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문학과 여성 | 이순태 목사 | 2012-06-14 | |||
|
|||||
지혜문학과 여성
# 들어가면서 한 심리학자: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이나 방법을 알게 되는데, 하지만 아무도 그대로 살 생각은 하지 않는다네. 그럴 여유가 아예 없지”→지식은 실제로 살지 않으면 쓸모없다 야곱 아빠스: “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말이 많다. 요긴한 것은 행동이다. 추구할 것은 행동이지 열매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니다”
1. 지혜문학 연구의 현주소 성서신학에서 ‘지혜’는 오랫동안 서자의 취급을 받아 왔고 그에 대한 연구도 그동안 매우 주변부적이었으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지혜전승, 지혜문학, 혹은 지혜의 영향에 대한 것들이 점차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성서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양 여겨져 온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우선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에게서 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을 받는다는 성서의 흐름을 재발견한 사람으로서 그의 이같은 주장은 그 당시에는 예언자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틀만을 강조하다 보니 그는 믿음과 행위의 불가분리성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하고 말았다. 이같은 종교개혁자의 방향성으로 말미암아 개신교 중에는 극단적으로 믿음을 내면화시켜서 윤리, 특히 사회 윤리에 대한 무관심 혹은 경시를 정당화하는 경향을 띠기도 했다. 성서의 ‘지혜’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게 한 또 다른 원인을 우리는 ‘폰 라트’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에 구약신학의 큰 획을 그었던 폰 라트의 신학을 소위 ‘구원사 신학’이라고 부르는데, 그는 신명기 26장 5b-9절, 여호수아 24장 2b-13절 등에 나오는 이른바 “고대의 짧은 역사 신조”를 이스라엘 신앙의 토대로 간주하고 있으며 그 신조의 핵심에 출애굽 사건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구약성서는 기본적으로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관심을 갖는 역사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서의 이런 점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다 보니 그의 신학은 창조를 구원의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한편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제 1세계,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약 15년간 신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성서신학운동” 역시 지혜 경시를 부추긴 요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운동은 성서는 구원사적인 차원에서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 성서 신앙은 고대 중동의 환경에 비해 매우 독특한 것이라는 것,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계시하신다는 점 등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60년대 이후 이같은 관점에 대한 비판이 점차 진지하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우선 구원사적인 방법으로 성서를 일관되게 보려는 시도는 구약성서를 연구하는 자세에 있어서 성실치 못하다는 것이다. 만일 구약성서의 주요 초점이 역사적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에만 있다면, 이스라엘의 독특한 구원사적 사건이 결여된 잠언, 욥기, 전도서 그리고 시편의 일부는 구약성서에서 이질적인 자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라이트’라는 학자는 “지혜문학은 역사 문서와 예언 문서에 나타난 신앙 형태에 맞지 않기 때문에 다루기 힘든 문헌이다”라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사실 지혜문학은 출애굽 사건과 같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시키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인간의 일상 생활 속에서 활동하심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더욱이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일하신다고 할 때 ‘역사’에 대한 정의가 애매하며,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 활동은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빈번히 제기되었다. 고대 중동 문학과 구약의 지혜문학과의 비교적인 연구를 통해 양자의 유사성이 드러나기 시작함에 따라, 이스라엘 종교는 그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간직하면서도 동시에 타 문화와의 공유성을 가지면서 형성되어 왔음을 부인할 수가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성 대 계시, 자연 대 역사라는 이분법이 더 이상 수용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전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친 학문적 이데올로기 역시 재평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백인 중심, 남성 중심의 신학적 틀의 강요가 더 이상 정당화되지 못하며, 부분의 개성이 전체의 획일성으로 인해 소멸될 수 없는 현실에서 성서의 지혜문학적 사고는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최근에는 구약성서 안에 지혜의 요소가 깊숙히 들어 있음을 입증하려는 많은 연구들이 나왔습니다. 이런 성서 연구의 현상은 지혜의 중요성을 간과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놀라움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습니다.
