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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가까이(시편 73편 묵상, 기독교사상 기재) 이순태 목사 2012-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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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 가까이(시편 73편 묵상) 

                                                                                                          이순태 목사(전주신광교회)  





겁 없는 나비

조금 시간이 난다 싶어 잠시라도 나를 짓누르는 짐을 떨치고자 얼른 배낭을 걸쳐 매고 습관처럼 산자락에 있는 낯익은 집을 찾아 나섰다. 2009년을 보내면서 그동안 나를 짓눌렀던 목회적 부담,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인 요동에서 잠시 도망치고 싶은 것이다. 서서히 산이 저물어 가면 고요함과 더불어 어둠을 꿰뚫고 다가오는 산소리가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읽던 책 머리맡에 던지고 불을 끄니 정신은 더욱 또렷해진다. 문득 김기림 시인이 쓴 “바다와 나비”라는 시가 떠오른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나비는 아무 것도 무섭지 않단다. 왜? 아무도 그 나비에게 푸른 바다의 깊이를 알려준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비는 겁 없이 달려들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푸른 색이기에 청무우 밭이려니 하고 덜썩 주저 앉았다가 그만 나비는 바다 풍랑 속에 휘말려 버린다. 나비는 바닷물에 날개가 흠뻑 적신 후 엉금엉금 바닷가로 기어 나온다. 멋들어진 동화 속의 공주가 아니다. 희멀건한 눈동자 내리깔고 파김치가 된 공주처럼 지쳐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 시를 되새김하노라면 그 나비가 마치 나인 것처럼 느껴진다. 목회라는 현실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들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 정리하면서 뭔가를 새롭게 해보려고 달려 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그것은 무거운 짐이었다. 십자가였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목회적 현실이 버거웠다. 더욱이 위정자들이 떠들고 있는 4대강 정비사업, 미디어법, 용산 참사의 비극, 가진 자들의 나라라는 인식 속에서 나의 좌표를 제대로 세운다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줄 몰랐다. 그저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만을 되뇌이게 된다. 어느 신학자가 그랫던가?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나도 그렇게 살고자 했다. 지성과 영성의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말씀의 음미와 현실적인 적용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마치 바다 속으로 휘말리는 나비처럼 되어가는지 모르겠다.

시편 73편을 노래한 시인도 그러했다. 그는 신정론(Theodicy)의 문제로 노래를 시작하면서, 영원한 현존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끝을 맺는다. 물론 시인이 악의 문제에 대해 어떤 지적인 해결책을 얻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그의 종교적인 의식을 휘저어 놓을 악의 문제를 지적으로 정직하게 바라보면서 새로운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전통적인 신앙고백과 현실의 경험

“참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선하시며,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하시다” 라는 1절의 고백은 이스라엘 신앙의 전통적인 명제이다. 여기서 시인은 사람을 ‘마음이 정결한 자’와 마음이 부정한 ‘악인’이라는 두 유형으로 구분한다.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정결하게 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인 역시 전통적인 명제를 고백했고 그렇게 믿어 왔다. 아무도 이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고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있다. 바로 현실적인 경험이다. 시인은 날마다 악인들의 번영을 보고 그들의 자랑하는 말을 들으면서 과연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절망적인 불신앙에 다가 갔다. 심지어 악인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보면서 악인을 부러워하기까지 하였다고 고백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시인은 그토록 소용돌이를 경험하며 힘들어 한 것일까?

시인의 눈에 비치는 악인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우선 그들은 오만과 폭력이 가득한데, 그것이 마치 그들의 목걸이나 옷이라도 되는 듯이 일상적인 행태가 되었다(6절). 하는 일마다 잘 되니 저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융통성 없다고 우습게 보고, 약한 사람들을 깔보고 조롱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수고한 것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리면서, 눈두덩이가 불쑥 나올 정도로 피둥피둥 살은 쪘다(7절).

