우동 두 그릇이요

우동을 먹으면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주인 내외는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참 눈물 나는 얘기였다. 그녀의 가족은 동경에서 큰 사업을 하다가 엄청난 빚을 남기고 남편이 죽었다. 아주머니는 하루 내내 뼈 빠지게 일을 해야 겨우 먹고 살 정도. 그런데 섣달 그믐날이 가까오자 아이들이 소원이 있었다. 우동 먹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 조금씩을 모아 우동 한 그릇 값을 마련, 그리고는 가족이 모두 모여서 오자니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우동집을 오게 되었다. 그런데 오는 도중, 막내가 물었다 :

엄마, 지금 가면 쫓겨 나지 않을까? 한 그릇만 줄까?”

그런데 뜻밖에도 주인 아줌마는 참 친절. 한 그릇 값에도 세 사람이 먹을 수 있을 만큼 듬뿍 담아주고, 더욱이 밖까지 나와 전송해 주는 주인 아줌마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둘째 아이가 학교 글짓기 대회에 우동 한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외로웠습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아픔이나 가난에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우동집 아주머니가 우리를 내쳐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정말 친절했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힘을 내라. 용기를 내라. 세상엔 너희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나도 이 다음에 우동집 주인이 되겠습니다. 우동집을 하면서 우리 집에 오는 가난한 손님들을 그 아주머니처럼 반갑게 맞아 주겠습니다.”

 

이 글이 일본 전국에서 최우수상. 이 글이 어디까지 갔느냐? 일본 국회에 싸움이 일어났는데, 국회의장이 그것을 복사하여 나눠 주고, 그것을 본 국회의원 2/3가 울었다. 그 덕에 그 우동집은 유명하게 되었다. 4년째 섣달 그믐날 이 우동집은 자리 세 개를 예약석이라고 써붙였다. 그런데 올 때가 되었는데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11년째 되는 때에 그 예약석이라는 표를 떼어 버렸다. 그후 7년이 지난 겨울에 할머니와 신사 두분이 저녁 늦게 찾아 왔다.

우리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글쎄요?”

저희가 바로 옛날 그들입니다. 형은 은행지점장이 되었고, 저는 외과전문의가 되었는데, 그 우동이 먹고 싶어 이렇게 동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

따뜻한 격려, 위로가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III. 여호수아의 사명

1) 가나안 땅으로 들어감의 의미

우리가 자주 가지고 있는 한 오해, 그것은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간다는 것을, 우리가 죽어 천국가는 것에 유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문제가 있다. 우선 천국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주신다. 그곳에 눈물도, 고통도, 갈등도 없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감사만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그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물리쳐야 할 대적들이 있고, 우상의 유혹이 있는 곳이다. 여호수아 12장에 의하면, 당시 가나안땅에서는 31명의 왕들이 도시국가를 형성하며 살고 있었다. 이것을 감안할 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들어간다는 것은 믿는 자들, 즉 주님의 보혈로 구원받은 자들이 사단이 왕노릇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곳에 사탄과 전투하러 가는 것이다.

 

2) 정체성 확인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넜다. 이 소문이 가나안 주민들에게 퍼지자, 그들의 반응이 어땠는가? 여호수아 51,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경험한 놀라운 사건에 사기가 충천 하였다! 바로 이런 때에 여세를 몰아 여리고성을 즉시 공략하면... 절호의 찬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야 55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이 땅에서 승리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무엇을 향한 승리인가? 무엇을 향한 능력이냐?를 하나님은 분명히 하신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을 그 순간, 하나님은 발걸음을 길갈에서 멈추게 하시고 두 가지 의식을 행한다.

첫째로 할례를 행하게 하셨다. /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언약의 표징. 물론 할례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러나 할례의식을 행함으로써 내가 하나님의 자녀구나, 구별된 백성이구나 라는 자의식이 생기는 것!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마고 약속하신 것은 단순히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나안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 나라,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열방에 하나님을 선포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 춘향 이야기 / 춘향이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자 감옥에 갇힌다. 이 도령은 거지 형색으로 와서 춘향 모친인 월매를 만나 밥을 구걸하였다. 이에 구박하자 그래도 향단이가 밥상을 차려주자, 이 도령은 마파람에 게눈 감추 듯 먹어치웠다. 그걸 보고 월매가 더 부아가 치미는 것이다. 얻어 먹는데는 이골이 났다고. 그래서 이 도령은 월매에게 화를 냈는가? 사람 무시하는게 아니냐구? 따졌나? 아니다. ? 마패가 있었기에. 자기 신분이 암행어사이기에.

 

우리가 확실한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알고 있으면, 유혹이 올 때도 의연할 수가 있다. 위기 속에서도 태연자약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자기 신분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목회하다 보면 종종 화가 나는 일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안믿는 사람 돈 많이 번 것을 그렇게 부러워할 수가 없다. 물론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벌었다든가,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은 그 자체로 존경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구원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요, 우리의 신분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들어가서 살텐데, 그곳은 이미 가나안 주민들의 문명이 있는 곳! 광야에서 40년 살다가 그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해져서 우상에 쏙 빠지면 안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확인시켜야!