2. 지혜문학의 특질들 1) 구원사에 대한 언급의 결여: 지혜문학은 성서 내의 다른 부문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성서적 지혜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히브리적 신앙에서 주요한 흐름을 형성하는 사건들, 곧 족장들에 대한 약속, 출애굽, 시내산 언약, 가나안 정복 등의, 이른바 “구원사”(Salvation History)적 사건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집회서’ 44-50장(“조상들에 대한 찬양”)과 ‘솔로몬의 지혜서’ 10-19장(주로 이집트 재앙에 대한 설명)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다 구약 경전 외의, 후대의 산물로서 지혜전승의 본연의 것과는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이 적절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외경 외의 경전에 속하는 지혜문서들은 구약성서에서 즐겨 사용되는 주제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며, 잠언이나 욥기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자료와 평행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 중동 사회에 만연된 지혜 속에 이스라엘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즉 지혜는 특정 민족이 아닌, 국제적인 유산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은 이방적인 자료를 공유하면서도 그것에 야훼신앙적 정신을 투여했지만, 여전히 그것은 이스라엘 고유의 역사적 전승들과는 구별되고 있다. 2) 창조신학: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이 사고의 대상 속에 그들 자신의 ‘거룩한 역사’를 넣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들이 국제적 지혜, 그리고 창조 세계와 그것들에 대한 경험에 더 집착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인식하면서도 그것에 국한하지 않았으며, 계약의 파트너로서보다는 창조주이심을 더욱 강조하였다. 시편의 많은 시들은 하나님의 왕권의 토대를 그분의 창조 행위에 두고 있으며(예. 시편 93, 96, 98편), 욥기에서도 하나님이 욥과 그 친구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논증을 반박하실 때 특히 자신의 창조성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었느냐?...”(욥 38:4이하)/ “비에게 아버지가 아버지가 있느냐? 누가 이슬방울을 낳기라도 하였느냐?”욥 38:28). 지혜자들은 지속적으로 자연을 탐구함으로써 그것의 신비와 교훈을 찾으려 했습니다: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공중에 날아 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 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잠 30:18-19). 지혜자들에게 있어서 ‘자연의 신비’는 ‘인간 실존의 신비’의 거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들은 자연 환경과의 대화를 통하여 많은 교훈을 얻으려 했는데 개미에게서 근면을(잠 6:6-8), 작은 것들 - 개미, 오소리, 메뚜기, 도마뱀 - 에게서 지혜를(잠 30:24-28) 배웠던 것이다. 이처럼 지혜자들이 인생에 필요한 교훈들을 자연에서 얻을 수 있다는 사고의 저변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권한을 부여하셨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시고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여라....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인간은 진공 속에서 홀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가 만드신 많은 피조물들 중의 하나이다. 지혜자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하나님이 좋다고 말씀하신, 살기 좋은 곳이며,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허락하신 환경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비밀을 드러내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한 인간을 특이한 피조물로서 신뢰를 받고 능력을 부여 받은 피조물로 만드셨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이 맡겨 주신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자연 속으로 숨을 수 없는 존재이며, 자연과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혜자들에 의하면 이같은 권한과 책임은 인간이 자연과 자신의 유사성(피조성)을 확인하고, 자연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음으로써 가능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폰 라트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세계에 대한 경험은 항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세계에 대한 경험이었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혜에 대한 정확하고 심오한 통찰이라 하겠다. 지혜자들에게는 세상적인 경험을 말하는 지혜 격언들을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든가, 하나님에 대해 언급해야 종교적이라고 본다든가 하는 구별이 없었다.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야훼이시다....정확한 저울과 천평은 야훼의 것이며,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분이 만드신 것이다”(잠 16:8-11)라는 진술에서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하나님을 배제할 만한 세속과 종교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잠언이 종교적인 것은 그것이 주님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혜자들의 세계관이 궁극적으로 주님에게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자들의 자연에 대한 관찰은 하나님을 배제한 자연과학적 탐구와는 구별되어야 하며, 이같은 점을 감안할 때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잠 9:10)라는 고백은 현실에 대한 깊은 종교적인 접근이라고 할 것이다. 3) 질서의 추구: 전통적으로 지혜자들은 첫 창조에서 완성된 우주의 질서와 관련하여 그 창조 질서가 어떻게 사회적 질서에 적용되는가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혜의 탐구는 곧 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생명 구조들이 창조되고 유지된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즉 자연의 질서와 인간 실존의 구조는 창조주의 속성과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질서 있게 만드셨기에 자연과 인간 사회에는 일정한 질서가 존재하며, 지혜는 바로 이같은 질서에 대해 아는 것, 혹은 세계의 다양한 현상들에 내재하는 어떤 규칙을 찾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서는 “경험”을 통해 발견될 수 있으며, 인간은 발견된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야 지혜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은 자연 질서를 관찰함으로써 사회 생활에 유익한 교훈을 배웠으며, 때로는 규칙성과는 무관한 듯한 현상에서조차 상관성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연의 현상과 인간의 현상을 대비시키는 격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창조 세계에 내재한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사 1:3).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무질서할 수 있는지 다음과 같이 보여 주고 있다: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에 밭을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공의를 쓸개로 변케 하고, 정의의 열매를 소태처럼 만들었다”(암 6:12). 이처럼 자연에는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혜자들은 알고 있었으며, 그같은 질서를 그들의 지혜 속에 포착하려 했다. 