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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 제자훈련을 통한 대학교 선교단체와 교회 현장의 조화 이순태 목사 2012-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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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을 통한 대학교 선교단체와 교회 현장의 조화

 

 

1. 들어가는 말

많은 그리고 다양한 목회 경험을 지니지 못한 저로서 이 같은 곳에 와서 강의를 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면서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저는 이 자리에서 어떤 특정한 전문적인 강론을 할 위치나 능력도 없음을 전제하면서, 제가 목회하면서 느끼고 고민한 바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제가 몇 군데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생각보다 많은 교회들이 새신자 관리에 있어 취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요, 동시에 기존 신자들을 역동적인 일꾼으로 만들까 하는 문제에 고심한다는 것이다. 우선 새신자를 수용·관리하려면 기존 신자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에, 결국은 소수의 교역자와의 만남으로 국한된다. 그러다보니 새신자는 기존신자와의 교류가 없게 되며, 소위 박힌 돌과 새로 굴러온 돌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게 된다. 제가 남신도들을 훈련시키면서 자주 들었던 내용은 처음에 많은 소외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새신자 관리는 결국 기존 신자관리와 필수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양자가 함께 다루어져야 교회가 건강하다. 새 자식이 있으므로 가정이 더 기쁘고 즐거워야지, 그렇지 않고 새 자식을 주어도 감당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새 자식을 주겠는가? 결국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기존 신자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새 신자 정착 차원에서 기존 신자의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스스로 자문해보았다. 본질이 무어냐? 하나님이 나를 일꾼으로 부르신 목적이 무어냐? 교회의 존립 목적이 무어냐?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급속히 변해도 절대로 바뀔 수 없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은 무엇인가? 그것은 작은 예수 만들기,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한 자가 되게 하는 것. 그리스도를 닮는 것, 바로 이것이다. 이 사역을 통해서 교회는 성장하며 건강하게 된다. 예수 제자 만들기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목적이라면, 제자훈련 역시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설교를 통한 감동은 빼놓을 수 없는 방법이다. 그러나 설교란 지속적이지 못하고 스스로의 결단과 변화를 추동시키는 데 있어서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오래 들은 사람일수록 설교의 영향은 반비례. 실제로 교회 개척 멤버나, 교회의 중진들일수록 설교의 감동이 적다. 설교만 가지고 사람을 변화, 더 나아가 성숙케 하기가 어렵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자훈련을 통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안에 채우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2. 상황.

제자훈련의 , 소그룹적인 훈련 방식의 필요성은 오늘날 교회내외적인 상황에서 더욱 요구되는 형태이다.

개신교 500년동안 교회의 행정체제는 대체로 목회자중심이었다. 피라밋 꼭대기 위에 앉아서 불안스럽게 좌우의 균형을 유지하느라 진땀을 빼는 모습, 혹은 자동차의 운전기사처럼 교인들은 푹 자고 나면 안전하게 서울에서 부산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 목사직이라 생각. 그러나 요즘은 점차 평신도중심적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면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면서 개신교 출범시 중요시된 만인제사장론새롭게 조명되면서 평신도지도자를 훈련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한 요즘 시대적 상황도 소그룹적 훈련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 미래학회장을 역임한 Edward Cornish는 낙관적 미래를 제시하고 있는데 ‘21세기는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간의 기근 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삶이 편리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편리한 삶이 곧 삶의 질의 향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Jeremy Rifkin󰡔노동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정보사회에서는 공장근로자의 숫자가 급겨히 줄어들 것이며, 2025년엔 전 세계 노동력의 5%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가 되면 상층 20%는 정보 혁명에 영향 받지 않고 다양한 정보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식산업종사자들로 형성되고, 나머지 80%는 일감을 찾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밖의 여러 변화:

(1) 변화하는 가족구조 : 핵가족으로의 변화/ 결손가정의 증가(얼마전 한국 이혼율 통계 6/10, 부모 평균구성율 1.5-많은 가정이 한쪽만 있다는 것)/ 함께 모여 사는 시간이 부족

(2) 소멸하는 이웃 :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다 보니 이웃에 간섭받기 싫어 함. 미국이 가진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공동체가 파괴. 소그룹은 서로를 묶어 줌.

(3) 늘어가는 피상적 관계 : 사람들이 속에 있는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지난 주간동안 무슨 일이 있든지 화장을 하고, 그냥 웃으며 만난다.

(4) 조각화된(fragmented) 삶의 구조 : 회사에서는 회사 사람을 만나고, 교회에서는 교회 사람을 만난다. 그래서 깊은 인간관계를 갖지 못하고, 삶을 공유하지 못한다.

(5) 구경꾼의 문화 : 팔짱 끼고 앉아 있기를 좋아함(e.g. TV). 적극적인 참여를 꺼리고, 대화의 단절이 생김. 이같은 현상은 교회 내에서도 많이 등장.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성가대를 구경하고 평가하려 한다. 그러나 예배에서의 관객은 오직 한 분, 하나님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교인이 관객이 되려 함.

(6) 나그네의 라이프스타일: 이동성의 삶. 예전에는 한 지역에서 한 직장에 평균 25, 그러나 오늘날 7년마다 직장을 바꿈. 5면중 1명꼴로 1년에 한번씩 이사. 어렸을 때부터 교감하는 인간관계 형성이 어렵다.

