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브라함 | 이순태 목사 | 2012-04-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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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브라함 말씀 / 창세기 11:27-25:11 I. 믿음의 조상 ① 성경에는 여러 믿음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다니엘 3:17-18절에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두려워하지 않고, 그 도전에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넜고 가나안을 정복하였다. 어린 다윗은 믿음으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에스더 왕비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말한 것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며, 나사렛 처녀가 어느날 ‘너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리라!’는 천사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면서도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라고 순종한 것,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가장 위대한 믿음의 모본이 되는 사람은 역시 아브라함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11절에서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가하면, 아벨에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서사시를 장엄하게 읊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에는 19명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중 가장 자주 언급된 사람이 아브라함이다. 바울이나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믿음의 사람이 라고 불렀을까?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가진 것일까? II. 믿음이란? 1) 믿음은 떠남이다. ①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처음 나오는 동사는 창 12:1절에 ‘가라!’이다. 어디로? 목표가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현재의 자리에서 떠나라는 것!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안내만을 의지하면서 떠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말씀에 따라 떠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하란을 떠났다. 세겜과 베델을 떠났고, 애굽과 그랄을 떠났고, 브엘세바를 떠났다. 아브라함은 어느 한 곳에 머물면서 자신의 위치를 구축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 따라 걸어가는 삶이었다. 그는 떠나고, 떠나고, 또 떠나면서 그의 자아는 가벼워졌다. 뭔가를 남겨 두고 떠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채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그러면서 소유의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무엇을 ‘획득하는 삶’에서 ‘받아들이는 삶’으로 변화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낯선 나그네를 받아들이고, 이삭을 받아들이고, 할례를 받아들이고...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지를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길의 정상에 바로 모리아 산에서의 ‘결박’ 아케다 사건이 있다.
※ 초대 교회 교인들의 별명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었다. 그 길은 물론 예수라는 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길을 나의 길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길이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걷는 이가 있어서 길이 생긴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지도가 있어야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했던 한비야가 다시 보인다(“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저자). 그녀는 새로 시작하는 길을 거친 약도와 나침반만 가지고 떠난다고 한다. “길을 모르면 물으면 될 것이고, 길을 잃으면 헤메면 그만이다.” 이런 홀가분함을 가지고 산다면, 두려운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② 영화 빠삐용/ '빠삐용'은 억울한 누명으로 살인죄를 뒤집어 썼다. 빠삐용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묵살되고, 종신형 선고를 받아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빠삐용은 드가라는 또다른 죄수와 친해지게 되고, 둘은 탈옥을 시도한다. 하지만 곧 체포되고, 이들은 2년 동안 비인간적인 지하감옥에 격리 수용되지만 자유를 향한 갈망을 버리지 않는다. 다시 탈옥을 시도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하고 만다. 그러면서도 빠삐용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검사에게 복수하려는 일념에 불타고 있다. 하지만 그후로도 계속되는 탈옥 시도가 매번 실패하고, 백발이 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상 최악의 감옥이라는 '악마의 섬'이다. 거센 파도는 끊임없이 섬 쪽으로 몰려오기 때문에 파도를 빠져나갈 수 없고, 게다가 섬 주위에 상어떼들이 득실댄다. 이 섬에서 빠삐용은 오랜 감옥 친구 드가를 다시 만난다.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빠삐용은 다시 탈옥 계획을 세우지만, 드가는 탈옥의 꿈을 함께 하지 못한다. 집채만한 파도에 밀려 절벽에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건만, 빠삐용은 절벽을 새처럼 날아 바다로 뛰어 든다. 그리고는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망망대해로 나아간다. 섬에 홀로 남겨진 드가는 바다 멀리 사라지는 친구를 보면서, 씨앗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섬안쪽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아주 쓸쓸히! 임재범씨가 부른 노래 “saddle the wind”의 가사이다. “어디쯤 난 온 걸까 어느 곳에 난 서 있나 내가 사랑했었던 내가 미워했었던 모든 걸 놓지 못한 채 saddle the wind 떠나본다 푸른 세상 속으로 나의 영혼 찾아서 saddle the wind 뿌려 본다 나의 작은 욕심도 이젠 나를 버린다 saddle the wind 떠난 사람 떠난 대로 남겨진 사람 남겨진 대로 너무 소중했었던 삶의 조각들 모두 던져 버리면 saddle the wind 지워본다 나의 아픈 기억들 거친 들판 속에서 saddle the wind 잊지 말자 내가 사는 이유를 나의 하루 저문다 saddle the wind oh saddle the wind oh saddle the wind saddle the wind 뿌려 본다 나의 작은 욕심도 이젠 나를 버린다 saddle the wind saddle the wind saddle the wind saddle the wind Like the wind” 2) 믿음은 희생이다. ① 오늘날은 이동이 매우 많다. 처음에는 새 학교를 찾아 이동한다. 그러다가 새 직장 때문에 이곳 저곳 움직인다. 모든 이주는 재적응을 요구하고, 관계와 생활방식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 특히 내가 뿌리를 내리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희생을 전제한다. 믿음의 길은 결코 정태적인 것이 아니다. 