이에 대해 폰 라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격언적 지혜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기본적 관계성은 불변하다는 믿음, 인간들의 행위와 반응들은 비슷하다는 믿음, 질서는 인간의 삶을 선하게 만든다는 믿음, 하나님이 이러한 질서들을 운용하신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자연의 규칙성과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적인 삶에서는 다양한, 때로는 혼란스러운 경험에 부딪히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지혜자들은 다양한 - 자기 자신의, 혹은 전해 들은 - 경험들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려 했으며, 어떤 사건들에서 나타나는 원인-결과의 일정한 원리를 찾으려 했다. 이처럼 지혜자들이 질서에 깊이 간여한 것은 인과성, 원리를 식별함으로써 적절한 보상을 받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혜가 가르치는 삶의 질서는 온전함(잠 10:9), 훈계(잠 10:17), 야훼 경외(잠 10:27), 의(잠 11:6), 슬기(잠 12:23)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워지는데, 어떻든 그것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안전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결국 지혜자들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는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를 유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선택에 따라 우리에게는 상응하는 결과가 온다는 것이다. 한때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지혜가 질서를 추구한다는 사실로 인해 지혜문학의 사용을 매우 꺼려한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질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기득권자들을 옹호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서의 지혜문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 내지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전승은 초기 부족에서부터 헬라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생겨 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질서에 대한 이해 역시 단순하게 획일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사회학자들은 사회의 개념화와 조직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주요 패러다임으로서 질서와 갈등을 말한다. 성서에 나오는 지혜문학에도 이 두 요소가 다 들어 있어 때로는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가 하면, 때로는 기존 질서에 대해 무관심 혹은 저항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 전통적인 지혜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질서 패러다임과 비판적 지혜자에게서 나타나는 갈등 패러다임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전통적인 지혜자들은 그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구성함에 있어서 우주론, 사회, 인간의 본성이라는 세 영역을 통합하여 질서 패러다임을 발전시켰는데, 히브리어에는 여기에 상응하는, 동일한 어근(?dq)을 지닌 세 용어가 있습니다. ‘체덱’은 사회제도들, 특별히 왕들의 통치와 사법적 결정들에 영향을 미치는 우주의 의로운(정확한) 질서를 언급하며(잠 8:15-16, 25:5, 31:9), 반면에 ‘체다카’는 의로운 우주적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또 그렇게 살도록 만드는 사람들의 행위를 말합니다. 또한 ‘차띡’은 세계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살거나 혹은 세계질서를 형성하도록 행동하는, 혹은 그 질서를 단지 유지하는 요인을 뜻한다. 지혜자들은 우주 질서에 대해서 그것이 최초의 창조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계속적으로 현실에 침투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의해 유지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의인은 지혜의 교훈에 순응한 까닭에 우주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살고,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잠언 10장 25절에 의하면 의인은 영원한 “기초”와도 같다고 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히브리어는 ‘쏘드’ (s?d)로서 창조주가 땅을 확고하고도 분명한 기초로 설정하는 것을 묘사하는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이다(잠 3:19-20). 안정된 창조 질서를 지탱하는 땅의 기둥들처럼 의인은 움직이지 않으며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잠 10:30). 사회의 도덕적 질서와 우주에 순응하며 사는 삶에 대한 지배적인 은유들 중 하나는 ‘의의 길’ 혹은 ‘생명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잠 11:5, 12:28, 13:6, 21:21). 자주 생명이라는 말은 의인의 행위와 연관된 것으로서 나타났는데, 그것은 장수, 충만, 행복, 성공, 만족, 건강 등 다양하고도 풍부한 의미로 이해되었다. 의인이 된다는 것은 우주 질서와 사회 질서에 복종하며 사는 것으로 이해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 지혜로운 언어와 행위를 통해 우주질서와 사회질서를 형성하는데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의’에 대한 상이한 이해는 지혜에 있어서 계속되는 긴장을 제공하였다. 지혜자들의 사회적 지식에 대한 두 번째 패러다임은 갈등이다. 이 패러다임은 질서란 우주에 있어서 처음부터 있었던, 고유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혼돈이 계속적으로 패배함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질서는 정태적이거나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위협 아래 있는 과정들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질서가 파국적으로 해체되고, 기존 사회를 지켜온 문화적, 종교적 전통이 뒤집어지는 상황은 비판적인 지혜자들에게 새로운 의미의 전통을 수립하기 위해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게 된다. 옛 전통들이 붕괴된 후 새로운 형식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지혜를 현실과는 동떨어진 순진무구한 것으로 침몰시키든지, 아니면 지혜공동체 자체가 해체될 것이다. 욥기를 보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지혜자들이 대처하는 반응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여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결코 정당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항상 공정하게 질서를 유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즉 우주, 사회는 온전한 하나님의 질서를 이루는 곳이기에 악인은 반드시 벌을 받고 의인은 반드시 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욥과 논쟁을 벌였던 적대자들이 주장하던 것으로서 인과응보적인 우주론에 대해서는 절대로 이론(異論)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반응은 욥이 말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본성, 우주, 인간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패러다임으로서 갈등모델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처음에 욥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을 파괴하시며, 의인을 특별한,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 내버려두는 악한 힘이었다. 