악인들은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서 항상 상대를 얕잡아 보며 비웃는 말, 억압적인 말을 쏟아 낸다. 더욱이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이라도 되는양, 위대한 진리라도 소유하고 있는 양 거만하게 자기 주장을 펼친다. 그뿐만 아니라 땅에 두루 다니면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퍼뜨린다(8-9절). 시편의 다른 시들에서는 악인들의 말에 대해 다양한 묘사를 하고 있다. 신실함이 없고 악하며 아첨하는 말(시 5:9),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가득한 말(시 10:7), 아첨과 자랑하는 말(시 12:3), 죄악과 속임의 말(시 36:3), 거짓말(시 52:3), 비방하는 말(시 102:8) 등.

이러한 악인들의 말과 행동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조차 악인들의 번영과 악한 행동에 현혹이 되어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인들에게로 모였다. 그들은 외적인 형통 자체를 진리 소유의 증거로 간주하면서 기꺼이 악인을 추종하였다. 오늘날에도 외적인 풍성을 진리를 소유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 진리를 가장한 거짓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적지 않다. 악인들에게 현혹된 추종자들은 악인이 던지는 새로운 주장을 마치 생명수라도 되는양 마시면서 악인의 행태를 답습한다(10절).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마저 하나님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는 관심이 없는 분으로 여긴다. ‘지극히 높은 자’(엘욘)는 인간과 멀리 떨어져 있어 자신들의 악행을 알지 못하기에, 어떻게 살든 이 땅에서 내 마음껏 살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11절). 그래서 ‘믿음 따로, 삶 따로’ 라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악인들의 형통으로 인해 경건한 자들의 믿음과 가치관이 오염되어 간다.

그런데 이런 악인들의 삶은 어떤가? 죽을 때도 고통이 없다. 몸도 건강하다. 고난이나 재앙이 그들을 피해간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공공연하게 무시하고, 하나님 없이, 자신이 하나님인 양 살려는 악인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고통을 당하고 재앙을 당하여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깨달아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악인들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점점 늘어만 간다(12절). 어느 언론사 기자는 유명인사의 약점을 잡아 치부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이의를 달지 못한다. 어떤 정치가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지만, 여전히 권력을 누린다. 그런가 하면 뇌물받음과 부정직함이 이미 드러났지만, 여전히 높은 자리에 앉아 정의를 비웃는 공무원들도 있다. 권력을 등에 업은 기업들은 정직하게 운영하려는 중소기업들을 공략하여 도산케 하는 일이 다반사다. 법정에서도 ‘유전 무죄, 무전 유죄’ 라고 한다. 도대체 정의와 공평이 없는 사회이다.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화가 난다.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악인들의 번영과 태도는 시인 자신의 고난과 내적 긴장을 이루면서 시인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시인은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해 왔다. 주변 상황이 어떻든 그래도 악을 멀리하며 의롭게 살려고 애썼다(1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악인들을 피해가는 재앙과 징계가 시인에게 오는 것이 아닌가? 물론 자신이 깨끗하게 살았다고 해도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악인들은 큰 죄를 범해도 잘 사는데, 시인 자신은 조그만 허물로 인해서도 시시각각 고통을 당한다. 하나님은 ‘아침마다’ 시인을 위해 징벌을 준비하는 것 같다(14절). 억울하다. 이때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이 헛된 것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든다. 이런 신앙이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기라도 하는 건가? 시인은 모든 믿음의 관계를 끊고 싶었다. 더 나아가 시인은 욥처럼 하나님을 고발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그런데 시인이 최후의 발걸음을 옮기지 않도록 그를 지켜 준 것이 있었다. 바로 신앙 공동체 대한 그의 충성심이었다. ‘하나님 믿는 것 다 쓸데없는 짓이야,’ ‘악인들처럼 자신의 소신대로 사는 것이 최선이지’ 라고 말했다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겸손하게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배반하고 실족케 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시인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인간 세상의 혼란스러운 문제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생각을 둘러싸고 있는 의구심은 계속되었고, 감추어진 의미를 찾기 위해 시인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시도는 거듭 당혹스러움과 고통 속으로 시인을 빠지게 하였다. 시인의 솔직한 성찰이 실패로 끝나고, 이제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적어도 시인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성소에서(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문제를 안고 하나님의 성소, 곧 하나님의 거룩의 영역, 하나님이 계시는 신비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통찰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시인의 논리적인 추론이나 명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얻게 된 통찰이다. 무엇보다도 시인은 악인의 번영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악인의 종말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악인의 안정된 삶은 눈에 보이듯이 확고한 기초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악인들은 미끄러운 곳에 놓여 있으며, 지속적으로 멸망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18절). 사람들의 눈에는 확고한 행복처럼 보였던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공포에 질려 순식간에 붕괴되고 무로 환원되어 버린다. 삶이란 심판과 죽음의 렌즈를 통해 관찰될 때 비로소 다르게 보이고 재평가된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시인은 더 이상 하나님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자신의 협소한 틀에 구겨 넣으려 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해서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눈에 보이진 않는 하나님의 현실에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서 흔들릴 수 없는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히브리서 11:1절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제 시인은 믿음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으로, 새로운 인식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성소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악인들의 비참한 종말을 깨닫게 된 시인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여 자신도 그처럼 되고 싶었던 어리석음에 대해 시인은 가슴 아파하면서 자신을 ‘주 앞에 짐승’이라고 고백한다(22절). 이처럼 시인은 무한한 창조주 앞에 유한한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야곱이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얍복 나루터에서 밤새동안 하나님과 씨름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야곱이라는 이름 대신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게 된다. 이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허벅다리를 절며 나아갈 때 해가 솟았다(창 32:31). 마찬가지로 악인의 번영으로, 경건한 자들의 고난으로 유혹받고 고통스러워 하던 시인이 이제 성소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삶에 빛이 동터오는 것을 경험한다.