한때 믿음이 큰 사람이 어느새 작은 믿음이 될 수도 있고, 작은 믿음의 사람이 큰 믿음의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믿음의 길은 반복해서 시험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 시험은 희생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희생은 믿음을 가장하는 영적 환상이 가짜 믿음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희생은 탐욕의 눈을 빼내어 버린다. 희생은 움켜쥐는 손을 잘라내 버린다. 희생은 내가 지금 들고 가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결박해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하시는지를 보고자 하는 마음이다. ② 아브라함은 희생에 관한한 베테랑이었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이른 후 그가 한 첫 번 일은 희생제단을 쌓는 일이었다. 세겜, 베델, 그리고 헤브론 등 가는 곳마다 아브라함은 희생제단을 쌓았다. 희생은 믿음이 성숙해지는 유일한 길이다. 희생 없이는 믿음 없다. 이곳 저곳에 제단을 쌓으면서 희생의 삶이 아브라함 속에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점차 자기 자신을 내려놓게 되고, 하나님의 주권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믿음은 설명이나 개념을 암기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희생의 실천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오직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만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래서 희생이 무엇을 잃는 것이 아니라는 것,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더 채워지는 것임을 경험하게 된다. 믿음은 가르치고 배우는 교리로서의 믿음이 아니다. 유진 피터슨 이라는 신학자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순종하며 신뢰하는 것,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분과 순종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 전혀 알지 못하는 땅으로 과감하게 발을 내딛는 것이다.” 3) 믿음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삶이다. ①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사건은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을 담고 있다. 바로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한 사건이다. 유대인 랍비들은 이 사건을 ‘아케다’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결박’이란 뜻이다. 이 아케다 사건은 믿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지만, 먼저 우리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실 수 있을까? 그것도 하나님이 먼저 약속하셔서 주신 자식이고, 노년에 얻은 아들이라 더 애지중지하며 키웠는데, 하나님이 먼저 자신의 약속을 깨뜨시는 명령을 어떻게 내리실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다. 결박에 순순히 응하는 이삭의 자리든, 자식의 목을 찌르기 위해 칼을 들어 올리는 아브라함의 자리든 우리는 끔찍해서 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임을 알고 잇는 우리로서는 이 사건을 그대로 수용하기가 매우 힘들다. 이 사건은 믿음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에게 거대하고 무감각한 바위처럼 길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믿음의 길을 가는데, 이 이야기를 비껴갈 방법이 없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결박한 ‘아케다’ 사건은 아브라함의 길에서 결정적인 사건일 뿐 아니라, 창세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② 창 22:1절에 의하면, 모리아 산의 사건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다! 그 시험의 핵심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내드리는가?’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정작 삶의 모습은 하나님을 나의 욕망을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필요에 도움이 되기에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닐까? 모리아산의 시험은 아브라함이 이제까지 하나님을 자신의 입맛에 맞추려고 했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주어가 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삶의 주어가 되는 삶은 아니었는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③ 렘 17:9의 말씀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마음이다! 이 명제에서 예외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 인간 속에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누구에게나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삶의 주어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믿음은 시험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를 기만한다. 역사를 살펴 보면, 기독교를 포함하여 어떤 형태든 종교는 폭력과 학대, 미신과 전쟁, 독재와 교만을 양산하는 토양이 되어 왔다. 그래서 바른 신앙에는 반드시 시험이 필요하다. 인생에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들이 많다. 우리 앞에, 우리 위에, 우리 안에 우리가 모르는 영역들이 길게 뻗쳐 있다. 이것을 우리가 수용해야 하는데,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이 이해가 안되면,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속 편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하나님은 우리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우상이 되고 만다.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시는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가? 우리는 상식적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하나님을 요구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통제할 수도 없는 그분께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가? ④ 이삭의 결박사건만큼 우리의 믿음에 대해 큰 요구를 하는 부분은 성경에 없다. 무척 간결하게 기록된 이 이야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혹함이 있다. 독일에서는 어린이들에게 가장 먼저 방문하도록 하는 역사 유적지가 있다. 바로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을 600만명 살해한 집단수용소이다. 그곳에서 다시는 이런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교훈한다. 이를 위해 많은 전시회, 공연들이 발표되는데, 그중 극작가인 ‘롤프 호흐후트’가 쓴 ‘대리인’이라는 작품이 있다. 그 작품에서 한 유대인 노인이 부인과 자녀들과 함께 수송차에 실려 가스실로 가고 있었다. 그때 이 노인은 자신을 호송하는 군인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제발 이 수송차 안에서 처자식, 손자들 앞에서만은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부모가 비참하게 살해당하거나,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식들이 먼저 살해당하는 것만큼 큰 비극이 있을까? 그것만은 면해 달라는 것.