욥은 자신이 이제까지 고수해 왔던 인과응보적인 틀로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달리 적절한 설명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존의 틀을 가지고 자신을 공략하는 친구들에 대해서 나중에는 무관심으로 응수하였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때 하나님은 피조물에 대한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혼돈과 적극적으로 싸우는 ‘신적인 용사’의 모습을 띠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고통의 의미가 단순히 죄의 결과라는 기계적인, 단선적인 해석은 극복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의인은 오로지 혼돈과의 싸움에서 필연적으로 하나님 편에 적극 가담해야 함을 욥은 배우게 된다. 고통은 불가피하며 죽음은 인간의 노력에 한계를 정한다. 그렇지만 피조물과 인간 사회의 생명 구조는 오직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 의해서만 확보된다는 것이다. 4) 지혜의 케리그마-생명: “케리그마”(kerygma)라는 용어가 신약성서에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면, 우리는 지혜문학에서도 한 케리그마를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다. 지혜의 이 케리그마는 잠언 1-9장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지혜가 인격화되어서 거리에서 설교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잠 1:20)/ “그가 길가의 높은 곳과 사거리에 서며”(잠 8:2)/ “그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잠 9:3). 욥의 불평은 그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데에 있으며, 그래서 그는 자기를 짓누르는 하나님의 무거운 손에서 피하기 위하여 스올(Sheol)에 머물기를 바랄 정도였다. 또한 전도서의 전도자는 인생이 허무하고, 가장 허무하다고 탄식하였다. 그러나 잠언서에서는 생명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른다”(잠 10:16a)/ “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른다”(11:19a). 훈계를 잘 지키는 것은 “생명으로 가는 길”(잠 10:17; 비교 2:19; 5:6)이며, 지혜자의 가르침은 “생명의 샘”(13:14; 14:27; 16:22)이며, 지혜, 온유한 혀,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3;18; 15:4; 1130)라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거나(10:27), 생명으로 인도되며(19:23),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된다(19:16). 이런 까닭에 인격화된 지혜가 “대저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잠 8:35)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이 “생명”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날수의 길이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삶의 질 - 재물과 영광과 생명(잠 22:4) - 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욥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시던 때”(욥 29:2) 그때에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취었고”(29:3), “버터가 내 발자취를 씻기며 반석이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흘려 내었으며”(29:6), “내 뿌리는 물로 뻗어나가고 내 가지는 밤이 맟도록 이슬에 젖으며, 내 영광은 내게 새로워지고 내 활은 내 손에서 날로 강하여지느니라”(29:19-20). 이같은 축복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암시되어 있다. 즉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비록 생명이란 개념에 풍부한 물질적인 축복을 포함되어 있지만 ‘물질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3. 지혜문학에 나타나는 여성상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에 발맞추어 한국 교회에서도 여성에 대한 성서적 견해, 특히 여성신학적 해석학과 관련하여 고대 이스라엘 여성들의 지위와 역할이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구약성서란 본래 고대 이스라엘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생성된 것인데 그 해석이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이루어졌기에 오랫동안 여성들을 종속시키는 데 공헌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면서 몇몇 여성신학자들은 기독교의 남성적 신관에 반기를 들면서, 특히 지혜문학에 나오는 “호크마”/ “소피아” 표상을 하나님의 여성상으로 제창하였다. 잠언 1-9장은 여성으로 인격화된 지혜(?okhm?h)의 모습이 몇 개의 시들 속에 나타난다(1:20-33; 2:1-11; 3:13-18; 4:5-9; 7:1-5; 8:1-36; 9:1-6). 학자들은 의인화된 호크마에 대한 이해를 유일신론적인 이스라엘 신학 구조 내에 들어와 있는 여신 숭배의 흔적으로 간주했다. 즉 호크마에서 지혜와 관련된 수호여신들, 즉 수메르의 니사바(Nisaba)나 이집트의 마아트(Ma‘at), 혹은 수메르의 이난나(Inanna), 셈의 이쉬탈(Ishtar)에서 발전된 가나안의 풍요 여신 등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랭(B. Lang)은 잠언 1-9장에서 이스라엘 여신에 관한 다신론적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이스라엘에는 호크마라는 여신이 있었는데, 후대에 이르러서 유일신론적인 편수자들이 호크마를 탈신화화함으로써 호크마는 원래의 생동력을 잃고 의인화되어 그림자만을 남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호크마를 이스라엘의 여성신으로 보려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며, 단지 야훼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낼 뿐이다. 호크마가 여성형이기에 특별한 관심사가 된다면, 이 호크마에 대한 해석은 또 다른 여성형인 이방 여인(2:16-19; 5:1-14; 20-33; 6:20-25; 7:5-27; 9:13-18)의 표상과 분리될 수는 없다. 음란한 여인(z?r?h) 혹은 이방여인(nokriyy?h)이란 단어는 - 구약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 종교적, 문화적, 종족적 의미로 사용되며, 그 단어 자체에 어떤 성적, 도덕적 의미가 들어있지는 않다고 파머(K. A. Farmer)는 말한다. 이처럼 여성형 어휘로서 호크마뿐 아니라, 이와는 대조가 되는 ‘자라’(음란한 여인) 또는 ‘노크리야’(이방 여인) 등이 있음을 인식할 때, 단순히 호크마가 여성형이라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곧장 여성신학의 주요한 테마로 이용하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류터(R. R. Ruether)의 주장은 타당하다. 더욱이 고상한 부덕(婦德)을 찬양하는 평가들이 남성에 의해 주어졌을 때, 그것이 결국에는 여성의 억압 기제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밖에도 잠언서와 같은 지혜문학에는 많은 개별 잠언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대부분 그것이 유출되었던 본래적인, 특수한 상황을 상실하였기에 자칫 해석자가 그 의미를 보편화시킬 위험이 높으며, 자의적인 해석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또한 개별 잠언들은 다양한 시기와 정황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지혜문학에 나오는 여성상을 추구하기란 더욱 난해해진다. 이러한 일련의 자료상의 난점 등을 전제하면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우선 역사적 설화에 나오는 “지혜로운 여성들”을 추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지혜문학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1) 사무엘하 14, 20장에 나오는 지혜로운 여성상 구약성서는 국가의 중요한 일에 참여했던 여자 사사들이나 여예언자들 외에도 다른 영향력 있는 여성들을 알고 있었는데, 드고아의 여인(삼하 14장)과 아벨의 여인(삼하 20장)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이름이 확인되지 않고 다만 “지혜로운 여인”(???? ???)으로 지칭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로운”이란 칭호는 단순히 묘사적인 것이 아니라(참조. 