히브리성서에서 23절은 wa’ani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로 시작한다. 이 단어는 앞부분과의 분명한 대조를 보여 준다. 그것은 시인 자신의 회의·갈등과 순수한 확신, 악인의 허망한 행복과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진정한 행복 사이의 대조이다. 이제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을 떠나서 하나님만을 붙잡는다. 자신의 짐승 같은 어리석음을 넘어서 하나님의 긍휼을 확신한다. 이제 시인은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자신이 주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22절-‘주 앞에,’ 23절-‘주와 함께,’ 25절-‘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자아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지향한다. 잘못하고 갈등하는 인간이지만 주님은 함께 하셨다. 비록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였다고 생각했을 때조차도 여전히 주님은 그의 곁에 계셨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주와 함께 하니’ 라는 구절을 단순히 시인 자신의 의지나 경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느 인간도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항상 하나님을 지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넘어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함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하나님이 먼저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의 손을 붙잡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 그리고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이 가능한 것도 자신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24上) 라는 구절에서 ‘교훈’은 히브리어로 ‘에차’인데, 이것은 정부가 의사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전문가의 의견과 같은 것이다. 악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이양 하늘을 향해 소리치지만(9절), 시인은 우리 인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주님의 ‘에차’로 인도함을 받는다. 물론 우주적, 생물학적, 심리학적 수수께끼들은 계속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것이다. 여전히 신정론의 문제는 이론적으로 미결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미래는 더 이상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것이 아니다. 왜? 지혜로우시고 자비하신 초월자가 우리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의 확신은 이생뿐 아니라, 죽음 저 너머에도 이어진다.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24下) 라는 구절은 죽음 이후에 시인이 하나님과 가지는 교제의 완성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영접하시리니’ 라는 구절의 히브리어는 ‘라카흐’(취하다)인데, 이 단어에서 독자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로 들림 받은 에녹을 생각햇을 수도 있고(창 5:24),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왕하 2:3,5). 혹은 영생이나 부활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시인은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시하지를 않는다. 다만 시인의 관심은 현재의 고난들은 그때 계시될 영광과는 비교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죽음조차도 하나님과의 친밀성을 떼어놓을 수 없으며, 그분을 향한 소망을 제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인이 발견한 놀라운 깨달음은 하나님은 결코 ‘숨어계시는’(elusive) 분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확신은 죽음조차 하강이 아니라 상승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제 시인은 삶의 궁극적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내가 지닌 그 어떤 관심, 욕망, 야망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다. ‘오직 주만’을 외치는 시인의 고백에서 우리는 신앙인의 자유를 깨닫게 된다. 시인은 모든 지상적인 굴레를 벗어던지고 멀리 날아 오른다. 그렇다고 시인이 현실의 고난에 대해 눈을 감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한, 고난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육체도 마음도 점차 시들어간다(26절).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리의 호흡도 멈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가 의지할 ‘반석’이며, 우리가 머물 영원한 ‘몫’이다. 민수기 18:21-24절을 보면, 레위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이 그들의 몫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몫’은 세상에 속한 것도 아니고, 하늘에 속한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죽음 이후에도 빼앗길 수 없는 참된 ‘몫’이다. 바로 이것을 깨달을 때, 주변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도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복, 하나님께 가까이 함