(7) 변화하는 가치관: 물질 중심의 삶. 물질만 있다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가치관 소유

 

이 같은 상황에서 소그룹 활동 요청되면서 교회 내에 평신도사역자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일당백, 일당천을 감당할 일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세·태도

 

1) 말씀을 메고 가라

여호수아 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이 나오는데, 맨 앞에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가고 그 뒤를 백성들이 따라 가는데, 그 사이가 2000큐빗이니 약 1km정도의 간격이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 백성은 결코 법궤를 앞설 수가 없었다. 왜 그런가?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13:26-33에 나오는 가데스바네아 사건이다. 가데스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들이 40일동안 가나안을 탐지하고 난 후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러나 그 땅의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크다. 그들의 신장이 장대하니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나 다름 없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를 그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자기를 메뚜기로 보고, 차라리 애굽 땅에서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사람들은 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약속·비젼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자 외쳤던 사람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무엇을 바라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한다. 우리가 다 꿈과 비전을 가져야 하는데, 이를 가로 막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사고이다. 우리는 자꾸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가능한 일만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마음 속에 현실을 넘어서는 원대한 그림이 없다면 그 사람은 결코 먼 훗날 원대한 이력서를 쓸 수 없을 것이다. 리더는 반드시 어깨에 말씀을 젊어져야 한다. 말씀이 없으면 리더일 수 없다.

 

2)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

삼상 16:11-12에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사무엘더러 베들레헴 사람 이새라는 사람의 집으로 가서 왕이 될 사람을 하나 뽑으라!’ 그래서 이새의 집에 가서 자기가 여기에 온 자초지종을 말한 후, 이새의 아들들을 하나씩 선을 보았다. 첫째인 엘리압을 보니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도 훌륭하여 아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자가 여기 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싸인을 안 주신다. 둘째 아비나답 역시 싸인이 없었다. 아들 일곱을 다 보았는데도 하나님이 사인을 주시지 않자 사무엘이 이새에게 말했다. ‘이들이 네 아들 전부냐?’ 그러자 막내인 여덟째가 있는 그는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었다. 적어도 이새의 눈에는 그 막내는 왕위감은 아니라고 생각 했기에 그래서 사무엘 앞에 선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막내를 선택하셨고 그가 바로 다윗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 자기의 욕심이나, 명예욕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눈으로 미래의 그림을 그리고 보길 바란다.

 

What이 아니라 Why이다!

직업 자체가 우리의 비전이 될 수는 없다. 남들이 다 대학 간다고 해서 따라가면 안된다. 남들이 다 증권투자 한다고 해서 따라 하면 안된다. ‘?’가 문제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셨고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합의된 인생의 목표, 인생의 원대한 그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비전을 가슴에 품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발견하자

 

How가 아니라 to Where이다:

e.g.> 어느 장군이 부하들을 이끌고 고지를 점령. 숱한 희생을 치르고 고지에 오른 그가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아닌가벼···.” 몇 개월간 고생하여 다시 다른 고지로 올라가자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거기가 맞는가벼···.”

비전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어떻게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로가 문제이다. 방향이 분명하면 신명이 나고, 일할 맛이 난다. 하나님이 쓰시려는 일꾼은 자신이 비전을 가지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가 리더이려면 비전제시 과제(envisioning task)를 잘 감당해야 한다.

 

3) 체질을 개선하라

이것은 저 자신에게도 하는 말입니다. 설교자적, 강사적 체질에서 소그룹리더적·훈련가적 체질로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g.>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구속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함. 그래서 천사를 보내지 않으시고 친히 이 땅에 오심. 그런데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시니, 천군천사들이 박수를 치더라는 것. 참 잘하시고 오셨다고. 그때 가브리엘이 다가와서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그 사역을 완성하셨냐고?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12명에게 맡기고 왔지!” 구속사역자로서의 주님외에 우리는 훈련가로서의 주님을 보야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그리고 일꾼을 만드는 일꾼으로 일하려면 무엇보다도 성육신 (incarnation), 동화(identification)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성육신, 동화의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곧장 개입(involvement)로 들어 가려 한다. 그러다 보니 dialogue는 있지만, communication은 없는 상태가 생긴다.

e.g.> 한 경상도 아줌마와 선교사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버스가 오자 아줌마: “왔데이!” 선교사를 이 말을 'what day?'로 받아 “Monday"라고 대답. 그러자 아줌마를 뭐냐고 묻는 줄 알고 버스데이”. 선교사는 이 말을 ‘birthday’로 받아 “happy birthday!”. 그러자 아줌마: “해피 버스가 아니라, 경남버스 데이

우리는 뭘 말하려 하는 설교자적 체질에서 벗어나, 먼저 듣고(listening), 질문하기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4) 시간관리

사람이 하는 일중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을 4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하지 않고 급하지 않은 일

중요하지 않은데 급한 일

중요한데 급하지 않은 일

중요하고 급한 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정하신 년수가 있다. 오래 산다고 해서 더 많은 일을 한다는 보장이 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 33년을 사시면서도 다 이루었다하시면서 숨을 거두었다. 중요한 것은 정해진 시간에 중요한 일을 먼저하고 그 다음에 덜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무엇이 중요한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인생의 목표, 곧 비전을 이루는데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목표와 무관한 일에 시간을 쏟지 말라.

 

찰스 허먼 "긴급성의 압제"(Tyranny of Urgent)에서 기록된 글로 본 강의를 마친다.

 

중요한 일이란 오늘 꼭 해야 하거나 이번 주에 꼭 해야 하는 경우가 드물다. 반면에 긴급한 일은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이런 일의 순간적인 매력은 뿌리칠 수 없고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 에너지를 삼켜버린다. 그러나 긴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 기만적으로 두드러졌던 모습은 희미해진다. 우리는 중요한 일을 옆으로 밀어 두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상실감을 갖게 된다. 우리가 긴급성의 압제에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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