출 35:25, 렘 9:17) 사사시대와 군주제 초기에 널리 인식된 역할을 의미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 역할은 “공식적인 직위라기 보다는 일련의 통례적인 기능들”로 간주된다. 즉 그 여인들이 단지 “지혜로운”이라는 형용사와, 각각의 성읍 명칭을 통해서만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은 “지혜로운 여인”이라는 단어를 청중이 들었을 때 이미 그들은 “지혜로운 여성”이라는 문화적으로 정형화된(stereotyped) 인물의 특성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드고아 여인은 과부인체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윗에게 자기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녀가 겸손히, 간절하게 자신의 처한 어려운 사정을 설득력 있게 나열하면서, 또한 단호하게 다윗에게 수사적 질문(삼하 14:13)을 하는 것을 볼 때, 이 여성은 이러한 일에 매우 익숙해 있음을 보여준다. 화이브레이(R.N. Whybray)는 요압이 계략을 제시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훈련된 관원이나 왕의 정치적인 지혜”로서 본문을 간주하고 있다. 물론 이 계략은 요압의 것이지 드고아의 여인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윗을 설득하여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들이도록 함에 있어서 그녀의 역할을 간과하고 관원의 정치적 지혜로만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언제 어떻게 그것을 표현할 것인가를 아는 자여야만 한다. 즉 실행 자체 역시 지혜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입에 지혜로운 말을 담는다 해서 모두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잠언 26:7)은 드고아 여인의 위치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출애굽기 4장 10-16절의 기사에서도 이같은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야훼가 자기 말을 아론의 입에 넣으라고 모세를 시켰는데, 그 때는 이미 야훼는 아론이 “말을 잘 할 수 있다”(14절)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요압이 드고아 여인에게 계략을 알렸다 해서, 드고아 여인이 무지한 상태였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아벨의 여인의 경우에서, 그녀의 권위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녀는 공동체에서 특정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비록 그들이 만난 바 없지만 요압을 소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요압이 그녀의 충고를 무게 있게 다룰 수 있도록 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삼하 20:17-21). 또한 그녀는 자신의 지혜로써 그 성의 주민들을 설득시켰던 것이다.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이 왕에게 접근한 사실은, 익명의 예언자가 아합 왕에게 접근한 사건(왕상 20:35-43), 나단이 다윗에게 접근한 사건(삼하 12장)과 유비된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는데, 예언자들은 야훼로부터 말씀을 직접 받아서 전달하는 반면에, 드고아의 여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처럼 당당한 직위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언자들보다 겸손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왕의 확답을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벨의 여인은 군사 지도자처럼 행동했다. 그러면 이러한 여인들의 역할을 가능하게 하였던 권위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지혜의 기원에 대한 문제에로 확대된다. 일단 두 설화의 묘사로부터 판단한다면 지혜로운 두 여인이 활동하였던 곳은 지방 성읍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지혜 영향”(wisdom influence)이 궁정 밖에서 일어났다는 가설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벨의 여인은 요압을 설득하기 위하여 옛날 속담에 의존함으로써(삼하 20:18) 권위의 토대를 고대 전통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미묘한 상황에서 부드러운 혀로 지도자를 설득하는 것은 지혜의 중요한 항목이었다(cf. 잠언 15:1, 25:15). 그런데 이 설득의 기술과 필요성이 궁정, 특히 외교에서 주로 다루어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두 여인을 정치가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 지혜가 촌락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부모들의 가정에서 실시하는 교육적 지혜와, 외교관의 정치적 지혜의 구분이 과연 절대적인가 하는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학자들은 대체로 지혜를 가족·씨족 지혜, 궁정 지혜, 서기관 지혜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러한 상관 관계에 대해서 별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크렌쇼가 이 세 지혜들을 연대기적으로 분류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한 것에서 여러 지혜가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며 공존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캠프는 이 지혜로운 여인들의 역할이 자녀들을 교육하는 어머니의 역할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자녀 교육에 있어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도 중요시되었다(잠 1:8). 결국 자녀 교육에 여성이 직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권위가 확증되고 이것이 촌락으로 확대됨으로써 단순히 교육만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도 관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이스라엘 여성들은 가족의 지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혜에 관한 세 가지의 주요한 자리는 가족, 궁정, 학교인데, 그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각 자리의 비중에 차이가 있다. 하지만 모든 기간을 통하여 지속적일 수 있는 것은 가족이기에 가정에서 여성들이 차지하는 위상과 그들의 지혜 역시 계속되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캠프에 의하면 여성들의 권위와 지혜의 통합 여부는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는데 군주제 이전, 포로기 직후에는 정치적, 신학적, 일상생활의 지혜가 통합되고 여성들의 권위는 상승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군주제와 함께 권위가 소수에게 집중화되고, 역할이 공식화됨에 따라서 지혜가 다양한 유형들로 분류되고 이에 발맞추어 비공식적이며 가족에 토대를 둔 여성들의 권위는 오히려 하락하게 되었다. 2) 잠언서의 여성상 우선적인 전제는 잠언서는 다만 단일한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 저자가 솔로몬으로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대략 포로기 이후 초창기(기원전 6세기 후반)에 최종 편집이 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잠언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민속 지혜에서부터, 후기 유대교 공동체의 교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특별히 이 책은 “지혜문학”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작품 중에 가장 고대의 것으로서, 그 편수자들은 그 사회의 지도급 “지혜자들”(sages)로 구성되었다. 잠언서는 특별히 가정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사실은 잠언서에 나오는, 여성적 표상과 밀접히 관련을 맺고 있다. 