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을 때, ‘하나님, 제발 제 손으로 제 아들 죽이는 일은 없게 해주십시오’ ‘부디 아들의 목을 찔러 죽이고 그 시신을 불에 태우는 일만은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호소했어도, 아브라함을 비난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리아 산으로 향했다. 믿음은 우리가 제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가는 길이 아니다. 하나님이 제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가는 길이다. ⑤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을 오를 때, 이삭이 물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때 아브라함은 대답한다. “아들아, 번제한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여기서 ‘준비하실 것이다’ 라는 히브리어는 ‘이르에’인데, 본래적인 의미는 ‘보다’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실 것이다’이다. 즉 하나님이 가라 하신 길,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확신!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믿음이다.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약속을 이루실지 모른다.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마저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것은 구원이요, 복된 것임을 의심치않는 것이 믿음이다. III. 놀라지 않음에 놀람 ① 오늘 본문은 오랫동안 수없이 읽어온 이야기이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저는 여전히 놀라게 된다. 당혹스러운 하나님의 요청에 놀라기도 하지만, 이야기 속에 놀라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는 명령에 아브라함은 아무런 고뇌를 드러내지 않는다.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라는 아들의 질문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아브라함은 대답을 한다. 또 칼을 잡고 아들의 목을 찌르려는 찰나에 대해서도 어떤 부가적인 수식어가 없다. 왜 그럴까? 왜 나는 놀라는데, 아브라함은 놀라지 않는 것일까? ② 하나님은 여러 번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믿음의 삶을 산다는 것은 시험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아브라함의 믿음이 언제나 시험을 통과한 것은 아니다. 첫째로, 땅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실패 ;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가나안 땅이 그와 그 후손이 몸 부대끼며 살 곳이라는 것을 명시하셨다. 그러나 그곳에 문제가 생겼다. 창 12:10. 기근이 찾아오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애굽으로 내려갈 것을 결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란을 떠났던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단을 발견할 수가 없다. 아브라함의 이런 모습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불신이라 할 수 있다. 인간적인 판단에 의해 애굽으로 내려간 결과는? 자기 아내 사라의 미모가 뛰어나니, 아내 때문에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지 않을까 해서 거짓말(오라버니!). 자신뿐 아니라, 그 아내에게도 거짓말을 요구하게 된다! 참으로 초라한 모습이다. 믿음의 결단으로 먼길을 걸었던 그 모습은 사라졌다. 이런 아브라함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애굽왕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려 사라를 보호하신다. 아브라함의 추한 모습,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신실성을 가지시고 그를 보호해주신다. 이와 비슷한 일이 창세기 20장에서 반복되는데, 그때는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똑같은 거짓말. 이때도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사라를 보호하신다. 둘째로, 자손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실패 ; 하나님께서는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 그러나 현실을 보니 도저히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적어도 자녀 몇 명은 되어야 그 약속이 이루지겠구나!’ 짐작한다. 그러나 한 명도 자식이 없다. 이에 인간적인 대안을 만들어낸다. 어떤 대안이었든가? 창세기 16장 1절을 보니, 사라가 데리고 있던 애굽인 여종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얻자는 것이었다. 먼저 사라가 이 안을 제시했고, 아브라함은 그 안을 받아들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해서 제시한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갈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그로 인해 이스마엘이 태어났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의 실패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상황을 먼저 보고 인간적으로 대처하려는 방식은 하나님의 백성이 저지르기 쉬운 전형적인 잘못이다. 아브라함은 이런 시험을 통해서 자신의 한계,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렸다. 모리아 산 사건은 우리에게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로 다가온다. 언약의 하나님이 전혀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가라!’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떠나는 삶을 살았다. 포기하고 내려놓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희생 제단을 쌓았다. 실패하면서 다시금 아브라함은 더 많이 자아를 내려놓았고, 더 많은 비전과 약속을 안고 여행을 계속했다. 이제 모리아 산에서 독자를 바치라! 명령을 받는다. 그것은 그의 미래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이 요구에 아브라함은 ‘아멘’ 하며 순종하였고, 그리고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아들을 되돌려 받았다. ③ 사도 바울은 이 아케다 사건과 관련하여 고전 10: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모리아 산의 사건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이다. 그의 기쁨이요, 그의 소망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바치라? 이것은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믿음은 무엇인가? 쓰다 남은 부스러기가 아니라, 나의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 과정은 힘들 수 있다. 도저히 이해가 안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아멘! 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다른 준비를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살다 보면 어려울 때 있다. 믿는 자들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어찌하든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걸을 때,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 좋은 것을 준비해두심을 믿으시길 바란다.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걷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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