 

둘째로, 유월절을 지키게 했다. 할례와 더불어 드린 또 하나의 의식은 유월절!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기 전에 유월절은 왜 드리는 것일까? 여러분, 유월절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죽음의 사자를 시켜 애굽의 장자를 잡아가시던 밤에 하나님 말씀대로 양을 잡아 그 피로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은 죽음을 면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기념하는 것! 왜 이것을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도록 요구하시는 걸까?

요단강을 극적으로 건넌후 이스라엘 백성은 다소 마음이 들떠 있었다. 자부심이 생기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바로 하나님은 유월절을 기념케 함으로써, 요단강을 건넌 사건은 예전에 출애굽 사건이 그러했듯이, 너의 힘이 아니야! 하나님의 은혜야, 하나님의 능력이야 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 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가 탁월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된 것이다, 라는 생각을 잊지 말라는 것!

 

3) 실수를 넘어서

그런데 여호수아가 항상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다. 실수한 적도 있다. 여호수아 7-9장은 여호수아가 하나님보다 앞서 나갔고, 기다리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행한 일에 실패한 것을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다.

아이성의 패배 / 여리고는 가나안에서 승리의 첫 열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져야! 그런데 7:1에 보니, 아간이 하나님의 것에 손을 대었다. 그 결과는? 아이성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아이성은 여리고에 비해 매우 작고 세력도 약한 성읍이다. 그래서 승리는 내 것이다 하고 공격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스라엘 군사 36명이 죽고, 나머지 군사들은 걸음아 나살려라 하며 도망치게 되었다.

여호수아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 드렸다. 그때 하나님께서 수 7: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아간이 가져간 것은 자기의 것도 아니요, 이스라엘의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것이었다. 일단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지정하신 다음에는 아무도 그것을 변경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궤변을 늘어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성의 패배는 겉으로는 아간의 도둑질에 의한 것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여호수아에게도 잘못은 있다. 그 이유는 아이성이 작다고 무시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한 점이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아이성 사건 말고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아 낭패를 본 사건이 또 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진이 잇는 길갈에서 40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기브온 사람들이 생각하니 저런 기세라면 우리도 다 죽겠다 판단하여, ‘평화 조약을 맺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까운데 있다면, 그런 조약을 안맺을 것 같으니, 자기들이 아주 먼 길에서 오랜 시간 걸어온 것처럼 하기 위해 신이나 옷도 다 헤어진 것을 입고, 떡도 마르고 곰팡이가 난 것을 들고서 이스라엘 진영을 찾아 갔다. 가서 여호수아에게 우리는 당신의 종하고, 여호와 이름을 들썩거리니, 여호수아가 기분이 좋아! 이것들이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그래서 덥썩 평화의 조약 체결한다. 그런데 여호수아 914절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기도하지 않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 있을 때 항상 기도부터 시작하라! 기도보다 앞서지 말라!

 

IV. 새로운 출애굽

정복의 역사가 마무리 되고, 땅이 지파별로 분배되었다. 그런데 어느덧 여호수아가 나이 110, 자기의 때가 다 된 것을 알고 나도 이제 세상 사람들이 다 가야 할 그 길을 가야겠구나!’ 할 때, 걱정스러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 신앙은 관계다. 하나님과 나와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다! 그런데 그 관계에 이물질이 끼어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우상숭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이제 가나안땅에 들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 마음에는 애굽이 들어 있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분배하는 동안,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애굽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숨겨져 있던 애굽의 악들이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그리움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애굽의 신, 애굽의 쾌락을 섬기고 흠모하고 있다면, 아직 애굽으로부터 자유로운 것 아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냈지만, 이제 새로운 출애굽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애굽을 끌어내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그의 삶을 마무리 하면서, 24:14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수아도 지치고 낙심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모든 어려움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약속을 주장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거듭 울리는 말씀이 있다. ‘강하고 담대하라!’ 그는 담대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했다.

 

) 기다리지 못한 사울

삼상 13장을 보면, 사울왕이 블레셋족과 전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위해 성전을 선포하고 군사를 모으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길갈로 모여 사울을 따랐다. 그런데 숫적으로는 블레셋이 절대적으로 우세할 뿐 아니라, 블레셋은 사울 왕국의 중앙 깊숙이 믹마스까지 대군을 거느리고 들어 왔다. 위급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울왕은 길갈에 머물면서 사무엘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나타나질 않는 것. 그러자 이스라엘 군대가 동요하기 시작. 이에 사울은 군대의 동요를 막기 위해 자신이 직접 제사를 주관. 그런데 얼마 후 나타난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묻는다.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13:11). 사무엘은 사울왕이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자신이 할 수 없는 제사를 주관한 것을 질책한 것이다.

 

그렇다 강하고 담대함이란,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것을 동반한다.

27: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기 위해서는 큰 소리 친다고 되는 것 아니다.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기도하면서, 말씀 묵상하며 기다리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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