가정의 중요한 역할자로서 어머니가 있다. 1장 8절에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아버지의 훈계”와 평행법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자녀들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어머니의 역할이 아버지 못지 않게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어머니로서 자녀-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들-에게 전하는 교훈 내용은 31장 1-9절에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 교훈 내용은 표준적인 지혜 주제들-왕의 의무, 술취함의 경고, 약자 보호 등-에서 이탈하지 않는데, 특히 “여자에게 너의 힘을 쓰지 말라”(3절)는 격언은 본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3절이 궁정에서 이루어진 교훈이라 할 때, 당시의 사회에서 통례화 된 정략 결혼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방인 아내를 얻어, 그 속에 침몰됨으로서 정치적 몰락에 이르게 된다는 것인데(cf. 왕상 15:13; 19:1-3; 21:1-16; 왕하 9:22; 11:1),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르무엘의 어머니가 가진 우려는 일반적인 막연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럴 듯한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가정에서 아내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아내 혹은 여인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잠언서에 모두 반영되어 있다. 현숙한 아내에 대한 긍정적 보도(18:22; 19:14)와 함께 다투기를 좋아하는 여인에 대한 혐오가 짙게 깔려 있기도 하다(19:13; 21:19; 25:24; 27:15-16). 그런데 그 다툼을 일으킨데 대한 남성의 반성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 조롱자, 술주정뱅이, 게으름뱅이를 비난할 때도 다른 남성들과의 관계의 관점에서만 비난한다 - 남성 편수자들의 여성관이 편파적임을 엿볼 수 있다. 한편 31장 10-31절에 나오는 “유능한” 아내에서 여성의 공적인 역할을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유능”이란 용어는 ?ayil을 번역한 것으로(cf. 12:4) “힘”, “강함”(왕하 2:16; 대상 26:7-9)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조용한 여성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이를테면 맹렬 여성상을 찬양하고 있다고 하겠다. 잠언서 서두에서 지혜는 부, 행복, 명예, 장수를 약속했는데 그것이 31장에서는 유능한 아내를 통해 성취되었다. 그녀는 경제적 활동을 수행하며, 가정 뿐만 아니라 밭과 시장으로 뛰어 다닌다. 그런데 그녀의 행적이 성문에서 칭찬 받을 만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 성문에 앉아 있는 자는 그녀의 남편일 뿐이다(23절).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31장 10절 이하에 나오는 여성은 여성의 공적인 역할이 인정되기는 하나, 점차 사회적으로 제약되어 가는 전환기의 모습을 반영한다 하겠다. 3) 전도서의 여성상 전도서의 저작 연대는 대체적으로 BC 250년에서 BC 167년의 마카비 혁명 사이로 추정되며, 그의 저자는 아마 예루살렘의 엘리트들로서 주로 학생들을 모으는 교사였든지, 혹은 지혜 문헌들의 수집가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7장 26-29절에 나오는 여성관(멸시적 혐오성)은 성경 외에 다른 문헌들에서도 자주 드러난다. 가령 젊은이에게 주어진 정숙하지 못한 여성들을 멀리하라는 경고의 경우 고대 중동 지혜에서는 보편적 것인데, 전도서의 여성 비난에는 “선한” 여성과 “악한" 여성 사이의 구분이 거의 없다. 이것은 남성 중심적 유대교 제도 하에서 여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부정적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코헬렛은 그의 수준에 걸맞는 여성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데(7:28), 이것은 또한 코헬렛이 적절한 아내를 찾기에 무능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에서 ”여자를 발견한다“는 말은 ”아내를 얻다“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전도서가 전통적인 지혜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말하고 있다(cf. 1:13-14). 그러나 코헬렛이 전통적인 여성 혐오증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데 9장 9절에서는 다른 반전이 일어났다. 즉 아내와 함께 즐거움을 누리라는 것인데, 이 견해를 본 7장 26-29절과 어떻게 대비하여 이해해야만 할까? 전도서 저자의 여성관은 매우 부정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사고의 틀 안에 있는 전체적 성향은 또한 주목할 만하다. 우선 전도자는 자기의 삶의 철학을 전개함에 있어 자기의 개인적 체험에 굳게 뿌리를 두고 있어 다분히 전통적인 신앙의 틀과는 모순이 된다. 즉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하나님 표상의 경우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cf. 욥), 어느 정도 비정통적인 것이며, 또한 지혜 자체는 제한된 의미에서만 유용하다는 것이다. 폰테인(C.R.Fontaine)은 이처럼 기존 전통에 대해 전반적으로 재고하는 인식의 틀과 그리고 자연과 몸의 쾌락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 주목하면서, 코헬렛을 여성 신학의 선구자로 간주하기도 한다. 비록 코헬렛의 여성에 대한 태도는 결코 유쾌한 것일 수는 없다는 점에서 코헬렛 역시 시대의 산물이라 하겠지만, 전도서라는 책은 어떤 전통의 통전성이 모순되는 듯한 내용을 억누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4) 욥기의 여성상 욥과 그의 아내 및 그의 친구들 사이의 논쟁을 살펴보면, 여성신학자들에게서 제기된 중요한 논제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종교적 통찰의 차원으로서의 개인적 체험의 의미, 억압 받는 자들과 연대함의 의미, 전통적인 하나님 모형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간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성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의 최초의 질문은 진실로 이해 관계를 떠난 경건이 존재하는가 라는 것인데, 이같은 질문의 저변에 깔린 행위-결과의 원리를 중심으로 다양한 설전이 펼쳐지고 있다. 욥이 갑작스런 재앙을 당하자, 처음으로 그에게 말을 한 사람은 그의 아내였다. 그녀는 매우 선동적인 말을 한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것입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2:9). 여기서 그녀의 말은 욥을 신실한 자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평가(2:3b)에 대해서 사탄이 제의한대로 끝장 내라는 것이었다(2:5). 이에 대해 욥은 그녀를 “어리석은 여자처럼 말하는구려”(2:10) 라고 비난한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욥의 아내에 대한 주석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욥의 평가를 따르고 있다. 어거스틴은 욥의 아내를 ‘사탄의 협조자’라고 하였는가 하면, 성 요한 크리소스톰 같은 이는 욥의 고통을 더하게 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욥의 아내를 데려 가지 않으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때로는 그녀에 대한 동조적인 해석들이 있기도 했다. 가령 ‘70인역’의 경우, 그녀는 욥과 자신의 괴로움에 대해 깊고도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당신은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버티고 있을 작정이에요? 당신이 이런 처지에서 구원받을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아직도 가지고 계신 거예요 여보 날 좀 보세요. 이제 이 세상에서 당신을 기억해 줄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당신에게는 당신을 기억해 줄 자식도 하나 없어요. 내가 해산의 고통을 껶고 나은 자식들, 내가 온갖 고생 다 해가면서 키운 자식들, 다 없어졌어요. 당신은 이렇게 바깥 거름더미 위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고, 나는 이곳저곳, 이집저집 돌아다니면서 종살이나 하고 있고, 이 지긋지긋한 고된 일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보려는 생각에서 하루 종일 해지기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어요. 제발 주님께 뭐라고 말 좀 하고서 죽어버리세요.”