시인은 다시 한번 이전에 자신의 마음을 그토록 휘저어 놓았던 자들을 생각한다. 이제 그는 그들을 ‘악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를 멀리하는 자’라고 부른다(27절). 시인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요약해서 이렇게 표현한다. ‘그들은 주를 멀리하기에 망한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시인은 그 내용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표현한다. “‘그러나 내 경우는’(wa’ani)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28절). 삶이 주는 수수께끼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현존의 경험을 통해서 주어진 궁극적 확신은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는 없다. 누구에게 복이 주어지는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이다! 처음에 시인은 ‘마음이 정결한 자’와 ‘악인’을 대조시키면서, 눈에 보이는 겉모습으로 인해 유혹과 갈등을 경험했다. 그러다가 성소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후, 그는 주님을 ‘멀리하는 자’(farness)와 주님을 ‘가까이 하는 자’(nearness)를 대조시킨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하는냐, 멀리하느냐의 문제이다. 세상에 지혜 있다는 사람들은 외친다. ‘더 많이 모으면 그만큼 행복해! 더 많이 가지면 그만큼 행복해!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돈과 권력을 얻어내야 해! 그래야 평안이 오는 거야!’ 그러나 과연 그런가? 세상적인 번영이 나에게 평안을 주는가?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 없이는 그 어느 곳에서든지, 어떤 자리에서든지 결코 진정한 평안은 없다. 믿음의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임을 아는 자들이다.

주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만을 나의 피난처로 삼고 그분만 의지하는 것이다. 오직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이 오직 주님의 은혜의 결과요 하나님의 선물임을 고백한다(엡 2:8). 그러면서 은혜에 감사하여 그것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자 열심히 수고한다. 그런데 그 수고의 과정에서 우리가 종종 빠지는 함정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공로에 도취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수고했는데 왜 이것을 몰라주지? 내가 이 정도 하면 누구보다 못한 것은 아니잖아? 그러면서 자신의 수고를 몰라주는 주변에 대해 섭섭함과 더불어 불평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목사가 된 것, 하나님의 은혜! 내가 지금까지 수고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 이처럼 우리의 범사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라는 인식을 하면서 살 때에야 불평과 유혹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은혜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향해 ‘주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생명입니다’ 라고 외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 누가 뭐래도 하나님께 가까이 함 그 자체가 복이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주님의 은혜에 빚진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해야지. 그래! 어둠 걷혀 깨는 새벽, 정류장으로 가 첫 차를 타야겠다. 배낭을 짊어지고 명랑한 발걸음 소리 뒤로 하며 산을 내려 간다. 어느새 저쪽 하늘이 희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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