또한 ‘욥의 유언서’의 경우에서는 분명히 욥의 아내는 파토스적인 인물로서 남편의 고통에 함께 괴로워하는 자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양자 모두가 욥의 도덕적 우월성을 전제하고 있으나, 욥의 아내는 무고한 자의 고난을 욥보다 먼저 인식했던 자이기도 하다. 다만 그녀의 관습 타파적인 말들이 많은 비난을 야기시켰지만, 그 사회의 주변부에 처해 있는 한 여인의 통찰력은 낡은 자기 만족을 깨뜨리는 자극제가 되었다. 막은 바뀌고 다시 새로운 장면이 떠오르고 친구들이 등장한다. 꾸준히 자기의 입을 지키고자 하던 욥이 자기 친구들의 전통적인 도전을 받자 욥 역시 그의 아내에게 그러했듯이 그 친구들에게 도전한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의 주장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들은 “상식”, 곧 모든 사람이 흔히 받아 들이는 인습적인 지혜(4:7; 5:27)에 호소한다. 이에 반해 욥의 주장은 자신의 “경험”에 권위를 두고 반론한다. 이러한 상이점이 여성신학에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사회의 상식이라는 것은 대개 남성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형성된 것으로써, 이러한 사회적 기준 때문에 여성의 것을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욥과 그 친구들이 여성의 경험에 대하여 논의한 것은 없지만, 각각 다른 권위의 원천에 대한 그들의 논의와,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더 심한 견책을 받은 쪽은 욥이 아니라 그의 친구들이었다는 사실에서 개인의 경험, 특히 여성의 경험 역시 그 전통에 대한 비판에 있어 동일하게 그 타당성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한편 욥이 생각한 하나님은 공평과 의로운 행위를 옹호하고 악을 벌하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이 책의 급진적 성격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인식이 너무 협소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38-41장에 욥이 만난 하나님은 그가 기대했던 인간의 상식적인 틀에 박힌 가부장적인 분이 아니었다. 그의 자신의 개인적, 남성중심적인 전이해를 뛰어 넘어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생명의 보호자로서 자신을 드러내 놓는다. 하나님은 욥이 자신의 패러다임 속에서 제기한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질문 배후에 깔린 하나님에 대한 인식들을 질책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여성주의와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욥이 개인적 새로운 체험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진 후, 그가 딸들에게까지도 아들들과 똑같이 자신의 유산을 물려주었다(42:14-15)는 사실은 실로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유산 상속의 사례가 결코 일반적인 관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성경적 관점이 대부분 가부장적 성향을 띠고 있는 것처럼 지혜문학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즉 여성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양면성이 다 남성들이 지니는 여성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지혜와 여성과의 관계와, 후기 지혜 문학상의 그것들과는 동일시 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즉 왕조 성립 이전에 나오는 “지혜로운 여성”에 관한 두 설화(삼하 14장, 20장)는 지혜 속에서 여성은 억압적일 수 밖에 없다는 편견을 불식시켜 준다. 이러한 표상이 잠언서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크게 외쳐 지혜를 충고하는 호크마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 욥기에서는 욥의 아내의 통찰력,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표상 등이 여성에 대한 긍정적 평가의 흔적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지혜문학의 최종 편수자는 포로기 이후 남성 중심적 유대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서기관들이었다. 당시는 이미 가정의 종교 교육이 회당으로 넘어가면서 가정에서 어머니로서의 권위는 점점 위축되어 간 시대였기에 지혜문학에는 여성비하의 흔적이 나타난다. 정경 안에 있는 지혜문학 중 가장 후대로 추정되는 전도서와 외경에 속한 지혜 문학에서는 여성의 위치가 더욱 축소되어 감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여성을 창녀로 - 종교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 내어줄 수 있는 제도나 구조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이 없다. 이점에서 지혜자들은 그들의 관점, 특히 그 사회의 병리 현상을 남성 특권적인 협소한 눈으로서만 바라보고자 했다. 그렇다고 이같은 한계가 지혜문학을 곧 바로 무용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남성중심적 시야라는 한계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혜 사고의 저변에 있는 지적인 과정은 여성 독자에게 유용한 자원을 제공할 수 있다. 즉 지혜는 신학함(doing theology)과 세상 이치에 대한 모델을 구성함(constructing)에 있어서 “경험”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혜 전통의 일상 생활에 대한 강조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상이한 여성들의 삶의 경험을 우리의 지식과 존재를 위한 진정한 시금석으로 간주케 한다.
4. 지혜와 일상(日常)의 영성 오늘날 기독교에서 영성이 새롭게 강조되고 있고, 다양한 영성 훈련이 개발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영성’이란 어휘의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간직하고 추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주로 섬기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는 것일 것이다. 창세기 3장의 타락기사와 빌립보서 2장 5-8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영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과는 달리,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동등하시면서도 오히려 ‘사람 같이’ 되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성육신 사건은 자기를 높이려는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본래적인 관계를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의 본래적인 영성이 무엇인가를 잘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낮아짐”과 “순종”이라 하겠다. 안셀름 그륀은 사막의 교부들의 영성을 소개하면서 이들의 영성은 ‘아래로부터의 영성’임에 반해 현대 신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영성은 ‘위로부터의 영성’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사심 없음, 자제력, 항구적인 친절, 순수한 사랑, 분노로부터의 이탈 등 높은 이상은 우리에게 도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주 우리 자신의 능력을 뛰어 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억압하거나 인정하지 않고 이상으로만 향하려 한다. 그래서 그것은 종종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 속에서 나타나 분열을 초래한다. 우리의 현실이 이상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무능력을 다른 이들에게 투사하며 그로 인해 타인에게 냉혹해진다. 그러므로 높은 이상 속에서 살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의 현실을 숙고함이 없이 깊은 명상을 하며 신비의 길을 가는 것은 하늘로 오르기 전에 먼저 내려오신 예수님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관념의 틀에 머무르지 말고 육신을 입고 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기존의 인습적인 틀을 벗어 던지기 위한 일차적인 과제였다. 이러한 시도는 지혜 속에 면면히 나타나는 경험 개방성(experience openness)과도 상통한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은 삶의 교훈을 우리의 일상 생활의 “경험”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삶에서의 옳음과 그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인 경험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잠언서의 여러 교훈들은 율법이나 규칙, 혹은 선포가 아니며, 그것들은 더 많은 경험들에 열려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그것들은 조심스럽게 현실에 적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경험’에 의존한다는 것은 곧 그 자체로 다양성을 띤다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른 교훈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잠 26:4)/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잠 26:5). 지혜자들은 복잡한 사람을 응시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는 경험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경험 배후에 불가해한 질서가 있음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지혜자들의 경험이 곧장 배후에 있는 질서와 동일시될 수는 없으며, 그 질서를 향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경험의 영역은 유동적이어서, 한때 공동체에 적절했던 것이 다른 때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관찰을 절대적인 것으로 옹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경험의 권위는 지혜자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관찰’에 있기 때문이었다. 지혜자의 이같은 “경험 개방성”은 지혜자들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도 지혜를 독점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은 이전의 틀로서는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을 이전의 틀로 포괄하여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욥의 친구가 아니라, 욥의 손을 들어 주신 것은 경험에 대한 솔직한 고민이 기존의 틀이라는 작은 상자 속에 하나님을 넣는 것보다 하나님에게는 더 받아 들여질 만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지혜의 금언들이 자명한 원리가 아니라, 개인적, 혹은 조상들의 축적된 경험을 진술한 것이라 할 때, 지혜롭게 되기를 원하는 자는 이같은 경험에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한다. 지혜는 바쁜 일상 생활이 있는 시장, 거리, 성문에서 소리를 높이며 지혜를 얻으라고 사람들을 초청하고 있다. 지혜자들이 다루고 있는 지혜의 주제들은 소수의 특정인들만이 접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녀 양육의 올바른 길, 돈의 현명한 사용, 우정의 중요성, 남녀간의 문제, 말의 위력, 술의 위험, 대인관계, 삶의 불공평성, 삶의 불공평성 등 일상적인 것들이다. 우리가 영성을 체험하는 최고의 수련장은 일상이며, 우리의 일터요, 우리의 몸인 것이다. 한편 예수님은 구약의 지혜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통찰의 근원으로 삼았다. “공중의 새를 보라”(마태 6:26),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태 6:28),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태 5:45)는 말씀은 자연을 어떤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접할 때 나오는 질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 특히 비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이 담보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권위는 자연으로부터 배운 것을 적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즉 예수님은 당시의 율법교사들처럼 이미 확립된 전통의 권위에 호소하지 않고 먼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그 속에 드러난 신적 특성의 섬광을 보라고 요청하셨다. 끊임없이 기존의 관습이나 성실한 종교적 성취 속에서 삶의 안전을 보장 받으려는 자들은 매사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예수는 자신이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조바심하고 있는 사람들, 사회적 승인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잘 알고 계셨다. 이들에게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우주적 관대함으로 가득 찬 실재에 눈뜨라고, 음식, 옷, 수명, 그리고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권면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누가 6:43-44)고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관찰인데,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킴으로써 매우 급진적인 교훈을 얻어내기도 하셨다. 즉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즉 우리가 어떤 나무인가 하는 점이 그 열매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열매를 바꾸는 것만으로 나무의 종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열매에 집중함으로써 자아의 깊은 차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종교적으로 재가된 믿음과 행동들, 관념적으로 받아들여진 일련의 신념들, 그리고 따라야 할 행동 지침은 우리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자아인식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단순한 자기 투사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일상을 떠난 영성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일상적인 삶과 경험을 중시하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 꿈, 육체를 바라보면서 실상을 직시하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영성은 우리의 실상을 직시하고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먼저 내려가고, 그런 다음 하나님에게 올라가는 길에 서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지혜의 영성, 곧 일상의 영성이라 할 것이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